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나 때문에 웃는다는 것, 굉장한 전율이다!

“포기하면 후회할 것 같아요. 그때까지만 해볼게요.”

개그맨 장기영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첫 개그맨 시험을 보기 전까진 확실한 꿈을 가지고 살지 않았던 것 같다. 한마디로 생각 없이 살았다는 소리다. 생각 없이 살아서인지 어릴 적부터 자주 듣던 소리중 하나가 ‘니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냐?’였다. 내 머리 속에 뭐가 들어있었는지 몰랐던 어릴 적 이야기다.

그렇게 생각 없이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남들이 대학을 간다고 하면 그냥 대학에 가고 남들이 뭐 한다 하면 뭐 하고…. 그런 대충의 흐름 속에 묻혀 살아가다 군대를 갔다.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평소 친분이 있던 사장님 일을 도와주러 서울에 올라와 몇 개월 지내고 있을 때였다. TV에서 MBC 개그맨 공채 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장소는 여의도다. 그때 당시 내가 서울에 머물던 곳은 서대문이었다.

‘어? 지하철 다섯 정거장 지나면, 개그맨 시험을 볼 수 있다고?’ 사람 웃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개그맨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어렸을 때 생각해 본적은 있었지만 실천하기까지 쉬운 일이 아니라고만 생각했었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하철 다섯 정거장이면 경험해 볼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그래 한번 재미 삼아 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마음 맞는 대학 친구 한 명과 난생 처음 개그맨 시험을 보게 되었다. 한번 재미 삼아 본 MBC 개그맨 시험이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 느낀 신선한 충격이었다.

메마른 사막 낙타에게 물을 주고 싶다

작정하고 웃기러 온 사람 앞에 그냥 무표정하게 쏘아보기만 하는 심사위원들이 내 앞에 앉아 있었다. 물론 웃기지 않아서 혹은 내가 웃기지 못해서 웃지 않았겠지만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떨리고 긴장된 순간이었다. 어느 심사위원의 한 마디가 아직까지 선명하다. “됐고, 개인기 있어요?” 개인기 준비를 소홀했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무작정 호기심으로만 왔던 이 공간과 시간이 낯설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여덟 개라, 저팔계셔~”라는 어쭙잖은 성대모사를 했고 심사위원들은 아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예상한 대로였다. 그런데 얼굴이 빨개져서 터지기 직전, 웃고 있는 여자작가가 보였다. 마른 사막에서 낙타를 발견한 듯 그분을 바라보았다. ‘어? 웃었어!’ 생전 처음 느껴보는 신비한 기분이었다. 평소에 주위 사람 웃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준비한 카드에 누군가가 웃는 것을 경험하는 것. 나에게는 굉장한 전율이다.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걸 안 한다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부터 다른 거 다 접고 개그맨의 꿈을 향해 달렸다.

개그맨의 꿈을 안고 달리다가 공채 시험도 몇 번 더 떨어지고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어느 날 어머니와 형 그리고 할머니께서 공연을 한번 보러 오셨다. 그때 전체 200석 규모의 객석에 관람을 온 관객은 가족까지 합해 단 8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초라한 공연이 끝나고 어머니는 조용히 무대 뒤로 와서 나에게 한마디 말만 하셨다. “이거 언제까지 할 거니?” 어머니의 음성은 부드러웠으나 건조했다. 가족들이 어떤 생각으로 나를 걱정하는 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나다.

“내 머릿속에 뭐가 있긴 있는데 이거 아직 다 못 꺼내본 것 같아요. 그냥 포기하면 진짜 후회 많이 할 것 같아요. 그때까지만 해볼게요.” 어머니와 가족들은 내 짧은 몇 마디에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움츠리고 있는 나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관객을 만족시키는 삶, 웃겨야 산다

가족의 따뜻한 힘이었다. 그 뒤로 나는 ‘워워워’라는 코너로 개콘(개그 콘서트) 감독님께 발탁되었고 KBS 공채가 되기도 전에 개그 콘서트에 데뷔하고 신인상 후보에도 올랐다. 어머니도 굉장히 좋아하셨다. 그 후년에 공채 시험도 합격하고 요즘은 조금 미미하긴 하나 개그맨으로서 당당하게 개그 콘서트에서 ‘불편한 진실’ 코너를 맡는 등 여러 활동을 하고 있다.

개그맨이 되거나 연예인이 되었을 때 흔히들 즐거운 상상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인기가 많아져 좋으면서도 귀찮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흐뭇한 상상. 나 역시 그랬다. ‘워워워’라는 코너로 그럴싸하게 데뷔를 하고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그 때문에 길을 다니면 사람들이 날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건을 벗고 수염을 지우니 전혀 못 알아본다. 결국 나는 그대로고, 캐릭터만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참 씁쓸한 개그맨이었다.

모든 관객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좀더 가까운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삶을 위해 달리고 있다. 내 머릿속의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 그 일은 참 재미있다. 하지만 그것을 깎고 다듬고, 좀더 사회적으로 순화시키고,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틀을 짜고, 고치고, 캐릭터를 만들고, 연기로 표현하는 일. 이게 진짜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머릿속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일보다 개그맨들이 끝임 없이 생각해낸 것들을 더 잘 표현하는 사람이 개그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폭을 넓혀 가느냐. 자기가 할 수 있는 연기만 죽어라 파느냐.

하지만 개그의 정답은 없다. 연기 폭이 좁아도 자기 스타일대로 밀어붙이거나 연기를 잘하거나 결국 웃기면 된다. 대부분 이렇게 했을 때 관객들이 많이 웃는다고 생각할 뿐, 어디서 어떻게 웃을지 완벽하게 아는 개그맨은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께서도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개그를 본다면 좀더 다른 시각에서 개그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아직 내 머릿속에 무언가가 남아있으니 그것을 펼쳐 보일 때까지는 좀더 기다려 주었으면 한다.

[대동문화 69호, 2012년 5.6월호]

장기영 개그맨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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