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고정수 전경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인물에 대해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를 불천위(不遷位)라고 한다. 불천위가 결정되면 임금이 직접 제관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하거나 예조에서 제관을 보내 제사를 지낼 전답과 제구 및 재물, 혹은 영정을 교지로 하사하였다. 그의 선조와 후손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는 등 가문에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므로 시제 사보다 훨씬 많은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 신주는 처음에 묘역 밑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종가(宗家) 근처에 사당을 지을 수 있게 되면서 부조묘(不祧廟)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에는 시 민속문화재 제7호인 필문 이선제 부조묘와 기념물 제24호인 괘고정수가 있다. 필문 이선제는 조선 세종임금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세자빈객, 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정인지 등과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에 돌아와서는 후진 양성은 물론 이 고장에 향약을 베풀어 미풍양속을 이루는데 모범이 되었다. 광산 이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필문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가문의 위세와 우월감을 나타내는 증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랑거리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필문 이선제가 심었다는 600년 가까이 나이 먹은 왕버들이 그 주인공이다. 마을 앞에 심어진 이 나무는 후에 필문의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급제자의 이름과 북을 걸어 놓고 축하연을 열었기 때문에 괘고정수(掛鼓亭樹)라는 이름이 생겼다. 특이한 점은 필문이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도 쇠락할 것이니 각별히 관리하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부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가문이 번창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상 물이 흐르는 샘

왕버들이 심어진 마을 입구에는 일 년 내내 샘물이 솟구치는 조그만 웅덩이가 있는데, 그곳은 항상 물이 흐르기 때문에 그 주변은 습기로 가득하다. 그리하여 보통의 나무가 자라기 어렵기 때문에,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높아서 물속에서 자라기도 하며 오염된 물이 고여 있는 곳에서도 잘 자라는 왕버들을 심은 것 같다.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크는 왕버들은 잎과 가지가 치밀해서 녹음 효과가 크며, 해를 거듭할수록 줄기가 독특한 모양으로 비대하게 되고, 마치 우산처럼 둥글게 만들어지는 수관이 대단히 보기 좋다. 생장 속도가 매우 빠르고 내공해성이고 맹아력도 우수하다. 양분이 축척되어 있는 습지에 뿌리를 내리고, 가뭄도 타지 않으며, 햇볕을 잘 받는 수관을 가지고 있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필문이 심은 나무가 거침없이 쑥쑥 자라 가는 동안 이선제를 시작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5대손인 이발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특히 이발은 동생 이길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는 등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이며, 누구를 섬긴 들 임금이 아니랴(何事非君)”라는 혁명적 사상을 가진 정여립이 모반을 계획하다 사전에 발각되자 진안 죽도로 도망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선조 임금은 서인이었던 정철을 위관으로 삼아 옥사를 다스리게 했는데, 서인 세력은 동인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 모반 사건을 확대하였고 그리하여 기축옥사의 피바람이 불었다.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여립과 단지 시국을 논했거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붙잡혀 와 참혹한 고문 끝에 희생되었다. 가장 처절했던 죽음으로는 멸문 일보 직전까지 간 이발의 가족이었다. 일가가 모조리 붙잡혀 임금 앞에서 국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임금은 이발의 어린 아들에게 ‘너는 아비에게 무엇을 배웠느냐’라고 묻자 아들은 ‘저는 제 아비에게서 충, 효 외에는 배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에 임금은 길길이 날뛰며 ‘역적의 자식 놈이 저런 참람한 말을 하다니’ 라며 어린 아들을 고문했다. 이발의 아들은 날카로운 조각들을 땅에 펼친 다음 위에서 내리누르는 압슬형을 받아 죽었으며, 80세가 넘는 노모는 장형으로 사망했다. 그 와중에 이발의 조카와 이길의 아들 두 명만이 남쪽 끝인 진도까지 피신해 간신히 대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이발과 그의 일족이 죽음을 당하면서 가문의 상징이었던 나무도 말라죽었다. 그리고 그 후 100년이 지나 억울함이 밝혀지자 다시 새잎이 돋아 가문의 중흥을 예고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미 5대에 걸쳐 주위 환경에 적응하여 잘 자라던 나무가 갑자기 말라죽었다는 이야기보다, 정적들에 의해 밑동까지 베어져 버렸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역적의 자손이라는 누명을 쓴 채 견뎌야 했던 그 긴 세월 동안 필문이 심은 그 나무도 같이 아파하며 다시 새로운 가지를 만들어 자라 갔을 것이다. 기축옥사 이후 광산 이씨들은 정철의 연일 정씨와 혼인을 하지 않는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낼 고기를 칼로 다질 때 정철 정철 정철 하며 다졌다는 가슴 아픈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괘고정수 가는 길

광주광역시 남구청은 조선시대 과거 급제 행렬과 연회를 재현하는 괘고정수 축제를 연다. 필문 선생을 모신 부조묘에서 제사를 시작으로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과거 급제 행렬을 재현하는 무대가 펼쳐지고, 이어서 민요와 사물놀이, 한시 구음 등이 어우러진 연회 행사가 진행된다. 후손 중에서 과거 급제자가 나올 때마다 왜 급제자의 이름과 북을 나무에 걸어 놓고 잔치를 벌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마을 앞 나무는 후손들에게 필문의 분신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필문 할아버지와 함께 하는 잔치가 된 것이다. 과거 급제자를 비롯한 일가친척이 모두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흥에 겨워 나무 주위를 돌거나 춤을 출 때, 누구나 한 번씩은 북을 두드리며 기뻐하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이러한 성대한 축제는 가문의 단결과 정체성을 강화시켜줄 뿐 아니라 후손들이 ‘나도 할 수 있다’는 꿈을 꾸는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을 것이다. 괘고정수는 광산이씨 문중의 자랑이자 우리 모두의 나무가 되었다.

필문이 심은 나무는 어느덧 600여 년의 나이를 먹었다. 나이에 비해 다소 왜소한 몸집은 멸문의 지경까지 몰아간 엄청난 시련을 견디어 낸 산물이다. 후손들은 마을 앞에 정자를 세우지 않고, 이 나무를 항상 마을의 정자(亭子)처럼 가까이하며 관리하고 보호하여 왔다. 거목으로 성장하는 것은 그만큼의 성장요인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필문이 나무를 심으며 꿈꾸던 미래는 이제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의 꿈이기도 하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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