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사당앞의 배롱나무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 호남 지방에서 최초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 종후, 인후와 유팽로, 안영 등 5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할 때에도 장성 필암서원과 함께 살아남았던 광주, 전남의 2대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에는 고경명의 친필로 쓰인 마상 격문과 목관 493점이 보존되어 있으며, 또 고경명 문적은 명문 2점, 입안문 1점, 교지 4점, 유묵 2점으로 되어 있는데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21호 지정되었다.

포충사는 특이하게 구 사당과 신 사당으로 나뉘어 있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문화재 유적 정화사업을 하였는데, 이때 구사당을 보수하면서 부속건물이 철거되고 신 사당과 정기관 외삼문, 내삼문이 지어졌다. 새로운 건물들이 세워지고 서원을 대폭 확장했지만 이처럼 문화재 원형을 훼손한 사례가 또 어디 있을까 의문이 든다. 서원에 반드시 있어야 할 건물은 사당과 강당, 재사, 전사청, 장서각, 고직사 등이 있다. 그런데 유적 정화사업을 하면서 사당과 동, 서재만 남기고 나머지 부속건물을 철거해버린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새로운 사당과 유물관을 세우면서 지붕만 제외하고 몸체의 구성 부분을 온통 콘크리트로 세워 놓았다. 이 같은 모습은 마치 양복을 입고 갓을 쓴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닐 것이다. 많은 예산을 들여 문화재를 관리하고 수리하는 이유는 원형의 모습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구 사당 앞에는 좌, 우로 집채 만한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다. 새로운 사당을 세우면서 이것을 모방하여 내삼문 앞에 같은 나무를 심어 놓았다. 배롱나무는 중국 남부지방이 원산지이며, 건조하고 자갈이 섞인 모래땅에서 잘 자란다. 백일홍 또는 목백일홍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서원이나 사찰, 묘지 주변에 많이 식재되어 있다. 새잎이 돋아날 때 붉은색이 도는 색감과 가을철에 주홍색으로 붉게 물드는 단풍이 매우 아름답다. 잔가지가 단정하고 정돈된 형태로 자라며, 우산과 같이 넓은 수관을 이룬다. 껍질이 잘 벗겨지며, 박피된 자리에는 흰빛, 붉은빛을 띠는 독특한 무늬가 발달해서 아름답다. 배롱나무 잎은 타닌이라는 성분이 있어 갈색을 내는 천연염료로도 사용된다. 꽃이 귀한 여름철에 가장자리에 독특하게 주름이 진 아름다운 꽃이 피기 시작해서 가을까지 계속해서 달려 있으므로 조경 소재로서 대단히 훌륭한 나무이다. 많은 사람들이 양반 나무라 부르는 이유는 단정한 몸가짐 그리고 내면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신 사당앞의 배롱나무

내가 어릴 적에 배롱나무는 간지럼 나무였다. 작은 몸집의 나무는 손으로 살짝 긁기만 해도 온몸을 흔들며 간지럼을 탔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며 생존 경쟁이 치열한 현실에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까 생각한다. 또한 추위를 얼마나 타는지 꽃피는 봄날에 다른 나무들은 새잎을 내어 한창 자라는데, 말라죽은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늦게 양 볼을 붉게 물들이며 새잎을 낸다. 모래가 섞인 마른자리를 좋아하며,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기 때문에 강한 바람에 취약한 특성이 있다.

올여름에도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더 무더웠던 것 같다연일 폭염특보가 발효되고, 숨이 막힐 정도로 찌는 날씨가 계속되었다. 더위를 피해 그늘에 쉬고 있던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배롱나무였는데, 그 이유는 삼복더위 속에서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나무에 비해 연약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었기에, 더욱 그 놀라운 반전이 충격적이었다. “지금 힘들지! 걱정 마 풍성한 추수를 하게 될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붉은 꽃을 가을까지 오래 피어 열흘 붉은 꽃이 없다 는 속담을 무색하게 만드는 강인함이 가슴으로 다가왔다.

임금을 지키자는 깃발 아래 북상하던 고경명의 7.000명의 연합 의병은 금산에 있는 왜적이 호남을 침범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금산을 공격하기로 한다. 충청 의병장 조헌에게 연락해 금산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 합류해 전투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금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의 수는 15,000명에 달하고, 그들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전투 경험이 많고 칼싸움에 능숙할 뿐 아니라 신무기인 조총을 가지고 있는 정규군이었다. 첫 전투가 끝나고 곽영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철수를 주장하였으나 사당의 주인은 “나는 여기서 죽겠소” 라며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하였다.

전라도는 군량미를 얻을 수 있는 곡창지대이자 조선 전반과 연결되는 보급로이기 때문에 만약 호남이 왜적의 손에 들어갔다면, 전쟁의 패배는 필연적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한다는 마음이 있을 지라도 승산이 하나도 없고 죽음이 명백한 싸움을 앞에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뒷걸음질하게 된다. 사당의 주인은 이 엄청난 폭염 속에서 나라를 위한 붉은 꽃을 피웠다. 포위망이 좁혀져 모두가 순절한 처절한 싸움이었다. 이러한 호남 연합 의병의 희생은 전라도를 장악하려는 왜군의 진격을 멈추게 함으로써 조선의 패배로 기우는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역사의 평가를 받았다.

포충사는 폭염 속에서 붉은 꽃을 피운 배롱나무처럼, 나라가 위태로울 때 죽음으로 전쟁의 판도를 바꾼 호남 연합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이곳이 지금 서원의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어 방치되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하기에 신 사당의 기능을 폐지하고 처음 지어진 사당을 중심으로 문화재 유적 정화사업을 다시 하여야 한다. 철거되었던 충효당, 청사 영당, 전사청, 고직사 등 부속건물을 복원하여 서원의 본모습으로 되돌려야 한다. 사당 앞에 심어진 배롱나무는 그 주인을 닮았다. 주인은 칼이 아닌 붓을 평생 사용한 문인이었고, 의병들은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농사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더 많은 희생을 막았다.

이곳이 사적지까지 지정되어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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