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봉서원의 강당인 빙월당 전경

16세기 조선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을 주제로 8년간의 편지를 주고받았던 고봉 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월봉서원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452에 있다. 기대승의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 존재 시호는 문헌이며, 전남 나주 출생으로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1549년(명종 4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서원에 들어서면, 외삼문 안으로 사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재인 명성 재가 있고, 오른쪽에는 서재인 존성 재가 있다. 그 위로 계단을 올라가면 강당인 빙월당이 있고, 좌측에 제사 물품을 넣어두는 전사청이 보이고, 우측에는 고봉 문집 목판이 보관되어 있는 장판각이 있다. 다시 계단을 올라 내삼문을 지나면 사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원 내 강당인 빙월당(氷月堂)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장판각에는 고봉 집과 논사록 등 목판 474판이 보관되어 있는데 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조선 유학사를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고봉 기대승은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어받아 그것을 다시 실현시키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자임하여 적극 경세유(經世儒)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드믈다”라고 김충렬 고려대 교수는 말한다. 지치주의는 사서삼경 가운데 하나인 서경(書經) 군진(軍陣) 편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하늘을 감화시킬 정도로 지극한 정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정한 의미나 제도를 가리키는 용어라기보다 이상적인 정치 일반을 의미하는데, 군주가 성실하고 올바른 마음으로 통치에 임할 때 비로소 이상적인 사회로 향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고봉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사회는 대동사회(大同社會)로 표현할 수 있다. 큰 도(道)가 행해지면 전체 사회가 공정해져서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뽑히게 되며, 신의가 존중되고 친목이 두터워진다. 도둑이나 불량배가 발붙이지 못하여 집집마다 문을 열어놓고 닫는 일이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고봉은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임금의 역할이 중요하고, 그리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 임금이 신하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특별한 토론 수업인 경연(經筵)을 중요시하였다. 조광조가 그러했듯이 고봉 기대승도 홍문관 관리로서 경연에서 왕에게 단순히 자문하여 주는 수준이 아닌 성심성의를 다해 자신이 갈고닦은 학문을 전수하고자 하였다.

고봉집과 논사록 목판이 보관되어있는 장판각

“논사록”은 고봉 기대승이 경연에서 강론한 내용을 가려 모은 책으로서 고봉 집(高峯集) 속에 실려 전한다. 고봉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조선 14대 임금 선조가 기대승이 경연에서 강설한 통치의 이념을 잊을 수 없어 사신에게 명해 그 내용을 가려 뽑게 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책에는 저자의 경세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그는 실천을 주장하면서도 그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주는 학문적 작업도 간과하지 않았고, 그러한 학문적 노력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고봉은 올바른 정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군왕이 완전한 인격을 갖추고 있는 성인(聖人)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군왕에 있어서도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유교적 수양 공부가 절실하게 요청되었다.

성군(聖君)에 의해서 왕도(王道)가 행해지는 정치는 백성들을 위한 정치이며, 백성들을 근본으로 삼는 정치이다. 백성에 대한 군왕의 자세는 지배자의 그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어버이와 같은 것임을 고봉은 강조한다.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것은 군왕 된 도리로서, 이 마음가짐이 곧 성군의 완성된 인격이 덕치(德治)로 실현되는 군왕으로서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고봉은 생각했다.

“훌륭한 그 말씀이여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촛불을 여러 번 바꾸어 켜고 책을 읽으며 서너 번이나 무릎을 치고 감탄하였네” 조선 후기 개혁 군주였던 정조(正祖)는 밤이 깊은지도 모르고 논사록을 탐독하였고, 그처럼 읽는 것이 경연을 열 번 듣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술회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 육성과 학문 정치 구현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하였고, 육의전과 시전 상인에게 부여된 전매 특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소상공인의 몰락을 막고 물가의 폭등과 상품 유통의 지연을 방지하였다. 외척을 제거하고, 강경한 탕평책을 실시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으며, 화성을 축조하여 수도를 옮겨 기득권을 타파하는 완벽한 정치 개혁을 준비하였다.

제사용 도구를 보관하는 전사각

빙월당(氷月堂)은 전면 7칸,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전면과 우측에 툇마루가 설치되어있다, 빙월당의 당호(堂號)는 정조가 고봉을 가리켜 “빙심 설월(氷心雪月)” 같다 하여 빙월당이라 사액(賜額)하였다. 빙심(氷心)은 단단하고 투명한 선비의 마음을, 설월(雪月)은 눈 위에 비친 달빛이니, 흰 것을 넘어 푸른 기운이 도는 고고한 학문의 경지를 뜻하는 듯하다는 해석이 있다. 고봉과 퇴계의 사단칠정 논변에서 달과 물로 성정(性情)과 이기(理氣)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어찌 물속의 달에 밝음과 흐림이 있는 것이 모두 달의 작용이며, 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시대에 태어나지 못함이 한스러워라”라고 고백한 정조는 논사록을 통하여 고봉 기대승의 학문에 대한 치열한 노력과,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열정, 그리고 백성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군왕을 꿈꾸며 살아간 족적을 들여다 보고 장탄식을 하였다. 준비된 왕이 준비되어있는 신하를 갖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던 1762년은 정조의 나이 11살이었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영조에게 뒤주에 갇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눈물로 간청하였고,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세력의 갖가지 방해를 뚫고 어렵게 왕이 된 정조는 특권과 반칙으로 얼룩진 사회를 개혁하는데 앞장섰다. 그런 그에게 고봉과 같은 신하가 있어 조력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해본다. 그가 등용한 홍국영은 삼 년 만에 한계를 드러내고, 왕은 거대한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당해야만 했다.

눈 내리는 추운 겨울밤 빙월당 지붕 위로 보름달이 떠올랐다. 캄캄한 세상이 대낮같이 환해졌다. 성심성의를 다해 자신이 갈고닦은 학문을 왕에게 전수하여 성군(聖君)이 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왕이 무능하다고 여겨지면 수많은 백성들을 위해 왕을 쫓아내야 한다고 까지 생각한 고봉 기대승에게 차가운 얼음처럼 엄격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하늘을 감화시킬 정도로 지극한 정치를 통해 고통당하는 백성을 위로하고자 했던 고봉의 마음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신음하는 조선 사회에 둥근달처럼 빛을 발하였다. 빙월당은 고봉을 향한 정조 임금의 애틋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는 듯하다. 

김귀백 기자  gasun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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