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광산구 안청동 736-1 풍천대 전경

“풍천대는 석음 박노술(1851~1917) 선생의 항일 전적을 기념하는 삼층 석대이다. 석음 선생은 이곳 안청동에서 태어나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은 선비로 1895년 을미사변 때 송사 기우만 선생의 의병 활동에 당시에 많은 감동과 호응을 일으켰던 선생의 격서가 존화록(尊華錄) 석음 유고(石陰 遺稿) 등에 전해 온다. 1905년의 강압적인 을사조약에 이어 1910년에는 우리의 주권을 빼앗는 합병조약을 강요하는 등 천인공노할 일제의 침략 만행에 치를 떨었으며, 거듭되는 조국의 비운을 비룡대에 올라 통곡했다. 참을 길 없는 울분과 비통을 스스로 달래며 문인들, 동지들과의 강론을 통하여 항일 구국정신의 선양에 힘을 다했으며, 일제가 보내온 은사 금칙첩(恩賜金勅帖)을 단호하게 물리처 버린 선생의 쾌거는 저들의 악랄하고도 끈질긴 침략의 마수 앞에 차츰 지쳐가는 이 지역 대중들의 항일의식 속에 일대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선생에 대한 일제 헌병들의 탄압은 1910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비아 병 참소, 장성 헌병대, 광주 경찰서 등에 누차 구인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선생의 의지는 누구도 꺾지 못했다. 천붕 지함(天崩地陷) 심불가변(心不可變) 국파신망(國破身亡) 의불가실(義不可失) ”천지가 다 무너져도 나의 본심은 변할 수 없으며, 나라가 부서지고 이 한목숨 죽는다 해도 조국에 대한 의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 이는 장성 헌병대에서 저들 앞에 써 던진 시구(詩句)로서 그즈음에 널리 전송되었던 것이다. 1917년 6월 광주 경찰서에 구인되어 간 선생은 그 사흘째 되던 날 의식이 끊어진 몸으로 가마에 실려서 돌아와 그 길로 운명하였다. 망국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67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신 것이다.

운명 한 달 전에 아들 일규(日圭)에게 마을 앞 비룡대위에 조선 삼천리를 뜻하는 삼층 석대를 세우고 싶다는 분부가 있었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내 조국 삼천리강토가 외적에게 짓밟혀 일조에 생지옥이 되고 말았으나, 오직 나라를 구하고 독립을 되찾을 우리의 애국정신만은 저 바윗돌처럼 굳세고 단단하고 변함이 없이 지켜 나가야 한다는 깊고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유지(遺志)에 따라 문인 여러분과 아들 일규 및 친지들이 힘을 모아 1920년 10월에 풍천대가 준공되었다. 그 규모와 구조 대명(臺名)과 각자(刻字) 등은 모두 선생의 뜻에 따랐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안청공원 안에 있는 풍천대 옆에 세워진 석비에 기록된 내용이다.

1910년 8월 29일은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국권을 상실한 날이다. 국가적 치욕이라는 의미에서 경술국치라고 하는데, 조선 총독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는 조선을 무단통치할 것을 선언하였다. 총독은 입법, 사법, 행정권을 모두 장악하고 군대 안에 있는 경찰인 헌병까지 동원하여 공포정치를 자행하였다. 석음 박노술의 고난은 나라를 잃은 지 4개월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돈으로 매수하려다 실패한 일제는 잔혹한 고문을 통하여 석음의 독립운동 의지를 꺾고자 했다. 일제 헌병들의 탄압으로 온갖 고초를 겪고, 의식이 끊어진 몸으로 가마에 실려서 돌아와 그 길로 운명하였다는 기록을 통하여 일본 경찰의 고문 수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12년 105인 사건 때 구속되어 각종 고문을 당했던 독립운동가 선우훈은 20여 가지나 되는 고문 수법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대나무 못을 손톱과 발톱 사이에 박는다. 아주 추운 날 옷을 벗긴 후 수도전에 묶고 찬물을 끼얹어 얼음기둥을 만든다. 널빤지에 못을 박아 그 위에 눕게 한다. 온몸에 기름을 바른 후 인두와 담뱃불로 지진다. 동전 크기만큼의 머리카락에 몸을 매달아 머리털이 빠지게 한다. 코에 뜨거운 물을 붓고 거꾸로 매달거나 뒹굴 린다. 입을 벌리게 하고 막대기로 석탄가루를 쑤셔 넣어 기절시킨다. 여러 날 일체 굶긴 후 그 앞에서 만찬을 벌인다. 수염의 양끝을 서로 묶은 다음 빠질 때까지 잡아당긴다. 사형집행을 가장하여 자백을 최후로 강요한 후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공포를 쏘아 실신시킨다” 등이다.

풍천대 후면

실리주의가 현대인의 삶의 기준이라면 조선 시대의 사회는 명분을 최우선으로 하는 명분주의 사회였다. 명분을 얻느냐 잃느냐에 그 지식인의 사활이 달려 있었다. 인간으로서 떳떳한 도리인 의리를 지키고 그 신념을 흔들림 없이 지켜내는 지조를 일관되게 간직할 수 있느냐가 최대 관심사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선비정신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격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학문과 덕성을 키우고, 대의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불굴의 정신을 말하며, 삶은 청렴과 청빈을 우선 가치로 삼으면서 마음은 풍요로운 유유자적의 삶을 추구했다.

밀라노의 한 판사는 자신이 직접 노새를 죽인 뒤 어느 하인이 저지른 것이라고 비난하고는 그에게 고문을 가했다. 그러자 하인은 짓지도 않은 죄를 자백했다. 심지어 다시 고문당할 것이 두려운 나머지 교수대에서조차 고백을 철회하지 않았다. 판사는 그 길로 자신의 법정에서 고문을 철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엄청난 고통의 고문을 이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고문 속에서도 자신의 지조를 지킨 선비가 바로 석음 박노술이다. “나라가 부서지고 이 한목숨 죽는다 해도 조국에 대한 의리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고백은 헌병대에 끌려가 당한 지독한 고문의 한 복판에서 나온 것이다.

불의를 볼 때마다 목숨 걸고 간언을 서슴지 않은 명재상 이원익의 청백을 표상하는 뜻에서 인조 임금은 흰 이불과 요를 하사했다. 이부자리를 전달하고 돌아온 승지에게 임금은 이원익이 어떻게 살더냐고 물었다. “초가에 비가 새고 문틈으로 바람이 듭니다” 임금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궁궐에 든 지 40년, 영의정을 지낸 이가 겨우 초가 두어 칸이더냐” 도승지 이민구의 기록에 의하면 이원익이 돌아가셨을 때 관을 마련할 여유조차 없어 조정의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풍천대는 비룡대위에 세워졌다. 비룡대는 원래 강원도 외금강 지역 구룡연 구역에 있는 대(臺)로서,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으로 전설에 의하면 구룡연의 용(龍)들이 이곳에 올랐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곤 하였다고 한다. 광주지역에 비룡대라 불리는 곳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뛰어난 경관을 지닌 장소였을 것이다. 풍천대는 석음 선생이 자주 찾고,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던 그 장소에 조선의 선비정신을 나타내는 삼층 석대를 세운 것이다. 선비정신은 곧 한국의 정신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이렇듯 자랑스러운 유산이 핏줄에 흐르고 있다. . 역사학자 한영우는 “하늘이 무너져도 원칙을 지키며 백성들의 삶을 끌어 안았고 도덕과 양심을 위해 모든 영광을 미련 없이 포기했던 선비정신이 필요한 때다”라고 말했다. 풍천대에서 나는 나에게 하늘처럼 여겨지는 가치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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