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 광주 동구에 있는 민들레소극장에 사람들이 조용히 북적거렸다. 마스크를 끼고 보폭을 줄인 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눈빛에는 생기가 돌았다. 문화예술교육공동체 연나무가 5.18 41주기를 맞아 인형극 <시민군 삼촌 윤상원>을 선보이는 날이었다. 관객들은 큰 말소리 대신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극장으로 들어섰다. 밝은 전등이 꺼지고 ‘자꼬할머니’가 뜨개질을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5.18을 주제로 처음 선보이는 인형극이었다. 극이 끝나고, 배우들의 손과 목소리에 몸을 맡겨 생생하게 움직이던 인형들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관객들과 소통하며 웃고 있는 ‘자꼬할머니’가 보였다. 풍부한 표정으로 ‘자꼬할머니’를 연기한 추말숙 배우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 광주 지역 내에서 다양한 예술활동을 펼치고 계시지만 배우님의 이력이나 소식을 쉽게 찾아보기 어려워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문화예술교육공동체 ‘연나무’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놀이패 신명이라는 전문배우 연출극단에서 17년 동안 활동을 했었고요. 2004년에 분리되어 작품창작이나 연출 위주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배우로서 활동을 많이 하지는 않아서 호칭이 조금 어색한데요. 배우 활동은 다른 곳에서 불러주면 몇 번 섰고, 주로 연출과 극작 위주로 일반시민들과 학생들이 연극을 접하고 연습해서 공연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는 문화예술교육활동을 합니다. 또 대동문화재단에서 지원하는 예술연극 강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5.18 그림자 인형극 ‘시민군 삼촌 윤상원’의 극작, 연출을 직접 맡으셨는데요. 5.18을 주제로 한 그림자 인형극은 새로웠어요. 이 인형극을 기획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요?

5.18 40주기였던 작년에 선보이기 위해 미리 계획해놓았어요. 40주기에 맞추어 5.18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서요.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무산되고, 어떻게 하면 소수 인원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인형극이 떠올랐던거죠. 또, 5.18을 주제로 한 공연이나 영화는 많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좀 더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극단 없이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다가가고 싶었어요. 한 사람이 인형을 통해 여러 인물을 등장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잖아요. 그리고 투쟁, 희생이 아닌 최근 가장 심각해지는 진실 왜곡에 초점을 맞추어, ‘진실을 밝히는 문제에 대한 작은 외침’을 주제로 했던 거죠.

- 극 중 배우로서 역할을 맡으신 ‘자꼬할머니’ 역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이름이 참 흥미로웠어요.

저희 엄마가 자주 하는 말이에요. ‘자꼬 왜 그러냐?’ 이런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거기서 얻은 아이디어에요. 어르신들이 자주 쓰는 ‘자꾸’의 사투리인 ‘자꼬’로, 하지않아도 될 일을 계속하는 오지라퍼인거죠. 중요한 인물은 아니지만, 자꾸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긍률하게 여겨요. 사람을 이어주고, 꾸준히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좋은 의미로서 캐릭터를 만들어낸거죠. 저는 거리두기로 더더욱 심각해진 이 무관심한 세상에서 오지랖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냥 제가 맡고 싶은 역할이었어요. 옛 정서로 따지자면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무당같은 존재랄까? 삼신할미 같은 시적인 존재에요. 신과 사람의 중간 지점에 있는. 크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이야기를 끌어내고 이어주고 마무리 지어주는 데 필요한 역할이에요.

- 연극을 보면서 ‘자꼬할머니’의 털털한 웃음과 관심이 유독 따뜻하게 전해졌어요. 배우님은 ‘자꼬할머니’를 연기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셨어요?

제가 공연을 앞두고 좀 아팠어요. 스트레스도 심했지만, 위경련도 오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상담을 받았는데, 아마 극 중 인물에게 심하게 감정이입을 했던 것 같아요. “비통하다.”, “불만족스럽다.”라는 감정이 가장 컸어요. 왜 시간이 지났는데도 진실을 밝히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지. 총기 난사의 증거가 있음에도 거짓말을 하는지. 이런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제 몸을 지배했던 거에요. 계속 연습을 하면서 죽은 사람들과 남은 사람들에 대한 비통함을 느끼고, ‘감정이입’을 넘어 몸으로 받아냈던 것 같아요. 무당이 그런 역할을 하잖아요. 또 ‘자꼬할머니’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윤상원 열사과 그 무고한 시민들과, 시민군들에게 맞닿아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또 짧은 시간 동안 보는 관객들에게도 이러한 감정이 전달되었으면 해서 더 애썼던 것 같기도 해요.

- 그만큼 이 연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픈 주제의식이 뚜렷했던 걸까요.

극 중 이런 대사가 있어요. “기꺼이 죽음을 각오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솔직히 어느 누가 죽을 각오를 하고 싶겠어요. 살고 싶은 게 사람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걸 알면서도 나라를 위해 자리를 지킨 한 청년에 대한 우리들의 미안함이 오래 남게 되는 거죠. 그에 대한 마땅한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비용의 문제가 아닌,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처벌받고, 죄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과해서 남은 가족들이라도 위안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래야 “내가 민주적인 세상에서, 안전한 나라에서 살고 있구나”라고 느끼고 값진 희생에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갈텐데 말이죠.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는 것, 책임자들이 합당한 죄의 대가를 받고 사과를 하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에요. 요즘은 소수의 사람들이 국민청원으로 모여 큰 목소리를 내는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보시는 관객들이 누가 어떻게 얘기하더라도,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거짓에 넘어가지 않고 518에 대한 의미를 잘 되새겼으면 좋겠어요.

- 배우님은 앞으로 어떤 활동을 이어갈 계획이신지, 또 개인적인 삶의 방향이 있으시다면요?

최근에 저를 보고 운동권 예술가라고 하는 걸 들었어요. 근데 저는 그냥 예술가에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그저 제 시각으로 표현한 것뿐이에요. 다음에는 유기견, 유기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버려진 존재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또, 코로나가 발생한 게 사실은 환경문제가 가장 크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 주제도 다루고 싶고요. 음... 삶의 방향이요? 코로나 이야기를 하니 이런 생각이 들어요. 생각 또한 전염되고 옮겨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 사람에게 담긴 좋은 생각은 세상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자꾸만 누군가의 생각을 건드려보고 알아가고 옳지 않다면 바꿔도 보고 싶어요. 그러면서 저도 바뀌겠죠. 1년에 연극 한 편정도는 꾸준히 할 거에요.

김혜라 기자  zhzhak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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