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봉서원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452 에는 1578년(선조 11년)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월봉서원이 있다. 원래 광산군 비아면 산월리에 망천사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가 1646년(인조 24년)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고 1654년(효종 5년)에 월봉이라고 사액되었다. 서원 내 강당인 빙월당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판각에는 고봉집과 논사록 등 목판 474판이 보관되어 있다. 기대승은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존재. 시호는 문헌이며, 전남 나주 출생으로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1549년(명종 4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번 과거에 많은 인재를 얻었는데 그 가운데 기대승이란 사람이 있으니 그 학문과 인물이 전에 소문으로 들은 것보다 더 훌륭하다. 우리 조정에서 이 선비를 얻어 쓰게 되었으니 실로 이는 학문을 위하여 큰 경사이다” 조선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퇴계 이황이 고봉을 두고 한 말이다. 고봉의 나이 32세 때 스스로 퇴계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는데, 이제 막 과거에 급제한 사람과 학문적 원숙기에 들어선 노(老) 대가와의 만남이었다. 그 후 스승인 퇴계와 12년 동안 서한을 주고받으면서 8년 동안 사단칠정을 주제로 논란을 편 편지는 유명한데, 이것은 유학 사상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성리학에서 사단칠정 논변을 통하여 논쟁적 탐구 방법의 서막을 함께 열었다.

퇴계 이황이 서울로 올라와 원암 이교(李喬)로부터 ‘천명도설’을 얻어보고 그 작자를 찾던 중 우연히 그것이 이웃에 사는 추만 정지운에게서 나온 것을 알았다. 퇴계가 추만을 만나 보기를 청하여 드디어 두 사람은 서로 처음으로 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퇴계가 이교로부터 얻어 본 것과 추만이 가져온 것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퇴계가 본 천명 구도에 의하면 분명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氣)에서 발한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추만의 천명 구도는 이와는 달리 ‘사단의 발동은 순수한 이(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아니함이 없고 칠정의 발동은 기질을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라고 하였다. 퇴계는 계축년 10월에 ‘사단은 이(理)의 발동이며 칠정은 기(氣)의 발동이다’라고 정정(訂正)하였다. 이것이 결국 논란의 씨앗이 되었다. 사단의 선과 칠정의 선을 퇴계는 달리 취급하려 했고 고봉은 이것을 하나의 선으로 취급하려고 하였다. 사단과 칠정을 본연지성과 기질 지성으로 나누어 보려는 시도는 많은 무리를 안은 채 퇴계에 의해 주장되었으나 고봉의 끈질긴 합리적 변박에 의해 퇴계는 스스로의 논리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병련:고봉선생의 생애와 학문)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 빙월당

고봉 기대승의 저서로 고봉집, 이기왕복서, 논사록 등이 있다. 그중에 ‘논사록’을 통해서 고봉의 삶과 학문을 이해하고자 한다. 논사록은 고봉이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며 선조의 언명에 따라 고봉의 학덕을 기리는 마음으로 그가 경연에서 하였던 말을 모은 것이다. 조선 시대 경연은 왕이 유교 성현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자리이자 정책세미나의 장(場)이었다. 경연의 전임 관원은 국왕 교육을 전담한 홍문관의 관리들이었는데, 그들은 가장 명예로운 관료들로 선망되었다. 홍문관 대제학을 ‘문형’이라고 하였는데 문화를 좌우하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문형은 왕을 교육했을 뿐 아니라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경연은 학문 탐구와 심성 수양을 훌륭한 정치의 기초로 생각하는 유교 정치 문화의 산물이었고, 왕과 양반 관료들은 국정의 많은 부분을 경연에 할애함으로써 유교적인 이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선 유학사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고봉 기대승은 조광조의 지치주의를 이어받아 그것을 다시 실현시키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자임하여 적극 경세유(經世儒)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드믈다”라고 김충렬 고려대 교수는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조광조는 중종반정 후 조정에 출사 유교적 이상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다양한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의 시대를 앞서간 개혁 정책은 기묘사화로 물거품이 되었으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 사회는 이후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조광조의 지치주의는 정치의 이상을 공자, 맹자가 제시한 왕도정치에 두고 덕치(德治), 예치(禮治)를 통해 그것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는 이러한 덕치(德治)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군주가 현명해야 한다고 믿고 군주의 자질을 함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조광조가 경연에서 중종에게 지성껏 학문을 가르친 것은 바로 중종의 수양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지치주의(至治主義)는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인 서경(書經) 군진(軍陣) 편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하늘을 감화시킬 정도로 지극한 정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정한 의미나 제도를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 이상적 정치 일반을 의미하는데, 군주가 성실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통치에 임할 때 비로소 이상적인 사회로 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고봉이 꿈꾸었던 대동(大同) 사회는 모두가 하나 되는 것으로,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좀 더 풍요롭고 여유 있는 더 높은 삶으로의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임금의 역할이 중요하고, 그리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임금이 신하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특별한 토론 수업인 경연을 중시한 것이다. 온 나라 안의 수많은 백성과 곤충, 초목까지도 임금을 우러러보고 의지하고 있으니, 그 자리가 갖는 무게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조광조가 그러했듯이 고봉 기대승도 홍문관 관리로서 경연에서 왕에게 단순히 자문하여 주는 수준이 아닌 성심성의를 다해 자신이 갈고닦은 학문을 전수하고자 하였다. 그가 경연에서 하였던 말을 모은 ‘논사록’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이다. “훌륭한 그 말씀이여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서너 번이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였네” 조선 후기 개혁 군주였던 정조는 이렇게 탄복했다. 논사록을 거듭 발간하라는 전교를 내리고 밤이 깊숙하는지도 모르고 이 책을 탐독하였고 그처럼 읽는 것이 경연을 열 번 듣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술회하고 있을 정도였다

잘 설명되어 있는 그림 안내판

‘어진 임금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능한 신하를 등용하여 책임을 맡기는 것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루에도 수많은 일이 일어나는 정치는 임금의 독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의정부를 비롯한 육조의 재량권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군주의 책임정치를 고봉은 주장하였다.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임금의 독단적인 결제에 의하여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경우라고 본 것이다. 이는 지치주의의 지평을 한 걸음 넓힌 것이다. 그의 학문적 내공의 깊이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고봉의 삶과 학문은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더 높은 경지의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한 이상 사회는 군주가 성실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힘에 의한 지배가 아닌 덕(德)에 의한 교화를 통해 현실정치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

장유는 고봉이 탁월한 재주를 타고난 데다가 견문이 넓고 학문에 힘써 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고봉은 꿈꾸었던 이상 사회를 이루기 위해 준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벼슬을 위한 공부가 아닌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이로움을 주는 경세 학 적 탐구 였던 것이다. 고봉의 사후(死後) 백 년이 흐른 후 우암 송시열은 “퇴계가 자기의 견해를 많이 굽혀 따르고 밝고 넓은 경지를 홀로 보았다는 것으로 허여 하였으니 창을 잡고 방으로 들어오는 경우(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비유한 말)라고 말할 만하다”라고 평가하였다. 고봉이 남긴 개언로(開言路), 임현능(任賢能), 균세역(均稅役), 부서민(富庶民) 등의 주장과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불꽃처럼 살아간 고봉선생의 삶은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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