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문화재단 조상열 대표

식구(食口)란 말이 있다. 한 집에서 같이 살면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 곧 식솔(食率)을 말한다. 요즘 반려견도 한 식구와 다르지 않고, 직장에서 함께 일하며 늘 식사 를 같이하는 사람도 가족이자 식구인 셈이다.

음식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한다. 좋은 음 식을 잘 먹으면 보양이 되지만,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 독이 될 수 있다. 살기 위해 먹느냐, 먹기 위해 사느냐는 말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음식이다.

역사를 보면 음식은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고, 서로 간에 빼앗고 죽이는 수많은 전 쟁도 따지고 보면 먹고사는 일에서 비롯되었다. 사람과 동물 저마다 좋아하는 먹거리와 먹는 양이 다른 탓에 늘 치열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이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 이 자행되고 있다.

‘먹을 것이 하늘(以食爲天)’이었던 시대에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싸움을 하고 화해 할 때나 서먹서먹한 사이에도 함께 음식을 나눠먹다 보 면 앙금과 오해는 사라지고 관계가 금세 회복되기도 한 다. 바꿔 말하면 함께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과는 절 대 음식 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먼저 가정과 사회,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家長)과 리더 의 덕목은 먹을 것, 입을 것, 가질 것 등을 형평(衡平)에 따라 나누는 균형에 있다.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가지 런하게 하고 난 후라야 천하를 화평하게 할 수 있다는 ‘수신제가평천하(修身齊家平天下)’를 말한 것이다.

국정을 요리(料理)한다는 말이 있다. <도덕경>에 “큰 나 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 고 했다. 생선을 요리할 때 자주 뒤집으면 다 부서지듯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을 괴롭히면 흩어지니, 생선 요리 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宰相)이 요리사였다고 한 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재(宰)’자는 관가의 요리 를 맡은 요리사, 주관하다, 맡아 다스리다, 벼슬아치 등 여러 가지 뜻을 지닌 한자로 고대 귀족 가문에서 집안일 을 총괄하는 사람, 혹은 주방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상(相)’자는 ‘서로’라는 뜻 이외에 도 ‘보다, 보좌하다, 돕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재상 (宰相)’이라는 단어는 주(周)나라 때 국정과 궁중 사무를 총괄 관장하는 천관총재(天官冢宰)라는 벼슬에서 비롯 되었으며, 천관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 총재는 제사 에 쓰는 음식을 장만하고, 제사가 끝난 후 참석자들에 게 음식을 골고루 나눠주는 역할을 맡은 직책이었다.

씨족 사회에서는 족장의 집이 나라였고, 집안일이 바로 나랏일이었으며, 군주가 집안과 가문을 다스리는 씨족 장인 동시에 마을을 대표하는 부족장이었다. 나랏일 중 에 가장 중요한 행사는 조상과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 이었기에 군주는 곧 제사장이었다. 원로 어른을 초청하 여 정성껏 장만한 음식으로 연회를 열어 대접하고 협상 타협하는 것이 내치(內治)이자 외교(外交)였던 것이다. 제사와 연회가 끝난 후 음식을 공평하게 분배하지 못하 면 내분과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그만큼 집안일과

음식 장만, 제사 관장과 음식 분배는 중요했기 때문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요리사 역할을 맡겼고, 그 관 직이 천관총재였다. 이러한 부족사회의 관습이 고대 중 국에서 요리사가 재상이 됐던 배경이다.

하(夏)나라 때 폭군 걸왕을 축출하고 탕왕을 도와 상 (商)나라를 세운 데 일등공신이었던 이윤은 명재상으 로 이름을 떨쳤는데 그는 본디 귀족 집안의 요리사였 다. 탕왕의 음식 시중을 들면서 나눈 대화로 인해 그 재능과 신뢰를 인정받아 상나라의 중책을 맡았다. 음 식을 나누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대표 적인 예이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개국공신 소하, 장량, 한신 이외도 좌승상 진평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젊었 을 때 고향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맡았고, 제사가 끝난 후 남은 고기를 참석자에게 공평하게 배분했는데 모두가 흡족해 했다. 고기를 자르던 진평은 “내가 천하 를 다스리는 일을 맡는다면 고기를 다루는 것처럼 잘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훗날 유방을 도와 재 상에 올랐다. 정치를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 하는 이 유이다.

사색당쟁으로 골치를 앓던 조선의 영조는 당쟁을 혁파 하고자 당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한다. 탕평 이란 말은 <서경(書經)>의 ‘왕도탕탕 왕도평평(王道蕩蕩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가깝다고 쓰고, 멀다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재등용 원칙이다.

영조가 신하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녹두묵 무침이

나오자 영조는 이 음식을 탕평채라고 부르자고 했다. 동 양에서 서쪽은 흰색(白), 동쪽은 푸른색(靑), 남쪽은 붉 은색(赤), 북쪽은 검은색(黑)을 의미한다. 서인, 동인, 남 인, 북인 각 붕당을 상징하는 색을 담은 요리에 탕평채 (蕩平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북인은 검은색이니 김가루, 동인은 푸른색이니 미나리, 남인은 붉은색이니 쇠고기를 볶아서 넣었고, 주재료인 청포는 흰색으로 서 인을 상징하였다. 주재료를 흰색의 묵으로 썼다는 것은 당시가 서인 집권기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탕평채는 영 양학적으로도 완벽한 균형을 갖춘 음식이자 화합을 상 징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몇 해 전 3·1독립선언을 한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새 겨진 다식판(茶食板)이 발견되었다. 차(茶)는 동심일체 를 확인하고 결속을 다지는 의례 수단으로 함께 마셨는 데, 신라 화랑도가 더불어 차를 마시고, 고려의 사찰에 서 다회(茶會)를 통해 한 솥 차를 돌려 마시는, 이 모두 가 결속 의례였던 것이다. 조상에게 차례(茶禮)를 지낼 때도 술 대신 차를 올리는 것은 조령(祖靈), 신령(神靈) 과 더불어 마심으로써 조손 신인(祖孫·神人) 일체의 공 감대를 형성하려는 뜻을 담고 있다.

2020년, 이공이공으로 읽어 보니 발음도 자연스럽고 부 드럽다. 우리 식솔은 물론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들과 더 자주 식탁(食卓)으로 대화하고, 다탁(茶卓)으로 담론 하는 새해를 다짐해본다. 돈독한 ‘관계(關係)’는 억지스 런 탕평이 아닌 자연스러운 정치(定置)를 낳으리니.

조상열 발행인  ddmh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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