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 대동문화 사무처장

지난 23일이 24절기 중 18번째 상강이었다. 상강이면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기도 한다.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국화도 활짝 핀다. 벌레들은 동면을 준비하고, 농부들은 추수를 끝내고 겨울맞이를 해야 한다.

농촌에 사는 친구도 추수를 끝내고 볏짚 묶어 논에 세워두었다고 사진을 보내왔다. 볏짚을 말려 염소막 자리를 깔아두기도 하고 소여물로도 쓰려는 요량이란다. 볏짚은 메주를 매달 때도, 논의 벼가 태풍으로 쓰러졌을 때 묶어 세울 때도 쓴다. 콩나물 기를 때 배지로 쓰고, 논농사 없는 노인네 한 다발씩 드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용도의 볏짚 몇 단은 콤바인으로 베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낫으로 베어두어야 한다고 친구는 사족을 단다.

상강의 풍속을 인터넷에 물었더니, 권문해의 문집에 나오는 글이 인용되어 있다.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점점 산 모양이 파리해 보이고, 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도리어 근심이 되는 것은 노포(老圃)가 가을이 다 가면, 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노포는‘농사일에 경험이 많은 농부’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그래서 농사에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가을이 끝났으니 이제 서풍을 향해 술잔을 씻게나. 겨울에는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변화무쌍한 날씨 견디며 건강에 유의하시게.’라고 적어 보냈다.

그만 문자 대화를 마치려고 하는데 친구는‘기후변화 때문에 작물에 병이 많아지고, 노지 재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한탄을 한다. 상강인데도 날씨가 따뜻해 풀이 자라고 있어 논두렁 밭두렁의 예초를 한 번 더 해야겠다는 것이다.

처서는 8월 23일 전후로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모기 입이 비뚤어진다는 때다. 그런데 처서, 백로, 추분, 한로가 한참 지난 상강 때에도 풀이 철모르고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로 우리 민족이 농사를 짓고 살아온 수천 년 내력의 절기가 지금은 맞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는 코로나19와 같은 신종 감염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고, 기후변화로 병원체들은 높은 기온 속에서 더 빨리 증식하고 더 널리 확산된다. 이 때문에 생태계의 생산자와 소비자들의 균형이 깨지면서 다양성 위기가 환경 위기로 확산된다. 환경 위기에 적응된 바이러스가 생겨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코로나19라는 것이 세계보건기구의 연구 결과다.

기후 위기와 팬데믹은 결국 지구의 경고를 무시한 인간들에게 생태계가 전하는 강력한 경고였다. 사회, 경제, 의료, 노동, 주거 환경 등 모든 인류 삶의 영역에서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면서 무자비한 욕심과 이기의 경쟁을 벌인 인류가 스스로 자초한 위기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후위기를 멈추지 않으면서 위드 코로나 시대를 말할 수는 없다. 무자비한 경제성장과 파괴적인 자연 개발과 도시화라는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나, 생명이 중심인 지속 가능한 공존의 시스템을 위드 코로나 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미래학자들의 주장이다.

기후 위기로 우리 주변의 많은 생명과 문화예술의 흔적이 무너지고 사라지고 있는데, 우리 삶의 내력이 담긴 문화재도 마찬가지 운명이다. 울진 금강송면의 금강소나무들의 집단 고사는 대표적인 사례다. 해수면 상승으로 제주도 용머리 해안의 탐방로가 침수당하고 있다. 한라산 구상나무 군락이 고사하고 있다. 공주 공산성의 성벽이 집중호우로 무너지고, 안동 병산서원의 기와가 탈락되고 있다. 집중호우로 인한 매장문화재나 사적의 훼손은 그 가치를 셈해볼 수조차 없다.

광주의 증심사나 원효사는 주변 숲의 수종이 자연변화를 일으키고 있고, 주요 목조 건축물에서 흰개미 피해가 발견되고 있다. 학동 느티나무, 충효동 왕버들 등의 가지 부러짐 피해가 폭우기에 나타나고 있다. 광주의 성거사지오층석탑 등의 석탑 부재들도 산성비로 훼손되고 있고, 목조 건축물들의 배수 시스템이 홍수량을 감당할 수 없어 넘친 물에 기둥과 보가 부후되고 있다.

최근 문화재청 문화재연구소는‘문화재 기후변화 대응 현황 및 방안’학술 발표회를 열고 예전의 문화재 보호 정책 체계를 전면적으로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후 및 해수면 상승, 기후 평년값의 변화, 집중호우, 태풍, 가뭄, 산불, 지진 등과 같은 기후변화가 문화재 훼손의 주요인이 되고 있고, 다른 어떤 훼손의 요인보다 우리의 미래를 위협할 것이라는 예측을 발표했다.

문화재뿐이겠는가? 기후 위기와 탄소 중립의 과제는 더 이상 환경부나 산업부, 문화재청 등 일부 부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팬데믹이 문화예술, 인문, 관광 등의 분야를 어떻게 무너뜨렸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다.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암울한 현실이기도 하다.

문화예술이 팬데믹의 상처를 치유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개선하는 미래적 역할을 할 수 예측이 그래서 옳은 것이다. 기후 위기와 팬데믹이 앞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변모시킬 것인지를 정확히 예측하고, 창작 환경과 예술 유통의 생태계가 무너진 미래 대안을 촘촘히 설계하고 구축해야 한다. 인류와 생명 공존의 시대 인식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겨울나기를 준비해야 한다. 볏짚을 묶어 말려놓았다가 다음 해 물난리나 태풍으로 쓰러진 볏단을 묶듯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 미래의 상처와 위기를 묶어 세워야 한다. 서풍을 향해 술잔은 씻고….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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