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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 스님부터 추사 김정희와 법정 스님까지다향만리-서울 봉은사
참다운 묘용을 알려면 차(茶)의 천연스러움을 따르라
백승현 기자 | 승인 2016.05.10 08:52

작은 창 높은 누각 위의 선승의 자리는 차디차고/물 길어 차 끓이니 솥 안엔 달이 가득/두견새 노래 즐기는 사연 알지 못하지만/깊은 밤 나와 함께 남쪽 향해 노래하네(小窓高閣冷禪床/汲水煎茶月滿鏜/不識子規何所樂/與吾同夜叫南崗) -「월야문자규(月夜問子規)」-

찻잔 속에 달이 가득한 진공묘유의 선(禪) 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시는 소박한 산사가 더 어울린다. 그런데 여기는 아셈타워, 코엑스, 국제무역센터, 한국전력공사, 외환은행 본점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 전시 컨벤션과 무역 비즈니스의 중심지가 여기다. 울울창창한 도심 빌딩 사이에 꼼짝없이 포위된 듯한 봉은사에 들른다. 이곳은 봉은사 1,200년의 과거와 한국의 미래 1,200년이 만나는 발화점같이 느껴진다.

도심 빌딩 사이로 흐르는 차향

신라 원성왕 10년(794) 연회국사가 창건해 지금까지 1,200년의 세월을 헤아린다. 이 봉은사에 보우(普雨;1509~1565) 스님이 주지로 임명되어 도착한 것은 1548년.

이때는 불교로서는 암울한 중세였다. 1504년(연산군 10) 선종의 흥천사, 교종의 흥덕사를 헐게 되면서 승과가 폐지되었다. 중종 33년(1538)에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지 않은 절들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무술법란이었다. 종로의 최대 사찰 원각사는 모두 헐렸으며 불상은 녹여 군기에 쓰이는 지경이었다. 도첩이 없다는 이유로 스님들을 군대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유생들은 사찰을 불태웠고, 사찰의 재물을 약탈했다. 스님들은 사대부들의 가마꾼 노릇을 해야 했다. 훼불(毁佛)의 시대였다.

불교계가 처한 이때의 현실은 보우가 남긴 <허응당집> 속에 ‘주지 임명 소식을 듣고 마치 도망을 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는 기록으로도 그 정황을 알 수 있다.

불교 쇠퇴하기가 이 해보다 더하겠는가 / 피눈물을 뿌리며 수건을 적시네 / 구름 속에 산이 있어도 그곳에 발붙일 수 없으니 / 티끌 세상 어느 곳에 이 몸을 맡기리

척불 세력과 유생들이 둘러싼 산처럼 보우를 겁박하던 시기였다. 촛불 하나를 들고 바람 찬 겨울 들판에 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보우는 나섰다. 조선 불교 중흥의 시대적 소명을 외면하지 않았다. 법등을 들고 순교자처럼 시대의 회오리가 몰아치는 곳으로 나갔다.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었다.

보우는 괴승인가? 요승인가?

스님은 호가 허응당(虛應堂)·나암(懶菴)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중종 25년(1530) 금강산 마하연암에 들어가 참선과 경전 연구에 몰두하다 하산했다. 그런데 사찰이 파괴되고 주지가 투옥되는 사태에 직면하자 다시 입산했다.

명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면서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는 20년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1545~1565)’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실록에서도 ‘윤비는 사직의 죄인이라고 할 만하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혹독한 평가를 받은 왕비이다. 남성 관료들을 호령했고, 국시였던 억불정책을 여보란 듯이 무시하고 호불(護佛)했으며,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는 성리학자들 속에서도 왕비로서 강력한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탁월한 정치가이자 전략가로 조선왕조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을사사화의 불씨를 당겼으며, 윤원형과 함께 정치를 독단했으며, 당대의 부정부패에 일조했다.

명종 재위 3년(1548) 불교를 신봉하던 왕후는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보우를 등용했다. 강원감사 정만종의 추천으로 보우를 불러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본격적으로 불교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선종과 교종의 부활을 명하고, 봉선사를 교종을 대표하는 교종수사찰로 봉은사는 선종을 총괄하는 선종수차찰로 인가했다. 보우는 대도선사와 선종판사로 임명됐다. 연산군 이래 48년의 폐교 이후 여러 고을의 300여 정찰(淨刹)을 나라의 공인으로 높이고, 도첩제를 실시해 선교 양종에서 각각 30명의 승려를 뽑았으며, 4,000여 명의 스님에게 도첩을 내렸다. 임진왜란을 맞아 큰 공을 세우고 조선 불교를 중흥시킨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이 모두 이때 승과로 배출된 인물들이었다.

춘천 청평사로 옮겼다가 1559년 다시 봉은사로 돌아와 도대선사에 오른 보우는 서삼능에 있던 중종의 능을 봉은사 가까이로 옮겨 장차 문정왕후와 함장케 함으로써 봉은사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있다. 봉은사는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고 절이 있던 자리에 중종의 능 곧 정릉이 옮겨왔다. 그러나 결국 문정왕후의 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명종은 문정왕후의 승하 이후 지금의 서울 공릉동에 ‘태릉’을 조성해 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이다.

임금과 부처 중에서 누구를 받들 것인가

불교 중흥책에 유학들은 아연실색 문정왕후의 이런 정책에 반발했지만 문정왕후는 그 어떤 선대 왕도 해내지 못한 독단으로 불교 진흥을 꾀했다. ‘보우를 죽이라’는 유림들의 상소와 성균관 학생들의 동맹 휴학 속에서도 보우는 법왕(法王)으로 조선 불교계를 통솔했다. 유교의 상도와 불교의 권도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상을 천명하기까지 했다.

임금을 위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참다운 선비가 할 일이고/부처를 머리에 받들고 선비 공경함 공경함은 곧 불제자들이 할 일이다/더구나 주인으로서 손님을 공경한다면/어떤 손님이 우리 몸을 함부로 해할 수 있는가/원컨대 재를 준비하는 부엌에서 일하는 우리들/열심히 끊인 차로 이 부처님 궁전을 밝혀주오.(爲君排釋眞儒事/戴佛尊儒是釋風/況以主能恭彼客/有河賓謾毁吾躬/願諸丹竈修齋輩/勤辨茶湯耀梵宮) -「불욕경봉이게시지(不欲敬奉以偈示之)」-

문정왕후는 양주 회암사에서 무차대회를 준비하려고 목욕재계를 한 뒤 갑자기 병이 들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명종 20년 4월 초파일 하루 전인 초칠일 갑자기 승하했다.

보우는 하루아침에 ‘희대의 요승’으로 매도됐다. 강원도 설악산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밀고로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대신들은 대비를 절로 보내 죽게 한 것이 보우의 책임이라며 강력하게 처단을 주장했다. 율곡 이이가 그를 귀양 보낼 것을 주장했고 명종은 제주도 유배 어명을 내렸다. 조정의 밀명을 받은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보우는 장살되고 말았다.

“허깨비가 허깨비의 고을에 와서/ 오십년을 희롱하는 미치광이로 장난을 쳤구나/ 사람의 세상 영욕의 일 다 치르고/이 허깨비 승려 몸 벗어나 넓고 푸른 하늘로 오르리라.” 허응당 보우는 이 시가 담긴 <허응당집(虛應堂集)>과 <선게잡저(禪偈雜著)>, <불사문답(佛事問答)> 등을 남겼다.

유정 스님은 보우 스님을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대사께서는 동방의 외지고 좁은 땅에 태어나 백세 동안 전해지지 못했던 도의 실마리를 열어 오늘날 배우는 자들이 이에 힘입어 그 돌아갈 바를 얻게 하시고 이 도로 하여금 마침내 사라지거나 끊어지지 않게 하시었다. 이를 상고하여 논하건대 천고에 홀로 오셨다가 홀로 가신 분이라 하겠다.”

차시를 쓰며 동심으로 살던 스님

올해 초파일에는 서울 봉은사에서 스님의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이곳의 다래헌(茶來軒)은 차를 지극히 아꼈던 법정 스님이 70년대 한극대장경 역경을 하며 머물던 곳이다. 그리고 다래헌 위쪽에 판전(版殿)이 있다. 차의 중흥조 초의선사의 스승인 추사 김정희 선생이 노년에 경기도 과천(果川)의 과지초당(瓜芝草堂)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렸다. 이 판전의 글씨는 추사가 타계하기 사흘 전에 썼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난 ‘삐툴빼툴 동자체(童子體)’이다. 그리고 조선 불교를 중흥시킨 보우 스님도 다시(茶詩) 20수를 남기고 차생활을 즐겼다.

그대 숨은 선비를 참되게 사모해/벼슬 표연히 버리고 여기 왔네/달밤 그윽한 아취를 이야기하고/신선의 부뚜막에 차 연기가 일어나네/기이한 만남이 어찌 우연이었겠나/숙세의 맹서로 끊임없이 만나는 것이지/마음으로 굳은 절조 지키며/청산에서 함께 늙으리라 맹세했건만(君獨慕眞隱/舍笏來飄然/月夕話幽趣 /丹竈生茶煙/奇遇豈偶爾/宿誓喜相圓/意擬堅靜節/共老靑山邊) -「기취선(寄醉仙)」-

같은 길을 가던 도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같이 지내던 시절의 차 마시는 아취를 드러낸 시이다.

천진난만한 추사의 글씨처럼 보우의 차세계는 천진난만하다. 보우 스님은 「화엄불사의묘용송(華嚴不思議妙用頌)」에서 ‘참다운 묘용을 알려면 일상에서 천연스러움을 따르라.’했다. 천연스러움이 바로 묘용으로 하늘의 이치라고 했다. 차는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다. 시대의 한복판을 걸어야했던 보우 스님에게 차는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쉼’이었다.

대동문화 78호 [2013 9,10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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