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산사 전경

“경연에서 아뢰기를 10년을 못가 토붕(土崩)의 화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미리 십만의 군사를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배치하여... 위급할 때 방비를 삼으소서. 이처럼 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변이 날 경우 백성을 몰아 전투하게 됨을 면치 못해 결국 대사가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율곡의 십만 양병설은 경연에 참석한 대부분의 신하들이 지나친 염려라고 하였고, 당시 동인의 영수였던 유성룡이 ‘아무 일도 없는 데도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곧 화근을 기르는 것입니다’ 라며 반대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9년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조선천지는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통곡소리가 진동하는 아비규환의 장소가 되었다. 여기서 토붕(土崩)의 화란 사기 진시황 기론에 나오는 말로써 “토붕와해”의 일반적인 표현인데, 이 뜻은 흙이 무너져 떨어지고 기와가 흩어져 떠나듯이 사물의 근본이 무너져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의 비유이다.

학산사는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 삽봉 김세근을 모시는 사우이다. 그는 26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종부 시주부 벼슬을 지내면서 이율곡과 같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양병론을 주장하였다. 용납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1587년 지금의 광산구 세하동 세동마을로 이사를 왔다. 뜻있는 젊은 장정을 모아 마을 뒤 백마산 수련 골에서 병법을 가르쳐 무술을 연마하던 중 왜란이 나자, 나이 42세 때 담양 추성관에서 의병 모집에 나아가 혈서까지 쓰고 며칠 후 몸에 신열이 생겨 집으로 와 치료 중, 그 해 6월 12일 호서 의병장 조헌의 격문을 받고 의병 300명을 이끌고 전주에 이르러 그곳에 흩어져 있는 관군 200여 명까지 규합 영동 부근의 적을 크게 무찌르고 제봉 고경명의 의병과 합세하여 금산전투에서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후에 공적을 인정받아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추증하고 선무 원종훈에 올랐다. 1592년 장군이 순절하자 고장 유림들이 사우를 건립해 ‘창열단’이라 하였고, 1958년 학산사를 건립 해 배향하고 있다.

양과동정의 하마석

학산사 입구에는 가로 20cm 세로 30cm 규격으로 아주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하마석’이라고 써있는 비석인데 하마비를 잘못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하마석(下馬石)은 우리말로 노둣돌이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디딤돌로 이용된다. 보통 직육면체에 가까운 커다란 돌을 솟을대문 옆에 놓아두는 경우와 돌계단처럼 잘 다듬어 기단 앞에 놓아두는 두 가지가 있다. 한신대학교 김준혁 교수의 글에 의하면 이 하마석에는 개혁 군주였던 정조의 위민정신이 담겨 있다. 조선의 모든 노비를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정조 임금은 군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찾아갔던 연무대에 오를 때 병사들의 등을 밟고 말에서 내리지 않고 하마석을 만들어 이를 밟고 내렸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의 양반 관료 및 돈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말을 타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을 타고 내릴 때 하인의 등을 밟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한다. 하마비는 궁궐, 향교, 사당 등의 입구에 세워, 신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존경의 표시로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라는 표석이다. 한문으로 대소 인원 개 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대개는 하마비(下馬碑)라고 쓰인 비석이 많다.

서원은 뛰어난 유학자를 제향 하고, 인재 양성과 강학 기능을 갖춘 것이라면, 사우(祠宇)는 그 지역 출신이거나 관련 인물 혹은 귀양 왔던 명신이나 충의지사나, 그 지역에 공이 있거나 절개, 효행 등으로 지역 주민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제향하는 기능을 했다. 사우가 서원으로 바뀌는 경우도 많았으며, 강당도 없이 사실상 사우만을 지어 놓고 서원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서원이 사우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창열단’으로 출발한 학산사는 지금까지 사우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학산사의 하마비, 하마석이라 잘못 표기되어 있다

서창 향토문화 체험관이 있는 광산구 세하동 세동마을은, 조선 중기에 형성된 곳으로 김세근 장군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는데, 그 주변에는 그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왜란 4년 전부터 의병을 키우기 위해 그 장소를 물색하던 중 세동마을 뒷산이 눈에 띄었고, 산의 형세가 새끼를 거느린 백마의 형상과 같다 하여 백마산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연병장을 만들어 장정들을 훈련시켰다. 장정들이 수련하는 장소다 하여 수련 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절골 마을에서 수련 골을 지나 세동으로 넘어오는 길을 수련 재라 하였다. 장군이 기거했다는 백마산 상봉의 바위굴을 장수 굴이라 불렸다. 이곳은 300여 명의 의병들이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여 땀방울을 흘렸던 곳이다.

1차 금산성 전투에 대해 조원래 순천대 명예 교수는,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군의 주 진지(陣地)를 조선 측에서 선제공격하고, 의병 정신을 가장 충격적으로 떨친 최초의 사례이며, 의병의 주역들이 모두 순절한 초유의 사건이라 하였다. 거기에다 의병장의 절의가 무엇인가를 의병 지도층이 집단적으로 보여준 초유의 혈전(血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러한 호남 연합 의병의 희생 안에는, 전쟁을 미리 예견하여 잘 나가던 벼슬을 그만두고 가진 재력(財力)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젊은 장정들을 훈련시켜 전쟁에 대비한 삽봉 장군과 300여 백마산 용사들이 있었다. 전투 경험이 없는 농사짓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의병들 가운데 삽봉의 부대는 정예 병력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울 때 사기충천했을 호남 의병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오늘날 삽봉 김세근 무덤은 비어 있는데, 처절했던 싸움이 끝나고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삽봉과 300 용사는 준비된 병사답게 최선을 다해 싸우다 모두 함께 같은 날 죽음을 맞았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한적한 곳에, 찾는 발걸음조차 드문 학산사 사우 앞에 하마비가 작고 낮은 모습으로 서 있다. 그러나 벼슬의 높고 낮음을 떠나 말에 내려 존중 받을 만한 삶의 궤적이 그 안에 숨 쉬고 있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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