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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정 "얼쑤 좋다"공연 전용 정자를 짓다
김귀백 기자 | 승인 2022.01.17 11:01
양파정 전경

일제 강점기 시절 광주의 최고 부자는 흥학관을 세운 최명구이며, 그다음은 호남은행을 세운 현준호, 그리고 양파정을 세운 정낙교였다고 구전으로 전해온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들의 유산 가운데 지금까지 전해오는 것은 양파정이다. 정낙교는 본래 송정리에서 살았는데 1908년 양림동 127번지로 이사 왔다. 양파정은 1914년 광주의 갑부 양파(楊波) 정낙교가 자신의 호를 따서 건축한 누정이다. 정자가 들어선 언덕 일대는 원래 ‘꽃바심’이라고 불렀던 곳으로 광주천 쪽으로 돌출된 언덕에 꼬챙이처럼 생겨 주변 경치를 내려다보기에 좋은 위치였다. 정낙교는 풍류를 좋아하여 매년 이곳에서 전국 한시 백일장을 개최했고 기생 조합의 소리꾼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열었다. 지금도 정자에는 운람 정봉현 등 당시의 명사들의 시문이 새겨진 30여 개의 현판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정낙교의 외손자인 정추와 정준재는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았던 정율성과 양파정에 자주 놀러 와 소리꾼들의 창을 감상하곤 했다

16세기 당쟁과 사화가 극심하던 때 현실 정치에서 소외된 선비들이 낙향 해 많이 지어졌던 정자는 살던 집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명승지나 전원,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조성하여 은일, 은둔하면서 학문을 가르치거나 책을 읽고, 또는 휴양할 목적으로 사용하였다. 보통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정자 중앙에 온돌방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정자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양파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데 온돌방과 충량이 생략되어 있다. 팔작지붕은 측면 서까래를 받기 위해 종보 밖으로 중도리를 내어 구성하는 외기 도리가 필수적으로 들어가는데, 그 외기에 내림마루가 형성되고 이어 추녀마루가 만들어진다. 외기의 끝부분에는 하중을 많이 받기 때문에 기둥을 받쳐 주어야 하지만, 정자는 감주를 하기 때문에 외기를 지지하기 위해 측면 기둥머리와 내부 대들보 사이에 충량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양파정은 팔작지붕이면서 맞배지붕의 가구구조를 혼합한 독특한 구조를 사용하였다. 더군다나 보통의 정자는 일정한 높이의 기단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판재로 마루를 놓는 것이 일반적인데, 시멘트로 포장한 마루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독특한 구조는 처음부터 공연하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양파정 내부 가구구조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공원에는 정낙교 시혜비가 있는데 1937년 광산군 극락, 서창, 송정, 동곡, 하남, 비아면 등 6개면의 소작인 일동이 세운 것이다. 비문에는 “배를 두드리며 격앙가를 부르는 그 풍족한 재벌 마음에 들었네. 빈민 구호의 방법을 찾아 공정한 처리로 가감하였네. 원근에 은혜를 베풀어 칭송이 서로 다름이 없었다. 한 조각 좋은 빗돌을 세우니 우리나라에 길이 빛나리”라고 적혀 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소작쟁의는 1919년에 처음으로 발생한 이래 매년 늘어나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절정을 맞이 한다. 소유의 땅은 없었지만 안정적으로 농사 지을 수 있는 경작권을 가지고 있던 농민들은 나라를 빼앗긴 뒤 경작권마저 박탈당하고 계약에 의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만다. 급기야 소작료가 70~80%까지 도달하게 되어 농사를 지을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소작쟁의가 극심하던 시기에 세워진 비석 안에는 공정한 처리로 소작인들의 마음을 얻은 주인의 빛나는 인품이 숨 쉬고 있다.

2019년 8월 광주광역시는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단죄문을 설치하였다. 일제 잔재물마다 단죄문을 세워 친일인사의 행적을 낱낱이 적시하고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여 시민과 후대에 널리 알려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서인데, 양파정에도 설치되었다. 정자 안에 걸린 당시의 명사들의 시문이 새겨진 30여 개의 현판 가운데, 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 등 일제 식민 통치 협력자이자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4명의 현판이 걸려 있다. 그 가운데 정봉현은 당시에 상당히 알려진 한학자였고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투신자살을 한 극작가 김우진의 장인으로 유명한데, 그의 뛰어난 글 솜씨를 일본 천황과 황태자의 즉위를 축하하는 글을 바치는 데 사용하였다. 그들은 빼앗긴 나라의 백성으로 짧은 영화를 누렸지만 이제 자자손손 죄를 묻는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단죄문

양파정을 지은 후 그가 사망하는 1938년까지 매년 전국 한시 백일장이 그곳에서 열렸고, 1917년에는 광주 기생 조합 결성식이 있었으며, 그 후 양파정에서 광주 권번의 소리꾼들을 초청하여 국악공연을 개최하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었던 판소리 공연을 일반 서민들도 자유롭게 접하게 되는 판을 제공하였다. 정낙교의 외손자이자 차이코프스키의 4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정추에 의하면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았던 정율성과 함께 양파정에 자주 놀러 가 심청가 등 광주 권번의 판소리를 감상했다고 증언했다. 특히 정율성은 ‘연안송’ ‘중국 인민해방군 군가’를 작곡하는 등 중국의 3대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작곡가였다. 억압과 착취가 난무하던 일제 치하의 얼어붙은 땅 위에, 양파정에서 울려 퍼진 우리의 노래와 시는, 이처럼 탁월한 음악가를 배출하는 토양이 되었다. 오늘날 광주가 지닌 높은 문화의 힘은, 가장 엄혹한 시기에도 노래와 시를 멈추지 않은데 있다.

중국의 송나라의 문화는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 문화와 비교될 정도로 발달하였다. 송나라의 문화의 특색은 서민 문화의 발달이다. 전당포, 주점, 잡화상 등으로 구성된 시를 쓰는 모임이 있을 정도였다. 송대의 문화가 서민계층까지 파급되고 시작(詩作)의 저변이 확대되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렇듯 높은 문화의 힘을 축척하였던 송나라는 역사상 가장 강한 군대였던 몽고 기병을 맞아 1279년 애산의 전투에서 패하여 송 황실이 멸망할 때까지 50년 가까이 계속된 전쟁을 통해 그 힘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몽고 기병이 궐기한 이래 몽고군이 맞은, 가장 시간이 길게 걸리고 가장 힘을 많이 쏟고 가장 고달팠던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양파정에 오르면 언제나 심신에 위안을 얻었다. 집안에만 있어 우울할 때는 문득 지팡이를 짚고 정자에 올라 스스로의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양파는 이 정자를 통하여 즐거움과 위안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노래와 시가 울려 퍼지고 구경 온 많은 사람들이 ‘얼쑤 좋다’ 연발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그를 즐겁게 하고, 조선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억압하에 그나마 조선의, 자존심의 작은 씨앗을 심는 것에 위안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다 죽기를 원한 백범 김구의 소원을 상기해 본다.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일제 35년은 한국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의 단절의 시기였다는 점에서 치욕적인 기간이었다. 민족을 분열시키고 조선 땅을 병참 기지화하며, 인적, 물적 자원을 약탈하고 민족 문화의 말살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꽁꽁 얼어붙은 땅 위에, 좀처럼 보기 힘든 공연 전용 정자를 짓고, 그의 생애를 다하는 날까지 공연을 멈추지 않았던 양파 정낙교와 양파정은 우리가 보존하고 가꾸어가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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