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을 넘기고도 5세부터 노인까지 농익은 ‘1인 32역’을 소화하는 배우 김성녀는 지난해 9번째 모노드라마 <벽속의 요정> 공연을 마쳤다. 모노드라마는 연기자들에게 쉽게 넘기 힘든 벽이다. 단 한 명의 배우가 수많은 인물과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생을 이야기한다. 그런 배우의 역할이 그의 생활과 닮아있다.

“요즘 제 삶이 1인 다역을 하고 있어요. 연극, 국악, 음악, 문화까지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배역만큼 제 삶도 다양합니다. 중앙대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또 다시 배워가는 연습중입니다. 그리고 마당극 전문극단 ‘미추’를 이끌어가고 있고, 또 많은 일들을 이곳 국립극단에서 하고 있어요. 제 본업인 배우 외에 다양한 일들이 많아 벅찰 때도 있지만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게 편하죠.”

<벽속의 요정>은 2005년부터 그가 출연한 작품이다. 긴 세월을 넘나들며 가슴을 울리는 애틋한 사랑의 찬가를 극화한 작품이다. 스페인내전을 피해 40년 동안 벽에 숨어 산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의 <벽속의 요정>을 번안하고 한국화한 것이다. 소련 민요를 전면에 내세워 독특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원작에서는 이념적인 노래 ‘바르샤바 노동가’ 였으나, 휴머니즘을 강조하기 위해 ‘스텐카라친’의 노래를 차용했다. ‘베틀노래’와 ‘시집 가기 싫어’ 등 민요적 선율을 차입해 토속성도 살렸다. 외국에서 온 이야기이지만 우리 근현대사를 이야기하는 데 훌륭한 모티프를 제공 받았다. 남자들은 죽이는 일에 매달려 있을 때,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살리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극이다.

그는 연기 인생 30년 만에 처음으로 모노드라마의 출연을 결정했다. 더 늦기 전에 진정한 자신의 작품을 갖고 싶은 마음이 일인극 출연으로 연결됐다.

5살 때부터 마당극, 무대가 삶

마당놀이, 연극, 뮤지컬 등 장르를 넘나드는 연기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김성녀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 태어났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당시 여성국극 스타였던 어머니 박오진 여사의 손을 잡고 아역배우로 데뷔했다. 여러 장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저 놀라운 저력과 감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중요무형문화재인 박귀휘 선생과 김소희 선생으로부터 판소리를 사사 받은 그는 마당놀이 ‘심청전’, ‘춘향전’, ‘남사당의 하늘’ 등 3,000회가 넘는 공연을 통해 관객과 함께 울고 웃었다. ‘마당극의 여왕’이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마당놀이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로 통한다.

“어릴 적부터 시작했으니 연기 인생 60년인 셈이죠. 5살 때부터 마당극 무대에 올라섰어요. 그래서 저는 무대가 고향 같은 곳이에요. 제가 물고기라면 무대는 물이 된 거죠. 무대가 어릴 적 추억의 전부이고, 부모님과 같이 있었던 놀이터였어요. 무대 위의 매캐한 먼지 냄새가 아련하면서도 좋아요.” 그의 공기를 흡입하니 그의 옷소매에서 소박한 먼지 냄새가 묻어난다.

지금은 늘 우리 것이 소중하다고, 지켜야 된다는 사람 김성녀, 그에게도 어린시절 부끄러운 시간이 있었다.

“창피하게도 처음엔 우리 전통을 좀 무시한 적도 있어요. 우리문화 말살 정책 같은 경우도 있었고, 또 그 시절엔 우리 것 하면 기생이니 뭐니 하며 천하게 취급하는 말들과 눈들이 싫었어요. 대접도 못 받고 서양 문화예술로 눈을 돌렸던 시대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철없던 시절 정말 못난 생각이었죠.”

반성은 애착의 다른 이름이 됐다. 뒤늦게 교수라는 직함이 추가되면서 그는 학생들에게 더 많은 것을 퍼서 주고 싶다. 주기 위해 스스로 공부하면서 느꼈다. 우리 마당놀이를 같이 만드는데 동참한 30년 세월이 정말 감사하게 느껴졌다. 귀한 직업이라는 깨침도 왔다. 자존감이 생기면서 어떤 작품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도 커졌다.

이젠 “우리말도 가장 맛있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사람 김성녀, 그의 눈에 맑고 환한 빛이 스며든다. “판소리에는 말을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어조와 정서 이런 것들이 모두 담겨 있어요. 이런 것들을 몰랐다면 서양연극의 꼭두각시처럼 연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와 돌아보니 우리 것을 한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몰라요.”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곳, 마당

그는 마당극을 한지 30년 되던 해 무대에서 내려왔다. 마당극 안에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마당극이 꿈이었고 생활이었던 그와 스태프들은 같은 시공간을 함께 살아내며 울고 웃었다.

“어려운 일을 30년을 해왔습니다. 하면서 큰 기록도 세웠어요. 배우와 스태프 모두 30년 동안 바뀌지 않고 같이 걸어왔습니다. 강산이 3번 바뀌게 되면 마당극 판에서 내려 오겠다고들 했는데 2011년, 꼭 30년 되던 그 해에 모두 약속을 지켰습니다. 배우도 스태프도 다 세월 지나 늙어갔고, 더 좋은 공연을 보여주지 못할 바에는 박수칠 때 떠나야 되지 않느냐는 심정이었어요. 그 판을 내려온 게 정말 거짓말 같을 때가 많아요. 아직도 마당놀이 배우라는 칭호가 몸에 새겨져 있어요.”

마당이나 실내의 넓은 공간에서 공연되는 새로운 연극형태인 마당극. 무대는 원형으로 만들고 관중은 그 주변에 둘러앉아 4면 모두가 객석이다. 객석과 무대 사이는 보통의 액자무대처럼 높지 않고 단지 상상의 선으로 구분돼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중의 집단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된 무대에서 배우와 관객은 늘 호흡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둔다. 배우가 잘 놀면 관객도 흥이 나고, 추임새를 통해 관객이 배우가 된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는 곳이 마당입니다. 모든 통과의례가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탯줄을 묻는 곳이고 결혼할 때는 꽃가마가 나가는 공간이죠. 사람이 죽으면 상여가 나가는 곳입니다. 마을사람들과 모여서 회의하고 소통하고 가족하고 어울릴 수 있는 곳이지요. 장단도 4박자 안에 쉼표가 있습니다.

끌었다가 금세 당겼다 하는 리듬이 살아 있어요. 자유로운 공간입니다. 그러다 보니 증흥적인 대사도 많아요. 관객에 의해 상황이 변하면 대사도 변하게 됩니다. 구성대로 짜여 지지 않고 때와 장소에 따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잘 놀려면 마당극의 본질을 이해해야 합니다. 작품을 다 이해하지 못하면 쉽게 놀이도 풀리지 않아요.”

그는 지금 새로운 마당놀이를 꿈꾼다. 오랜 시간을 지켜왔는데 이것을 그냥 사라지도록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다. 젊은 마당놀이 꾼들을 다시 만들어 새로운 21세기 마당놀이를 하고 싶다. 정체성과 독창성이 함께 몸을 섞은 연희는 마당놀이뿐이다.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다. 한국적 전통을 몸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그는 교수가 되었다.

“학교에서 저보다도 훨씬 능력 있는 제자들도 많이 봐요. 그 제자들과 마당놀이 또 다른 30년을 준비하고 출발시키기 제가 지금 사는 이유예요.”

그는 늘 마당에서 호흡을 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도울 수 있고, 장기간 동안 울고 웃는 호흡, 서로 눈빛만 마주쳐도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는 그런 호흡이다.

대동문화 79호 [2013 11,12월호]

한경숙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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