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해안을 일주하고 있는 황안나

73살의 도보여행가 황안나. 개성에서 나서 광복하던 해 아버지를 따라 남으로 내려왔다. 6남매의 맏이였다. 어렸을 때의 꿈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가난해 책을 사진 못했어도 책방과 도서관에 많이 들러 책을 읽었고, 문학을 동경했다. 책방 책꽂이에 자기 이름이 적힌 책을 반드시 꽂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언감생심 국문학과로 진학하겠다던 꿈은 춘천역장이었던 아버지의 병환으로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버지는 교사가 되길 권했다. 그래서 춘천사범학교에 진학했다. 교사 생활을 하면서도 문예반 아이들을 가르쳤고 교지 제작을 담당했다. 여성지 잡지에 글을 보내는 것으로 작가에의 꿈을 달래기도 했다. 6명의 아우들 학비를 댔다.

23살에 결혼했지만 남편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교사 월급을 또 가족의 뒷바라지에 썼다. 남편은 양계, 조경, 서점, 택시 운전 등 ‘안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사업을 일으켰다 또 접곤 했다. ‘절대빈곤’이었다. 눈을 뜨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며 가슴을 쳤다. 어느 날은 어머니와 함께 먼 친척을 찾아가 돈을 빌려보려고 했다. 거절을 당했다. 어머니가 낙심한 황 씨에게 말했다. “정신 차려. 설마 죽겠어? 그래도 이만하기 다행이다.” 이 말이 황씨의 좌우명이 됐다.

그러나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가 남편은 아주 작은 욕실용품 수출공장을 열었다. 다행히 사업이 풀리기 시작했고 동안 쌓아온 빚도 가까스로 청산하게 됐다.

남편이 재기가 삶의 각성을 일으켰다. 교사 생활 49년째를 앞둔 57살 때의 어느 날 “아내 노릇, 교사 노릇, 엄마 노릇 등 숱한 노릇에서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남편과 상의를 했더니 ‘그러세요.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했다. 그래서 바로 다음날 사표는 냈다. 정년을 7년 정도 앞두고서였다. 문을 용기 있게 열고 밖으로 나가면서 존재의 변화가 시작됐다.

걷는다는 것은 존재의 변화이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하는 황안나 도보여행가

교사를 그만두고서 건강검진을 했다. 재검사를 해야 한다는 소견이 나왔다. 몸이 건강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2시간 반 동안 살고 있는 부평 동아아파트에서 만월산 능선까지를 타고 다시 집까지 3시간을 걸었다. 꼬박 3년을 그렇게 하자 다리에 힘이 붙었다. 이후에 산악회에 가입했고 전국의 산을 걸었다.

지리산 종주 7번, 백두대간도 종주했다. 발끝에서 전율의 기쁨이 느껴지고 온몸에 행복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인생의 2막, 2모작이 시작됐다.

<걷기 예찬>에서 다비드 르 브르통은 이렇게 말한다. ‘걷는다는 것은 걷는 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또 이런 구절도 있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으로의 초대다.’ 그 관능을 통해 마음 치유가 시작된다.

65살 때 해남 땅끝마을에서 임진각 통일 전망대까지 도보로 완주했다. 23일만이었다. 67살 때는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동해와 남해, 서해를 거쳐 임진각까지 118일 동안 국토를 종주했다. 이뿐이 아니다. 동티베트, 스페인 산티아고, 아이슬란드 등 세계 48개국 오지를 도보로 돌았다. 100㎞ 울트라 걷기대회에 참가해 46위로 완주했다. 걷고 돌아와, 다시 문을 열고 나가 걸었다.

국토 종단을 한 후에 책도 냈다. <내 나이가 어때서?>(2005. 샨티)였다. ‘남녘의 보리밭도 보고 싶고, 봄볕 따뜻한 흙길도 걸어보고 싶었다.’는 것이 걷기 시작한 이유라고 말했다.

어떻게 걸었을까? ‘걷고 싶으면 걷고, 쉬고 싶으면 쉬었다. 강가에 앉아 발을 담그고 그늘 좋은 나무를 만나면 달게 낮잠 한잠 청한 뒤 다시 걸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만큼, 딱 그만큼 외로웠다. 발은 부르터 아프고, 배낭은 갈수록 무겁고, 제때에 식당을 만나지 못해 치즈 한 조각, 건빵 몇 개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해질녘 낯선 여관방에 들어설 때는 쓸쓸함이 온 마음을 적셨다.’

하루 100리, 40㎞를 걸었다. 숙소를 못 정하는 날에는 50㎞를 걸었다. 아침 6시부터 걷고 밤이면 찜질방이나 모텔에서 잔다. 배낭에는 비상약, 간식거리, 갈아 입을 못, 카메라 등 15㎏. 세계를 함께 돌아다닌 길동무의 무게였다.

자신이 지은 책이 출고되던 날 황 씨는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의 대형 서점에 찾아갔다. 자기 이름이 적힌 책이 진열대에 쌓여 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어떤 중년 신사가 자기 책 2권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던 순간 책값을 대신 내주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했다. 16살 때의 꿈이 65살 때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자연 속에서의 고백성사

<내 나이가 어때서?>에서 황안나는 이렇게 말한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대자연은 그 자체로 큰 예배당이며 사찰이 되어주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가식이 없고, 억지가 없고, 포장이 없는 자연 앞에 서니 나 역시 발가벗고 나를 마주하고 싶어진다. 지금껏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들, 남에게 준 상처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사람에게뿐 아니라 이 자연의 뭇 생명들에게는 또 어떠했을까?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다”

“젊은 시절 몸이 고생했던 기억은 다 잊었어요. 인간적으로 저를 짓밟은 사람들이 내게 준 상처는 몇십 년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길을 혼자 걸으며 생각해보니 저도 남에게 상처를 많이 입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길 위에서 고백성사를 한달까, 길 위에서 그 사람들을 위해 용서도 빌고, 저도 용서했어요.”

마음을 내려놓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다. 길을 걸으면서 도보여행가 황안나는 나이도, 시간도, 행복도, 인생도 얻었다. 자연스럽게 ‘도보여행가’로 알려지게 되었고, 야후 파워 블로거가 되었다. ‘바람직한 삶’을 주제로 한 인기 강사, 방송 출연, 잡지 고정 기고 등 실버 세대의 인기 주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국해안을 일주하고 있는 황안나

<안나의 즐거운 인생비법>(2008. 샨티)은 그런 행복한 삶의 기록이었다. 블로그에 올린 실수담을 모은 것이었다. 올해 아흔 살이 넘은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 칠십이 넘은 남편,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까지 4대가 등장한다. 가족들 간에 사랑과 긍정의 힘을 넘어선 위트와 지혜를 담았다. 50대에 운전면허를 따서 기뻐하던 일, 70살에 카메라를 배워 사진 작품을 블러그에 올리던 일들, 젊은이들과 SNS를 통해 대화하는 재미를 새록새록 적었다. 자기를 고생시키던 남편과 두 번째 신혼을 지내고 있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엄마, 나 또 올게>(2011. 홍영녀․황안나 공저. 조화로운 삶)는 행복한 삶을 위한 마음 치유의 책이다. “설마 죽겠어!” 했던 노환의 어머니 홍영녀 씨를 간병인 없이 돌보면서 쓴 글들이다. ‘행복은 누리는 자의 몫이다. 또 자유는 용감한 자의 몫이다. 나눠라, 걸어라, 잊어라.’는 깨달음을 적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행복은 자신이 찾아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강연에서는 힘주어 말했다. ‘노년층에게는 생각을 바꿔보라고, 주부들에게는 자신을 감동시키는 일을 해보라’고 권유했다. ‘젊은이들에게는 살면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지만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말해주었다. ‘잘못 들어간 길일지라도 좋은 인연이 많고 세상을 살다보면 아름다운 인연도 많다’는 것이 황씨의 ‘걷기 철학’이었다.

우리 인생에 잘못 든 길이란 없다

황씨에겐 꿈 목록이 있다. 버킷리스트다. 실천에 옮겨 지워진 목록도 많고 새로 추가된 목록도 많다. 비록 실천하지 못한다 해도 아무런 꿈도 없이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기 보다는 삶의 질이 훨씬 달라지게 된다. 황씨의 버킷리스트에는 ‘사막에서 별 보기, 해마다 지리산 종주하기, 해마다 책 100권 읽기, 영어 회화 공부하기’ 등이 현재 들어 있다.

황씨는 해안 일주 해보기로 남해길을 걷고 있고, 서남해안 섬길도 걸을 계획이다. 6월에는 길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펴낼 예정이다. 걷고, 걸으면서 느낀 행복을 이야기하고, 책자에 기록으로 옮긴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73살의 할머니가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바람 없는 날 바람개비를 어떻게 돌리느냐고? 내가 달리면 바람개비는 돈다!’고…. 온몸으로 길을 열어가고 있는 도보여행가, 황안나는 길이었다.

대동문화 75호 [2013 3.4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