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벽두 한국 영화의 유행 코드 중 하나는 ‘팩션(facti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미도 684부대’의 실재 이야기에 허구를 가미했던, <실미도>(2003)가 한국 영화 최초로 천만 고지를 점령한 것은 그 신호탄이었다.

<왕의 남자>(2005)는 연산군 제위 기간의 역사에 광대의 이야기를 접목하며 대대적인 반응을 이끌었고,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역시 광해군 시기의 정사(正史)에다 ‘그림자 정치’라는 상상을 더하여 관객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사실((fact)에다 작가의 상상력이 첨가된 가공의 이야기(fiction)를 더한 ‘팩션(faction)’이, 현재 한국 영화의 흥행 코드로 각광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관상> 역시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전례를 적극 반영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속의 픽션, 영화 스토리를 지배하다

<관상>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단종 1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김종서 등 세 재상을 비롯한 정부 핵심 인물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사건)을 배경으로 김종서(백윤식)와 수양대군(이정재)이 적대하고 있는 실재 역사 속의 인물들 사이에 내경(송강호)이라는 관상가를 배치하여 극적인 재미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 5백 년의 역사에서 ‘계유정난’을 소재로한 사극은 그간 여러 차례 제작되었다. 문종의 이른 승하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단종과 단종의 삼촌이자 왕위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는 수양대군(세조), 그리고 이들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궁중의 치열한 암투는 과정부터 그 결과까지 조선시대 어느 사건보다도 흥미진진한 것이었기에, TV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관상>은 앞선 드라마들과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광풍의 소용돌이를 재현한다. 하여 단종의 비극적인 운명과 수양대군의 야욕이라는 파란만장의 역사를 취하는 가운데, 상상력을 발휘하여 관상가 일행들을 창조했고, 그들이 역사의 폭풍우 속에서 좌초하는 이야기를 추가했던 것이다.

<관상>을 지배하는 사상은 운명론이다. 그러니까 세상만사가 미리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생각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철시킨다.

이를 위해 <관상>은 ‘관상 대로 운명이 결정된다.’는 명제를 전달하기 위해 관상가 내경의 아들인 진형(이종석)이라는 인물을 배치했고, 한명회(김의성)의 일화를 영화의 처음과 끝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모반을 막을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운명!

영화 서두에 내경은, 아들인 진형에게 벼슬에 오르게 될 경우 화를 당할 상이라며, 진형이 그토록 원하던 관직으로의 삶에 반대한다. 하지만 진형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거역하고 관직에 오르고, 결국 아버지의 점지대로 화를 당하는 비극의 인물이 된다. 바로 운명론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한명회와 관련된 이야기 역시 운명론을 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영화의 오프닝은 한 노인이 자신의 목이 잘릴까 두려워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내경이 한명회에게 목이 잘릴 관상이라고 말했던 것에 대한 반응이었음이 후에 밝혀진다.

그렇다면 그는 늙어 죽을 날이 임박했음에도 목이 붙어 있었으니 예언이 틀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데도 영화는 마무리 자막을 통해서, 연산군에 의해 무덤 속에서 꺼내어져 시체로 목이 잘렸노라고, 친절하게 자막 처리하며 운명론에 대한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생김새대로 삶이 정해진다는 것이 이 영화가 그토록 말하고 싶었던 바라면, 운명론을 믿지 않는 관객들이라면 심히 불편해질 만도 한 순간인 것이다.

여기에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한 축을 형성했던 ‘관상’의 서사가 정사(正史)의 갇힌 역사에 의해 포박되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수양대군의 역모가 블랙홀이 되어 곁가지 서사들을 빨아들여 버리기 때문이다.

이는 <왕의 남자>나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실제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현실 정치에 대한 절묘한 은유로 마지막까지 관객들의 심장을 움켜쥐게 했다면, <관상>은 민중의 생명력과 소망이 녹아있는 야사(野史)를 강화하는 대신에, 결국 정치적 패배의 현장에서 모반을 막을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인물들의 허무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관상>에 ‘영화적 통쾌함’이 부족하다면 바로 이 부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영화 속에서 명대사로 인구에 회자되는 다음과 같은 대사는 큰 울림을 주지 못하고 따로 논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봤을 뿐 바람은 보지 못했다. 파도를 일으키는 건 바람이거늘, 결국 파도는 조각나서 부서져 버리거늘….”

관객 의식하는 연출은 불편하다

이 영화를 연출한 한재림 감독은 <연애의 목적>(2005)과 <우아한 세계>(2007)로 독특한 개성을 견지했던 감독이다. 그랬던 감독이, 오늘의 영화에서는 자신만의 연출 스타일을 살려내지 못한 점도 아쉽다. <관상>은 이름난 스타들을 기용하여 대중추수적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혐의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한 장면만 보아도 관객을 의식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모반에 성공한 수양대군의 광화문 행차 시에, 내경은 아들의 죽음을 직접 목격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아들이 죽자 오열한다. 카메라는 내경의 울부짖음을 오래 동안 지켜보고 있고, 배경 음악은 과장되어 있어서 관객들에게 슬픔에 동화되어 달라고 떼를 쓰는 형국인 것이다.

대동문화 79호 [2013 11,12월호]

조대영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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