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정 전경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에는 ‘부용정’이라는 아주 오래된 정자가 있다. 문화재 자료 제13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 초기 1400년경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광주 지역에 향약이 처음으로 시행된 유서 깊은 곳에 세워졌다. 이 정자는 조선 태종 때 전라도 수군절제사를 지낸 김문발이 지은 것이다. 향약은 중국 북송 때 향촌을 교화 선도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자치 규약인데, 산시 성 남전현 여씨(呂氏) 문중에서 만들었으며, 뒤에 주자(朱子)에 의해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여씨향약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는 조선 중종대에 정계에 진출한 조광조 등의 사림파는 훈구파의 지방 통제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 유향소등의 철폐를 주장하고 그 대안으로써 향약의 보급을 제안하였다. 기묘사화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 때 서원이 중심이 되어 자연촌 즉 이(里) 단위로 시행되었다. 부용정을 중심으로 한 칠석동 향약은 무려 100년 앞서 관이 아닌 민간 주도로 시행되었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

부용정은 우물마루를 깐 맞배지붕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민도리집으로 지어졌다. 벽이 없이 개방되어 있고, 기단은 바른 층 막돌 쌓기로 쌓았으며, 자연석 덤벙 주춧돌을 놓은 다음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내가 부용정을 예사롭지 않게 본 것은 바로 지붕 모양이었다. 조선시대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마루에는 온돌방을 놓았다. 사는 곳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명승지나 전원,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조성하여 학문을 가르치거나 글을 읽고 휴양할 목적으로 지어진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다. 부용정은 그 시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맞배지붕의 정자로 지어졌는데,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회의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최대한 마루를 넓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칸을 늘리고 온돌방을 놓지 않았다. 권위를 과감히 내려놓고 실용적으로 지어진 정자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곳에 일반 백성들이 다 함께 모여 회의도 하고 정보를 교환하며 굳건한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두레, 계 등의 공동체 조직이 있었다. 특히 두레는 농촌사회의 상호협력, 감찰을 목적으로 조직된 촌락 단위의 공동 노동체 조직이었다. 두레가 이행하는 공동노동의 형태는 모내기, 물 대기, 김매기, 벼 베기, 타작 등 논농사 경작 전 과정에 적용되었으며, 우두머리를 좌상이라 하고 두레를 표시하는 기(旗)가 있었다. 공동작업이 끝나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여 음식과 술을 먹고 농악에 맞추어 여러 가지 연회를 곁들여 뛰고 놀면서 농사로 인한 노고를 잊고 결속을 재확인하는 매우 필요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향약은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 삼강오륜의 도덕규범을 따르지 않는 자를 재판해 벌을 주거나 마을에서 쫓아내기도 하는 통제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부자가 아닌 일반 소농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 지주층의 향촌 지배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 었지만 향촌 자치의 성격을 띠어, 강압적 통제가 아닌 자율적인 질서가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부용정 내부 현판과 넓은 마루

부용정 안에는 현판과 양응정, 고경명, 이안눌의 시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다. 특히 고경명은 이웃 마을인 압촌동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금산 전투에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 순절한 호남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나는 향약을 통해 강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칠석동의 백성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는 깃발 아래 의병에 참여하였고, 그들 역시 금산 전투에서 함께 싸웠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경명을 비롯한 호남 의병과 함께 최후까지 싸웠으나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그 후 석 달 만에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를 중심으로 금산 전투의 원수를 갚자는 깃발 아래 400여 명의 복수 의병이 일어났다. 나는 이 ‘복수 의병’을 아주 높고 귀하게 생각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광주에서 가장 강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곳은 김문발의 칠석동과 필문 이선제의 압촌동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향약이 다른 곳보다 일찍 뿌리를 내리고 발전해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부모 형제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복수 의병에 참가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고종후를 따라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승산이 전혀 없던 싸움터에 달려가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진주성에서 복수 혈전을 벌인 것이다. 마을의 주축들이 전사한 가운데 다시 복수전을 벌인다는 것은 강하고 끈끈한 유대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로 뭉쳐 있지 않으면 좀처럼 시도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부용정과 가까운 곳에 수령 800년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있다. 정자를 세운 거의 같은 시기에 김문발이 심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높이 26m, 가슴 높이의 둘레가 6.47m이며 수관의 너비는 30m에 달하는 거목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 밤에 지역 주민들이 당산제를 이곳에서 지낸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칠석동 옻돌 마을은 죽령산 아래 평야를 향해 터를 잡고 있으며, 풍수지리 상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이라 하는데, 이 소가 매우 사나워 고삐를 매어 두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다. 은행나무는 특이하게 가지를 많이 만들지 않는 습성이 있다. 최소한의 가지를 만든 다음 수관 부위에 은행 잎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 낸다, 가지를 만들어 내는 힘을 아껴 은행 잎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한 것이다. 잎을 자세히 보면 차별이 없이 크기가 일정하고 윤기가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잎은 가을에 엄청나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을 보게 된다. 정자의 주인은 은행나무를 심으며, 자신의 고향 사람들이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꿈꾸지 않았을까?

고향에 정자를 세우고 향약을 보급한 김문발은 문관이 아닌 싸움터를 누비던 무인 출신이었다. 그가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하여 평소 꿈꾸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작은 씨앗을 심었고 물을 주었다. 그 나무가 자라서 거목이 되어 해마다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향약의 4대 덕목은 “좋은 일은 서로 권하며, 잘못은 서로 꾸짖고,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교제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다”이다. 환난상휼 즉,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서로 돕는 문화가 오랜 세월 정착하여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는 가를 알려면 부용정을 찾아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전통 문화가 점차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는 시대에, 지금도 칠석동에서는 정월 대보름 무렵 우리 민족의 전통 놀이인 고싸움놀이가 행해지고 있다. 칠석 마을의 터와 기운을 다지고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전통이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알려진 이야기보다 더 많은, 서로 돕고 같이 울고 웃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부용정을 중심으로 한 이곳에 보석처럼 곳곳에 숨 쉬고 있음을 확신한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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