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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노을빛 치마에 깃든 애틋한 사랑[한국의 유물유적]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가족 사랑이 담긴 '하피첩' ①
임영열 기자 | 승인 2024.05.27 11:02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의 영정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지금으로부터 262년 전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이 극에 달하던 1762년 임오년 윤 5월 14일. 조선의 최장수 임금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서인으로 폐위시키고 쌀뒤주에 가두었다.

사도세자의 11살 어린 아들은 창경궁 문정전 뜰에 납작 엎드려 “할바마마! 제발 아비를 살려주시옵소서...”하며 절규하듯 울부짖었다. 하지만 한 여름 땡볕이 내리쬐는 좁은 뒤주에 갇힌 세자는 8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처참하게 죽어갔다.

조선왕조 500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국왕이 정적이 아닌 후계자 아들을 이렇게 잔혹하게 죽인 사례는 매우 드물다. 역사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임오년에 일어난 ‘재앙 수준의 정치적 변고’라는 의미로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때 한양에서 이 참혹한 사건을 모두 목도한 진사(進士)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은 벼슬을 포기하고 정치적 탄압을 피해 고향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마을로 낙향한다. 당시 정재원은 사도세자를 공격하며 죽음으로 내몰았던 ‘노론(老論)’의 반대 당파인 ‘남인(南人)’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6월 16일. 마재마을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은 이렇게 무도하고 패악한 시대에 절대로 벼슬은 하지 말고 ‘농사나 짓고 살라’는 뜻으로 갓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귀농(歸農)’이라 지었다.

당파싸움의 희생양이 된 조선의 천재

조선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실학, 철학, 문학, 법학, 의학, 공학, 지리학 등 다방면에 다재다능한 능력을 발휘한 올라운드 플레이어.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함께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발명가, 저술가, 시인이면서 철학자였던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이렇게 권력을 둘러싸고 사색당파(四色黨派)들이 격하게 대립하던 혼란한 시기에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의 나주 정씨 가문은 대대로 왕의 자문기구인 홍문관(弘文館) 관리를 배출한 ‘8대옥당(八代玉堂)’가문이었다. 옥당은 홍문관의 별칭이다. 어머니 해남 윤씨 또한 대단한 가문이다.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며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문인화의 대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다. 이렇게 명문가의 DNA를 물려받은 천재 정약용은 네 살 때 천자문을 떼고 열 살에 자작 시집을 낼 만큼 총명했다.

다산 정약용의 외 증조부 공재 윤두서. 국보로 지정된 윤두서의 자화상 ⓒ국가유산청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사람들은 그에게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애칭을 선사했다. 또한 유엔 산하에서 교육 과학 문화를 다루는 유네스코(UNESCO)는 2012년에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헷세’ 프랑스의 사상가 ‘장자크 루소’ 음악가 ‘드뷔시’와 함께 정약용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세계의 기념인물’로 선정했다.

다산의 철학과 사상이 UN에서 추구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와 부합한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다 알고 있듯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조선에 살았던 천재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15살 때 서울의 명문가 풍산 홍씨 집안의 규수 16살 홍혜완과 결혼한다. 다산보다 1살 연상의 여인이었다. 22살 진사 시험 합격 후 사은회에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풍운지회(風雲之會)’가 이루어진다. 바람과 구름의 만남, 즉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신하가 만나는 ‘운명적 순간’이었다.

28살이 되던 1789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 초계문신을 거쳐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로 승승장구한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 연천현감 김양직의 비리를 고발하여 파직시킨다. 이 일은 훗날 다산의 발목을 잡는다.

39살이 되던 1800년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청천벽력이었다. 다산은 “천 줄기 흐르는 눈물 옷깃에 가득하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라고 애통해하며 그때의 심정을 시문으로 남겼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와서 맨 처음 머물렀던 사의재(四宜齋). 사의재란 ‘마땅히 지켜야 할 4가지’라는 뜻이다 ⓒ강진군청

어린 왕 순조의 즉위와 함께 다산 가문은 위기에 빠진다. 20대 초반에 나라에서 엄격히 금했던 천주교에 심취했던 다산 형제들의 이력이 불거졌다. 11살짜리 왕을 등에 업고 다시 권력을 잡은 노론 세력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는 이른바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셋째 형 정약종은 사형에 처해졌다. 둘째 형 정약전과 다산은 천주교를 배교(背敎)하여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유배로 감형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10월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에 연루된 두 형제는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은 뒤 정약전은 완도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에서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 되었다. 다산의 18년간 기나긴 유배 생활은 이렇게 시작된다.

아내가 보내온 빛바랜 치마에 쓴 편지와 그림

삭풍이 몰아치던 1801년 겨울. 고향마을 어귀에서 배웅하던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뒤로하고 천리 먼 길 기약 없는 유배의 길에 나선 다산의 심경은 과연 어떠했을까. 다산은 슬하에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 2녀를 천연두 등의 질병으로 잃었고 2남 1녀만 살아남았다. 유배를 떠날 때 막내딸은 겨우 8살이었다.

한양에서 귀양 온 다산을 강진 사람들은 천주교를 믿는 ‘대역 죄인’으로 여기며 냉대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간신히 동문밖 주막집 노파의 도움으로 오두막 뒷방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4년을 보냈다. 다산은 이 골방을 ‘마땅히 지켜야 할 4가지’란 뜻으로 ‘사의재(四宜齋)’라 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 와서 10여 년간 머문 다산초당. 본래 작은 초가집이었으나 초당은 무너지고 1958년 복원 과정에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기와집으로 다시 지었다. 1962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됐다 ⓒ국가유산청

그 뒤 보은산방과 아전 이학래의 집을 전전했다. 1808년에 겨우 해남 윤씨 외갓집 도움으로 만덕산 아래 다산(茶山)에 초당을 마련하여 10여 년을 지냈다. 다산은 이곳 초당에서 불후의 명저,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를 포함해 약 500여 권의 책을 집필했다.

훗날 다산은 자신의 저술에 대해 “복숭아뼈가 세 번이나 구멍이 뚫리는 고통이었다”라고 회고했다. 다산이 강진 유배지에서 긴 세월을 견뎌내며 방대한 저술 활동을 이어간 힘의 원천은 바로 ‘가족사랑’이었다.

유배생활 7년째 되던 1807년. 아내가 30년 전 혼례식 때 입었던 다홍치마와 편지를 보내왔다. “그대와 이별한 지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니... 남쪽으로 내려가/ 끼니라도 챙겨드리고 싶으나/ 해가 저물도록 병이 깊어져/ 이내 박한 운명 어쩌리까/ 이 애절한 그리움을...

아내의 다홍치마는 노을빛으로 변해 있었다. 아내의 빛바랜 웨딩드레스와 절절한 그리움이 담긴 편지를 받아 든 다산은 고향의 처자식들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마음을 추슬렀다.

하피첩의 서문.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 하피첩을 만들게 된 사연을 적었다 ⓒ국립민속박물관

가족 간의 화평을 강조한 하피첩 본문. 화평 옆에 붉은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국립민속박물관

그리고 3년 후 다산은 고이 간직했던 아내의 ‘노을빛 치마’를 잘라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간곡한 당부를 담아 4권의 서첩으로 만들어 ‘하피첩(霞帔帖)’이라 이름 짓고 마재마을로 보냈다. 하피는 ‘노을빛 치마’라는 뜻이다.

서문에 책을 만든 사연을 적었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 살고 있는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 천 리 먼 길 애틋한 마음을 담았네... 잘라서 작은 서첩을 만들어/ 그나마 아들들을 타이르는 글귀를 쓰니/ 부디 부모 마음을 잘 헤아려/ 평생토록 가슴속에 새기려무나...”

“지금은 비록 ‘폐족’이지만 선량하게 살아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으니 화평과 효심, 안목을 키우라...” 대학자이기 이전에 평범한 아비의 자식사랑이 담긴 글이 가슴 찡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귀양살이 12년째, 유배를 떠나올 때 8살이던 막내딸이 어느덧 20살이 되어 혼례를 치르게 되었다. 신랑은 다산의 강진 친구 윤서유의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 윤창모였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시집가는 딸에게 그려준 ‘매화병제도’. 두 마리 새처럼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담았다. 가로로 길게 시를 쓰고 옆에 그림을 그린 사연을 적었다. 내용은 하피첩의 서문과 비슷하다 ⓒ고려대학교박물관

다산은 하피첩을 만들고 남겨두었던 치맛자락을 꺼내 활짝 핀 매화꽃과 두 마리의 멧새가 가지 위에 앉아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매조도’를 그렸다. 아랫부분 여백에 세로로 길게 시를 적고 옆에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었다. 하피첩의 서문과 유사하다. 두 마리의 새는 딸과 사위를 상징한다.

“저 새들 우리 집 뜰에 날아와/ 매화나무 가지에서 쉬고 있네/ 매화향 짙게 풍기니... 이제 여기 머물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결혼한 딸과 사위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애틋하다. 유배지에서 아버지가 빛바랜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써 보낸 편지와 그림을 받아본 자식들의 눈시울은 무척이나 뜨거웠을 것이다.

1818년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 꿈에 그리던 고향 마재 마을로 돌아왔다. 아내와 마흔에 생이별 한 뒤 57세 환갑이 다된 노인이 되어서야 다시 만났다. 고향집으로 돌아온 다산은 그동안의 저서들을 마무리하면서 아내 홍혜완과 만년을 보낸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다산의 생가 여유당. 여유당(與猶堂)은 ‘조심하고 살핀다’는 뜻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된 것을 1986년 복원했다 ⓒ한국관광공사

1836년 다산의 나이 75세. 결혼 60주년을 3일 앞두고 아내에게 바치는 회근시(回巹詩) 한 편을 썼다. “눈 깜빡할 사이 예순 해가 지나가니/ 복사꽃 짙은 봄빛 신혼 때와 같구려/ 나고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사람 늙기를 재촉하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지극한 부부애가 느껴지는 다산 생애의 마지막 시는 읽는 사람들의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결혼 60 주년이 되는 2월 22일 아침. 회혼을 축하하기 위해 친척과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다산은 75세로 편안히 눈을 감았다. 아내 홍혜완도 2년 뒤 다산의 뒤를 따랐다. 둘은 마재 마을 집 뒤편 언덕에서 함께 영면하고 있다.

다산 선생의 묘소. 여유당 뒤편 언덕에서 부인 홍혜완과 함께 영면하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이다 ⓒ국가유산청

200여 년 전 엄혹했던 유배지에서 평범한 아버지와 남편으로서 아내의 노을빛 치마에 편지를 쓰고 그림을 그려 가족사랑을 실천한 다산이야말로 진짜 ‘조선의 사랑꾼’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시대가 변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다. 눈부시게 푸르러가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다산의 하피첩은 가정과 가족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고 있다.

다산의 삶만큼이나 드라마틱한 하피첩 이야기는 다음회로 계속 이어집니다.

격월간 문화매거진 <대동문화>142호(2024년 5, 6월)에도 실렸습니다.

임영열 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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