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정씨(河東鄭氏)의 조상을 봉향하는 유서 깊은 사당, 광주 화담사가 하얀 꽃과 연한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는 신록의 언덕에 고즈넉하게 들어서 있다

예로부터 향기롭고 화사로운 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난다 하여 ‘군분(郡芬)’ 또는 ‘화담(花潭)’이라 불리는 동네가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花亭洞)이 그곳이다. 광주 지하철 화정역 4거리에서 이면 도로를 따라 서부시장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도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를 병풍 삼아 서있는 주택들 사이로 고풍스러운 기와집들이 하얀 꽃과 연한 초록빛으로 물들어 가는 신록의 언덕에 고즈넉하게 들어서 있다. 마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양반집 규수들이 화사한 꽃밭 속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듯하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된 ‘화담사(花潭祠)’다. 경상남도 하동군을 본관으로 하는 ‘하동정씨(河東鄭氏)’의 조상을 봉향하는 유서 깊은 사당(祠堂)이다.

화담사 제일 안쪽에 자리한 사당, 묵은공 정희를 비롯한 다섯 분의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다

고려말 충신, 정희와 그 아들 손자 3대를 모신 사당

고려말,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과감한 개혁 정치를 단행했던 고려 31대 공민왕이 죽고 나자 그동안 기득권을 누렸던 권문세족 출신의 무장 세력이 몰락하게 되고 그 빈자리를 신진 세력들이 채우게 된다.

그동안 권문세족들의 위세에 눌려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함경도 동북면 시골 변방 출신의 이성계 장군은 새로운 학문인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을 등에 업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른바 ‘사림파(士林派)’라고 불리는 급진 개혁파들과 손잡은 ‘신군부’ 세력들이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즈음, 중화 대륙에서는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가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며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로 하여금 명나라 요동을 정벌할 것을 명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압록강 위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이성계 장군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는 안 된다’는 등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말머리와 칼끝을 개경으로 돌렸다. 역사는 이 사건을 ‘위화도 회군’이라 기록하고 있다.

위화도에서 개경으로 군대를 돌린 이성계 장군은 백전노장 최영 장군과 고려의 충신들을 죽이고 새로운 국가, 조선(朝鮮)을 건국했다. 이성계가 잡은 ‘별의 순간’은 474년간 이어온 고려에게는 ‘망국의 순간’이었다. 서기 1392년의 일이다.

그동안 권문세족들의 권력독점과 전횡에 염증을 느꼈던 수많은 고려의 인재들이 새로운 이상국가 조선을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충신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을 외치며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들도 적지 않다.

쿠데타로 집권한 정통성 없는 왕조,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고려의 충신과 지식인 72명은 수도인 개경 인근의 광덕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연릉리에 세워져 있다는 ‘두문동유허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연을 전해 들은 태조 이성계는 이들을 등용하고자 친히 경덕궁에 과거를 열었으나 고려의 충신들은 경덕궁이 내려다 보이는 부조현 고개에 조복(朝服)과 관을 벗어던지고 끝까지 이(李)씨 왕조에 출사 하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두문동 72현(杜門洞七十二賢)’이라 부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연릉리에 이들을 기리는 ‘두문동유허비’가 세워져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도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이면서 ‘9정신(九貞臣)’으로 추앙받던 묵은공 정희(鄭熙 1350~ ?) 선생을 기리는 사당, 화담사(花潭祠)가 있다.

화담사의 외삼문 팔덕문이다. 8가지 덕이 들어온다는 의미로 8가지 덕은 인·의·예·지·충·신·효·제를 말한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건재한 서원

광주 화담사는 고려말 충신, 정희를 주벽으로 하고 아들 정초(鄭招 ?~1434), 손자 정수충(鄭守忠 1401~1469)과 후손인 정오도(鄭吾道 1647~1736), 민제장(閔濟章 1671~1729) 등 5위를 향사하고 있는 사당이다.

묵은공 정희 선생은 충신의 대명사, 포은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 우왕 때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집의와 승진현관직제학을 역임했다. 스승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순절하던 날 원도로 유배되어 9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해배 후 고향 대구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던 중 태종이 수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이를 거절하고 끝까지 고려 왕조에 충절을 지켰다.

화담사 강당으로 사용하는 고경당, 고경당은 지금도 인문학 강의 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문경공 정초는 묵은공의 둘째 아들로 세종 때 <농사직설>을 편찬할 정도로 농업, 과학, 예술분야에서 대업을 이뤘다. 손자 정수충은 세조 때 공신으로 지금으로 치면 서울대학교 총장 격인 ‘성균관 대사성’을 지낼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정오도는 정수충의 8대손으로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한 성리학자로 효성이 뛰어난 문인이었다. 민제장은 광주에서 출생한 무신으로 영조 때 소론 강경파들이 정권을 찬탈할 목적으로 일으킨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무장으로 훗날 병조판서로 증직 되었다.

대대로 대구에서 살았던 묵은공 정희의 후손들이 광주 화정동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 때의 일이다. 전라도 보성군수를 지낸 정화(鄭和 1434~1505)가 군수 임기를 마치고 1477년경에 이곳으로 이거한 후 대대로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학생들의 기숙사 격인 청지재(聽之齋). 주로 저학년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열호재(悅乎齋). 고학년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광주 화정동에 터를 잡은 후손들은 1776년에 문절공 정수충의 영정을 모신 영당을 이곳에 세웠는데, 이것이 화담사의 시작이다. 그 후 윗대 선조들을 차례로 모시면서 영당의 기능 넘어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양성하는 서원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1868년, 고종 5년에 있었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위기를 맞았으나 지붕을 검은 천으로 덮어 은폐·보존하면서 훼철을 피할 수 있었다. 제례의식을 중단했다가 1905년 광주향교의 발의로 복설 됐다.

화담사는 앞쪽에 학문의 공간을 배치하고 뒤쪽에 제향의 공간을 배치하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서원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다.

화담사에서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외삼문인 팔덕문(八德門)을 들어서면 학생들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청지재와 열호재가 있고 강당으로 사용하던 고경당이 있다. 고경당은 지금도 인문학 강의 장소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화담사의 내삼문 양양문. 큰 바다처럼 넓은 문이라는 뜻이다

서원 안쪽 높은 계단 위에 대문이 하나 더 서 있다. 제향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인 ‘양양문(洋洋門)’이다. 큰 바다처럼 넓은 문 안쪽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람인‘(人)’ 자를 닮은 맞배지붕의 사당에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고려말 충신, 묵은공 정희를 비롯한 다섯 분의 신주(神主)가 모셔져 있다.

임영열 기자  youngim1473@hanmail.net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