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책을 펼친다. 그가 걸어온 패션 외길이 생생하다. <이상봉의 패션 이즈 패션(Fashion is Passion)>, 지난해 봄 (주)민음인에서 출간된 이 책은 한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30년 한길을 걸어온 이상봉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패션 철학과 열정, 디자이너로서 의미 있는 경험담들이 담겼다.

디자이너 이상봉의 이름 앞에 항상 놓이는 수식은 ‘한글 패션’이다. 그는 한국의 전통을 패션에 반영해 왔다. 1985년 ‘이상봉 부티크’를 연 다음부터 계속된 이 작업은 2006년 패션에 한글을 입힌 작업을 파리에서 공개하며 정점에 닿았다. 그는 ‘한글 패션 디자이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특별했던 과정들이 <이상봉의 패션 이즈 패션(Fashion is Passion)>에는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의 패션 철학도 엿볼 수 있다.

한국의 디자인을 세계에 알린 ‘한글 패션 철학’

대학 시절, 그에겐 지금과 다른 길이 놓여 있었다. 연극 속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봤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형편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여전히 연극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한때 목숨처럼 여겼던 연극을 버리고 패션을 택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그의 패션에는 한국적 철학이 놓여 있다. 그는 앙드레 김의 뒤를 잇는 한국 패션 디자인 2세대를 대표한다. 앙드레 김이 한국의 디자인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면 이상봉은 한국의 디자인을 세계에 각인시킨 사람이다. 그는 한글과 조각보, 태극 문양 등 가장 한국적인 것들을 디자인 재료로 들여왔다. 세계는 그의 작업을 통해 한국적인 디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그의 패션은 자유롭다. 그는 말한다. “끊임없이 비우고, 다시 채워야 한다.”고…. 패션 디자이너로 살아온 33년 동안 그는 늘 새로운 시도를 작업에 접목시켰다. 테크노아트에서 샤머니즘을 거쳐 한글, 단청, 조각보로 이어지는 그의 작업은 한국의 전통 미학을 패션에 덧대는 실험이었다. 디자이너에게는 고정된 틀이 없다. 디자이너는 바람이고 물이다. 바람처럼 한 디자인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물처럼 그릇의 모양에 따라 형체를 자유롭게 변화시켜야 한다. 이상봉에게는 고정된 스타일이 없다.

“저는 언제나 37세예요. 37세 때 더 이상 나이를 먹으면 안 되겠다 싶어, 디자이너로서 은퇴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37세에 머물기로 결심했죠. 37세는 3과 7이 만나서 이루어지는데, 합하면 0, 제로가 돼요. 늘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비어있는 상태로 살고 싶은 마음이에요. 사물이 생성되면서 동시에 소멸되는 이 0의 지점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죠.”

사람이 어느 순간 그리워진다

지금 그는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바쁜 일정 속에서 조금은 자유로운 시간에 그를 만났다. 누구나 일로 연결되지 않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이 좋을 때가 있다. 자신에 세계에서 옆을 볼 수 있는 시간인 거다. 그는 에너지가 많고 스스로를 잘 지키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프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아프다고 말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웬만하면 제 스스로가 아프지 않아요. 그런데 연말되기 전 많이 힘들었어요. 몸도 제 말을 듣지 않더라구요. 작년 9월에 이어서 10월 달만 해서 5개 쇼를 했어요. 그리고 단체를 맡고 있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요. 늘 그랬던 것 같아요. 언제나 넘어간 해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어요. 올해 시작인데 또 다시 그렇게 말 할걸요. 가장 힘들었다고….”

그렇게 사람이 바쁠 때는 사람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그리워진다.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에 그리워진다. 그래서 그는 얼마 전 혼자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이유는 그냥 ‘힘들어서’였다.

“아, 내가 힘들구나 하니 눈물이 났어요. 한두 시간 울고 나니 시원했어요. 일단 내가 부족한 것 때문에 힘들었고, 조금 더 현명하거나 똑똑하거나 능력이 있었으면 조금 더 많은 사람이 행복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컸습니다.”

제대로 사는 건가? 하고 자신에게 반문을 던졌다. 뭔가 잘못된 건가? 하는 두려움도 컸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온 것일 거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더 이상 다그치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삶이었다.

우리 문화와 한글을 패션으로 알리고 싶어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일과 자기 생각에 몰두하는 동안은 옆을 보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한다. 그도 그렇게 살아왔고 그의 생각이나 일에 대해 지적을 받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단체를 끌고 간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자기만 봐서는 단체를 겨냥할 수 없다. 단체 안에서는 소통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내 생각도 중요하지만 남의 생각도 중요하잖아요. 모든 게 다르지만 패션이라는 분모를 위해서는 나름대로 들어야 되는 개념이 많아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함께 소통하는 것도 세상을 배우는 재미인 거 같습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웬만하면 같이 하려고 하는 그다. 우리 문화를 알리는 일, 한글을 알리는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동참하다보니 그런 일 저런 일들이 많이 생긴다. “저처럼 내 멋대로 살던 사람이 어느 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모험입니다. 늘 내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 편이라 더 힘들었어요. 그래도 한국적인 것들을 패션에 반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늘 행복했죠.”

그에게 전통은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고리다. 전통이 유지되지 않고 현대로 건너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의미한다. “전통 안에는 긴 시간이 쌓여있고, 그래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통을 현재 문화에 맞추려면 약간의 파괴도 필요하고, 현대적인 것과의 결합도 있어야 하지만 계승 차원에서 옛날의 방법들이 나름대로 유지는 되어야 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관계 속에서 그에게 전이돼 쌓인 전문 지식도 늘어났다. 그는 말한다. “지금 저 이상봉은 저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저를 많이 도와준 분들이 옆에서 저를 만든 거죠. 저 혼자였다면 이렇게 될 수가 없죠. 늘 주변의 조언과 격려가 힘이 됐고, 질책도 역시 저를 일으키는 힘이었어요.” 이상봉, 그에게는 늘 사람 냄새가 난다.

대동문화 80호 [2014 1,2월호]

한경숙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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