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 대동문화 사무처장

“환벽당도 소쇄원도 식영정도 배롱나무꽃이 너무 좋아요. 명옥헌은 말할 것도 없구요. 제가 20년 이상 배롱나무꽃들을 매년 봐왔는데 올해처럼 꽃이 좋았던 때는 없었던 것 같아요.”

“배롱나무꽃들이 왜 다른 해보다 더 활짝 예쁘게 피었을까요?”

“작년 겨울 날씨가 너무 추워서 자란 나무들이 많이 고사했어요. 냉해에 시달린 배롱나무들이 올해 마지막 남은 힘을 써서 꽃을 피우고 결실을 더 많이 맺으려는 거에요. 나무들은 위기를 감지하면 자기 생명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기 위해 있는 힘껏 꽃을 피우지요. 그러고 나서 다음 해에는 꽃을 쉬지요. 언제 한번 명옥헌으로 배롱나무 구경 와보세요.”

담양에 사는 지인의 권유대로 휴일 아침 명옥헌의 배롱나무들을 보러 갔다. 배롱나무들이 기후 참사라고 불리는 환경 변화와 투쟁하면서 생명의 몸부림으로 피워올린 꽃. 어느 해보다 더 선명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 배롱나무를 보면서 애처로운 마음이 흩날렸다. 이렇게 활짝 꽃을 피우고 나서 배롱나무들은 내년에 꽃을 만들 원기를 줄여 내년 한 해는 긴 휴식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소쇄원의 대밭에도 가보았다. 작년 겨울 동해로 댓잎들이 노랗게 변해 고사할 듯이 보였는데, 가지마다 새순이 다시 돋아나 푸른 숲을 이뤄가고 있었다. 한겨울 내내 누렇게 고사한 댓잎을 달고 있더니 그것이 새 생명을 위한 휴식의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광합성을 쉬고 원기를 뿌리에 모아놓았다가 봄부터 조금씩 힘을 내서 작은 가지들마다 새순을 내더니 여름에는 제법 푸르게 숲을 이뤄가고 있었다. 추운 겨울 동안 죽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잠시 쉬면서 치유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의 누정은 쉼의 공간이다. 휴식의 공간이다. 누정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 수는 없다. 정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지인들을 불러모아 경치를 감상하고, 휴식하면서, 유유자적한 마음을 시로 지어 서로에게 바치며 노는 것이다. 휴식의 공간에서 쉬면서 여유로운 풍류의 마음으로 창작해낸 것이 시이고 문학이고 풍류문화였다.

한국 시가 문학의 한 절정기를 이룬 곳이 바로 이 정자문화권이라고 했다. 화순 이서면, 담양 가사문학면, 광주 북구를 적시며 흘러내리는 원효계곡과 창계천으로 불린 증암천 인근이었다. 일동삼승이라고 알려진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이 문학과 풍류 문화의 산실이었고, 주인공들은 사촌 김윤제,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소쇄원 양산보,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등 16세기 호남 사림들이었다.

이 한국 가사문학의 성지를 상징할 수 있는 여름 나무를 찾아보라면 아무래도 배롱나무일 것이다. 그래서 증암천은 배롱나무에서 연유한 ‘자미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배롱나무를 자미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시가문학 작품에 자미화와 자미탄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에 ‘닦여진 거울 같은 자미탄 물속에 저절로 그려진 돌병풍의 그림자를 벗삼아 서쪽 개울로 함께 가니 무등도원이 어디인가. 여기가 바로 그곳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다.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은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인데 ‘츤간자미’라는 한시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피어나는 모든 꽃들은 열흘 가는 향기 도대체 없다네. 어찌하여 시냇가 이 백일홍만은 백일 내내 붉은 꽃을 대하게 하는가’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꽃을 피워 목백일홍이라고도 불린다. 또 자미화는 7월부터 9월까지 세 번 피었다 지는데 세 번째 필 때 벼를 벤다고 하여 쌀밥나무라고 한다. 또 간지럼을 타는 나무라 해서 간지럼나무 또는 파양수라고도 한다.

하서 김인후의 시가 유교적 이상향을 구현한 소쇄원를 찬미한 시라고 한다면 식영정 4선 중의 한 명인 석천 임억령의 식영정 20영은 도교적 이상향을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누가 귀한 곳에나 있을 배롱나무를 이곳 산골의 물가에 심었나. 선녀 같은 모습이 물 아래 비치니 고기와 새들이 놀라며 시샘을 하네.’

식영정은 석천 임억령의 나이 65세 때 사위이자 제자인 김성원이 장인을 위해 지은 것이다. 이름과 기문을 부탁하자 석천은 이렇게 ‘식영정기’를 썼다. ‘장자라는 책에 그림자가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이 싫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는 그림자를 끊어버리고자 급히 달렸으나 끊어지지 않자 죽을힘을 다해 달리다가 그만 숨이 차서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식영은 그래서 ‘그림자마저 쉬게 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써서 정자 이름으로 했다.

그러자 석천에게 김성원이 물었다. ‘그림자는 능히 스스로 행동할 수 없는 것이거늘 대저 선생님의 굴신은 세상이 버려서 그런 것이 아니잖습니까?’석천이 대답했다. ‘내가 숲에 들어온 것은 한갓 그림자를 끊기 위함이 아니라네. 나는 바람을 거느리고 조물주와 같은 무리가 되어 큰 벌판에서 놀려고 한다네. 그림자 감추었으니 어찌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찾을 수 있겠는가?’

정권 다툼이나 벼슬아치의 세상을 떠나 큰 정신세계에서 노닐고자 한 선비들의 뜻이 놀랍고 황홀하다. 그런 경지에서 쓰인 시편들이 한국 시가문학의 절정이라는 이름에 값한 것이다.

‘휴(休)’하고 쉬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 놀며, 일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휴식해야 새로운 감정과 생각이 생기고, 새 생명이 잉태된다.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 창작의 힘은 바로 휴식에 숨어있다. ‘그림자마저 쉬어가는’ 정신적 경지를 모르고 자기 그림자를 끊으려고 죽을힘을 쓰는, 결국 숨을 거둘 수밖에 없는 그런 돈놀음판의 세상, 정치판의 세상에서 떠나 마음을 쉬자. 그리고 배롱나무처럼 또 새로운 세상을 잉태하는 꽃을 피우자.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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