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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아 박용철 선생 생가의 초가집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거냐
김귀백 기자 | 승인 2023.01.30 13:39
용아 생가 전경 (사진제공 광주문화재돌봄센터)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의 서정시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용아 박용철의 생가가 있다. 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서재, 사당 등이 남아있는데, 용아 생가는 19세기말 박용철 시인의 고조부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높다란 막돌 기단 위에 세웠다,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에 툇마루가 있고 부엌과 중앙 2칸은 방이다. 사랑채도 정면 5칸, 측면 2칸인데 오른쪽에 마루를 설치하였다. 행랑채는 정면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있다. 모두 초가지붕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용아 박용철은 광주 공립보통학교와 서울의 배재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동경 청산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김영랑과 교제하였다. 졸업 후 다시 외국어학교 독문과에서 수학한 후, 연희전문학교를 수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문학활동에 전념하였다. 1930년 「문예월간」을 창간하여 외국 문학을 소개하고 1931년에는 김영랑, 정지용 등과 함께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창간호에 그의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간하였고, 극예술 연구회의 동인으로 신극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외 시(詩)의 이론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문단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는 김영랑 등과 함께 순수시 운동을 펼쳤다. 정열적이고 남성적인 그의 시 세계는 1930년대 서정시 발전에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용아 생가 입구 (사진제공 광주문화재돌봄센터)

용아 생가가 여전히 초가집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은 집안사람들이 초가지붕을 해체하고 기와집으로 증축하려던 것을 박용철 시인이 초가 위로 보름달이 뜨면 그 풍경이 참 아름답지 않냐며, 그대로 두자고 만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초가삼간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초가집은 부엌과 방, 그리고 식량을 보관해 두는 광이 있는 전면 3 칸집이 거의 다수를 차지했다. 전면 5칸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짓고 행랑채와 서재, 사당까지 세우려면 웬만한 재력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용아의 집안사람들이 기와집으로 증축하려고 했을 때,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는 사재를 털어 1930년에 문예 잡지 「시문학」 3권, 1931년 「문예월간」 4권, 1934년 「문학」 3권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던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용아의 관심은 기와집에서의 생활이 아니라 문예 월간지 발행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생전에 생활이 어려운 친구를 금전적으로 도와주고 동료 시인들의 작품집을 발행하는 등 문인들의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도와주었다

1930년대의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 시절 중 가장 억압과 착취가 극심하던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으며, 고리대금에 신음하던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등지고 만주 벌판으로 떠나야 했다. 그 당시 우리 문단은 임화와 카프(KAPK,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연맹)로 대표되는 리얼리즘 문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 단체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조직한 대표적인 문예 운동단체로서 문학작품을 통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그들의 뜻을 이루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 소설의 내용은 노동자 파업이나 농민들의 소작쟁의가 주를 이뤘다. 프롤레타리아 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여 생활을 영위해 가는 무산자 계급을 일컫는 말로 노동력 이외에는 생계 수단을 갖지 못한 빈곤층을 지칭하는 말이다. 식민지의 백성으로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악랄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감하며 같이 싸우자는 그들의 글에 이념이나 정치적 목적을 떠나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30년 3월 1일 경성 방송국이 종래의 한국어, 일본어 혼용 방송을 중단하고 한국어 방송을 오후 9~11시로 단축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이처럼 엄혹한 시기에 이데올로기나 모더니즘을 지양하고, 시문학파를 형성하여 순수시 쓰기를 고집한 용아 박용철의 행보는, 단순한 시작(詩作) 활동이 아닌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총과 칼로 벌이는 독립운동보다 더 강한 투쟁이 아닐까? 고교 시절부터 지하신문 목탁을 발간하여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한 용아의 이력을 볼 때,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 문예월간, 문학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는 그의 순수시에 대한 열정은 일제 치하에서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었다.

용아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는 일제 강점기 때 정든 고향을 떠나야만 하는 사람의 슬픔을 담고 있으며, 어딘가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 인생을 비유한 작품이다. “나 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 짓는다” 정든 고향을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떠날 수밖에 없는 식민지 백성들의 처지는 다를 것이 없으며, 시인은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한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 용아의 두 형이 모두 몸이 약해 일찍 죽고, 그 역시 부모님의 각별한 애정 속에서 보호를 받고 자랐지만, 1938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났다. 몸은 약했지만 그의 나라 사랑은 바다 같이 넓고 크게 표현되었다. 엄혹한 일제 치하에 가만히 앉아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 조선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는 시도에 맞서 그가 노력했던 것은 시를 쓰는 일이었다. 그것은 용아가 할 수 있었던 최고의 독립운동이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송정 공원안에 세워진 용아 시비 (사진제공 광주문화재돌봄센터)

역사 이래로 우리나라에 초가집이 많이 지어지게 된 것은 벼농사를 짓고 살았던 까닭에 볏짚을 쉽게 구할 수 있고 흔했던 이유이다. 유난히 손재주가 발달한 우리 민족은 볏짚을 이용하여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짚신과 멍석을 만들고, 가마니를 짜서 나락을 담았다. 심지어는 우장을 만들어 비가 내리는 날 사용하였다. 일반 대다수의 백성들이 거주하였던 초가는 이제 구경하기 쉽지 않다. 낙안 읍성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곳에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지정문화재 중 초가지붕이 있는 곳은 “용아생가”가 유일하다. 용아의 집안사람들이 초가를 해체하고 기와집으로 증축하려 했지만 시인은 반대하였다. 그는 일제 치하의 캄캄한 밤 중 같은 어두운 시대에 기와집에서의 삶을 거부했다. 비록 초가에 살지만 어둠을 밝히는 보름달같이 환하고 자유로운 시대를 꿈꾸었다. 용아는 일제 강점기 시절 고향을 떠나 간도나 만주로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가고, 억압과 착취에 시달린 농민들이 항구에서 배처럼 떠나야 하는 고난의 삶을 가슴으로 부둥켜안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해 사랑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김귀백 기자  gasun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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