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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해주최씨 충효열 비석 제막식 가져열부 문화류씨 노래비 건립과 노래 발표회도 열려
최성은 기자 | 승인 2016.03.21 17:57

1백여명의 화순 유림과 후손들이 모인 가운데 3월 14일 화순 다지리에서 김기범 작곡 최일수 작사 ‘유씨부인’ 발표회와 함께 축하공연 및 열부석상과 비석 제막식을 가졌다.

이날 제막식을 주관한 최일수옹은 문화류씨 열부를 기리며 사모하는 마음을 노래로 만들었다. 음반까지 제작한 최옹은 아끼는 후배 가수들로 하여금 부르도록 했고 비석에도 새겨 후세들에게 그 마음을 전하고 있다.

최옹은 평소 작사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도장을 찍어, 내 여자가 제일이야, 그렇게 살고 싶어, 꺾지 마세요’ 등의 작품이 있다.

화순군 화순읍 다지리 다산마을은 해주최씨 승지공파 집성촌이다. 고려시대 해동공자 문헌공 최충 영당이 마을에 있다. 그 옆에 해주최씨 열부각과 의병장비, 효자비가 있다.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이끌고 흥덕 사진포(현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한 충신 최서생(崔瑞生.?∼1597)과 전란중 남편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가 순절한 열부 문화류씨(文化柳氏.?∼1597), 그리고 무과급제후 통정대부로 흥덕현감을 지낸 그의 아들 효자 최기종(崔起宗.1595∼1670)을 기리는 충효열의 현장이다.

최서생(崔瑞生)은 해주최씨 18세손으로 효자 열역재(悅易齋) 류덕용(柳德容)의 딸인 문화류씨를 부인으로 맞게 되었다. 류씨부인은 부친의 정훈유습(庭訓儒習)을 잘 배운 명가의 후예로 시부모 섬기기를 친부모처럼 하고 남편에게도 극진한 예로서 섬겼다. 이 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으니 그가 뒷날 흥덕현감 최기종(崔起宗)이다.

열부각 앞에 있는 통정대부 행흥덕현감 해주최공기종 유적비문을 살펴 그 대강의 내력을 알아보자.

공의 휘는 기종, 자는 효숙(孝淑)이다. 해주최씨 문헌공 충, 문화공 유선, 양평공 사제가 대를 이어 미를 이루므로 동방명문이 되었다. 부친의 이름은 서생이며 모친은 문화유씨로 명정 받은 효자 덕용의 따님이다.

공이 선조28년 을미(1595년)에 탄생하니 난지 겨우 세 살인 선조 정유에 왜적이 재 침략할 때 부친이 집 종 등을 거느리고 창의하여 흥덕 사진포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불굴하고 전사하였다.

모친 유씨가 그 변보를 듣고 즉시 사진포에 달려가서 시신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고 체류하고 있던 중 종 순동(順童)의 노력으로 겨우 찾게 되었다. 그는 집에서 가져간 새 옷으로 염습(殮襲)을 하고 입관(入棺)하여 전제(奠祭)를 올렸다. 흰 소복을 갈아입은 류씨 부인은 남편 시신 앞에 사배(四拜)한 뒤 밤이 되어 부득이 예법을 지켜 가면서 종과 함께 철야를 했다.

그 때 마침 왜병이 순찰을 하다 놀라면서 심히 물었다. 부인 류씨는 전후사실을 모두 말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부인 류씨는 할 수 없이 종 순동이와 함께 밖으로 나와 초라한 객사 처마 밑에 자리를 펴고 밤을 보내기로 했다. 이때 왜병 하나가 다시 찾아와 그들의 처소로 불렸다.

부인 류씨는 마땅치는 않았으나 왜적 천하에서 그들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어 왜놈의 처소를 들어갔다. 왜장이 앉아 있었다. 그는 류씨 부인의 단아한 자태에 눈이 멀어 부인을 희롱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으나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왜장은 유씨의 자색을 보고 탐내어 겁탈코자 달려들어 유씨의 유방을 더듬어 주물렀다.

유씨 부인은 의연히 거짓 미소를 지으면서 왜장에게 몸이 청결하지 못하니 밖에 나가 깨끗이 하고 다시 오겠다고 말하며 간청을 했다. 왜장은 쾌히 허락을 해주었다. 유씨 부인은 그 길로 돌아와 남편 시신 앞에서 통곡 사배(四拜)를 다시 올리며 죽음을 각오하였다.

세 살난 아들을 집 종인 순동에게 양육해 주기를 부탁하고 이르기를 ‘더러운 왜놈이 나의 젖가슴을 더럽혔으니 이 더럽힌 젖을 우리 지체 높은 낭군의 아들에게 먹일 수 없다’고 했다. 재촉하는 왜병을 보고 장도를 꺼낸 부인은 두 유방을 잘라 왜병 얼굴에 던지고 사진포 바다에 투신하여 순절하니 공은 세 살난 고아이다.

공이 혈혈단신으로 자라매 부모 원수를 갚고자 와신상담 갖은 고생을 참고 문학을 착실히 닦으며 겸하여 무술을 연마하여 인조 을유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초직으로 진해현감을 제수 받으니 인조대왕에게 정유재란 사진포에 얽힌 원통한 사정을 상주하여 부모원혼 위로하기를 애원한데 인조대왕이 가상히 여기고 측은히 여겨 흥덕현감으로 바꾸어 제수하였다.

흥덕에 있을 때 자나 깨나 부모봉양치 못한 것이 철천지한이 되어 공가만 있으면 사진포에 나아가 배회하면서 눈믈을 삼키고 목메어 울며 집에 돌아올 줄 몰랐다. 춘추마다 사진포에 수제(水祭) 지낼제 사진포 물이 삼일간 끓어올라 붉게 물들이니 흥덕골 관리나 백성들이 그 지극한 효성에 감탄 아니할리 없었다.

또 효도한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니 온 고을 백성들도 효제의 풍화에 흥기하였다. 또한 모친 순절 사시를 누차 상소하여 효종 정유에 열부명정을 받으니 그 사실이 흥덕 화순 읍지에 자세히 실려 있다.

1657년 화순 지실마을에 문화류씨 열녀문이 명려되었고 1984년 다산마을로 이건했다. 열녀각 주변은 2015년 후손 최일수에 의해 정비되었다. 열녀각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열부 석상과 노래비가 있다.

화순 다지리에서 열린 해주최씨 충효열 비석 제막식

 

최성은 기자  koindol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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