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창(國唱) 임방울 선생 노래비

“쑥대머리 귀신 형용 적막 옥방의 찬 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보고 지고 보고 지고 한양 낭군 보고 지고.. 손가락을 피내어 사정으로 편지할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임의 화상을 그려 볼까.. 내가 만일에 임을 못 보고 옥중 고혼이 돼 거들면 무덤 앞의 있는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요.. 이를 장차 어쩔거나 아무도 모르게 울음을 운다” 춘향가 중 쑥대머리 대목은 광주가 낳은 최고의 명창(名唱)인 임방울이 일제 강점기 시절에 아주 잘 불러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본명은 임 승근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도산동에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 임 경학과 어머니 김 나주 사이에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는데, 방울이라는 예명에서도 알 수 있듯 천성적으로 고음과 저음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아름다운 목을 타고났다. 그가 부른 ‘쑥대머리’와 ‘호남가’ 그리고 단가 ‘추억’은 음반으로 만들어져 일제 치하의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만주와 일본에서도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슬프고 애절하며, 한이 서린 그의 소리는 온갖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수많은 식민지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송정공원 안에 국창 임방울 노래비가 세워져 있어 그의 예술혼을 기리고, 국악 명인과 신인을 발굴하기 위해 열리는 임방울 국악제는 올해로 30회를 맞고 있다.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 혼(魂)은 어디로 행하신가.. 황천이 어디라고 그리 쉽게 가럇든가.. 평생을 통곡 헌들 보러 올 줄을 어느 뉘가 알며 천하를 죄다 외고 다닌 들 어느 곳에서 만나 보리오.. 이십삼 세에 황천객이 되었는가 무정허고 야속헌 사람아.. 보고 지고 보고 지고 임의 얼굴 보고 지고” 임방울이 어려서 어느 부잣집의 머슴살이를 할 때에 주인집 동갑내기 딸이었던 김 산호주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머슴과 주인집 딸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산호주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고, 그들은 가슴 아픈 이별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운명은 이들을 다시 만나게 하였다. 임방울이 판소리를 배우는 과정 중에 결혼생활을 접고 광주로 내려와 ‘송도원’이라는 요릿집을 하던 산호주와 다시 만나게 된다. 임방울은 전속계약을 했던 레코드사에 알리지 않고 그녀의 요릿집 내실로 잠적을 하여 꿈같은 2년여의 밀월을 보냈다. 그러는 동안 소리를 접었기 때문에 소리꾼의 생명인 목이 상하고 만다. 그러자 그는 산호주에게 떠난 다는 말 한마디 없이 홀연히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가 소리를 되찾기 위해 토굴 속에서 처절한 독공을 한다. 소식을 듣고 지리산 토굴까지 찾아간 산호주를 치열한 독공 중이었던 그는 산호주를 만나 주지 않았다. 이후 독공을 마친 임방울이 토굴에서 나왔으나 이미 산호주는 건강을 잃어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가 사랑하던 산호주의 시신을 껴안고 즉흥적으로 불렀던 것이 단가 ‘추억’이다.

춘향가는 남원 퇴기 월매의 딸 성춘향과 남원부사의 아들 이몽룡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그린 판소리이다. 단옷날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춘향과 이도령이 백년가약을 맺었다가 이몽룡 부친의 근무지 이동으로 이별을 하게 되고, 고을에 새로 부임한 신임 사또가 춘향에게 수청들 것을 요구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옥고를 치른다. 옥중가 중 한 대목인 쑥대머리는 춘향이 정절을 지키다가 매를 맞고 옥중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부르는 슬픈 대목이다. 쑥대머리는 옥중 춘향이 이도령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여실하게 그리고 있는데 중모리 장단에 계면조로 부른다. 이익은 ‘성호사설’ 속악조에서 “계면이라는 것은 듣든 자가 눈물을 흘려 그 눈물이 얼굴에 금을 긋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했다. 판소리는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뉜다. 동편제는 우조(씩씩한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감정을 가능한 절제 하며, 장단은 ‘대마치 대장단’을 사용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서편제는 계면조(슬픈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며, 발성의 기교를 중시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 소리가 늘어지는 특징을 지니며, 발림(육체적 표현, 동작)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흔히 임방울을 서편제의 제왕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당대의 많은 소리꾼들의 소리 가운데 임방울이 부른 쑥대머리가 유독 심금을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 집안이 가난하여 어릴 적부터 머슴을 살아야 했던 임방울은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이들이 배부분 갖는 힘들고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인집 동갑내기 딸을 사랑하였지만, 그녀가 시집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픔을 겪었고, 어렵게 다시 만나 사랑하였지만 너무나도 일찍 죽음을 맞이한 사랑하는 사람을 눈물로 보내야 했다. 임방울은 옥중 춘향이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쓰라린 과정을 거친 것이다.

사진 제공 : 임방울 문화재단

 영화 서편제는 천만 관객이 봤던 공전의 히트작이었다. 영화 속 아버지였던 유봉은 딸이 제법 소리를 잘하여 기대가 컸지만 아쉬움이 있었다. “네 소리는 예쁘기만 했지 한(恨)이 없어” 유봉은 딸을 소리꾼으로 만들기 위해 눈을 멀게 하는 극약처방을 한다. 장님이 돼버린 딸 송화는 온갖 분노와 좌절, 그리고 절망과 싸우면서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첩첩 히 쌓게 된다. 소리를 끊고 지내던 송화는 어느 날 “아버지 저 소리 하고 싶어요. 심청가 배우고 싶어요”라고 한다. 그녀는 이제 눈먼 아버지 심학규와 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아 죽으러 가는 심청이의 한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恨)은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을 말한다. 임방울의 한은 옥중 춘향이의 한을 만나 꽃을 피우게 된다. 나는 그가 쑥대머리와 추억을 부를 때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쑥대머리는 일제 강점기에 유성기 음반이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가 신화를 창조한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와 일본까지 잘 팔렸다는 것은 의미가 자못 깊다. 가혹한 억압과 수탈에 신음하는 나라 안의 백성들과, 경작권마저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은 80%에 이르는 소작료에 견디지 못해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일본에는 1923년 진도 7.9급의 초강력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여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14만 명, 이재민이 34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사회가 불안한 속에서 조선인이 방화하고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조선 사람 수 천 명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다.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임방울의 쑥대머리와 추억은 그들의 아픔과 한을 같이 했던 것이다. 나는 총과 칼로 싸우는 것보다 더 강한 독립운동을 소리를 통하여 펼쳤다고 본다. 그가 명창(名唱)을 넘어 국창(國唱)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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