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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공적은 그가 관을 덮을 때 안다역사 나그네-새우젓 장사 제사비
광주에 새우젓 장사를 기억하는 제사비도 있다
김정호 광주향토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6.06.29 18:19

국내에는 3천5백개소의 석물업자가 있다. 돌에 기록하는 것이 어떤 기록보다 오래 남을 수 있어서 옛날 사람의 기록 방법으로 쓰였고, 오늘날도 이 분야 사업은 각광을 받기 때문이다. 역사 유적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도 비석이다.

근래에는 비석을 만드는 작업이 기계화되어 큰 품이 들지 않아서 비용이 적게 드는 탓인지 으레 묘지에는 비석이 필수품이 되어 있고 공적을 칭찬하는 데도 비석만큼 생색나는 방법이 드물다.

자기 공적을 자기가 적어서 세운 비

옛 비석 중에는 공적비가 가장 많지만 그 중에는 의로운 개를 기리는 비도 있고 경북 선산에 가면 소를 기념하는 비도 있다. 효자나 열부에게 주는 정려비 또는 높은 벼슬을 지낸 분들의 신도비 등은 역사 유적을 살피는 데 도움을 주지만 특히 공덕비나 선정비 따위는 재임 중이거나 생존해 있을 때 세운 비가 특히 많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향교나 옛 군청 관아 뒤뜰에 세워진 비들이 대개 이 부류에 속한다. 근래에도 일부 인사들은 그가 재직했던 고을을 떠날 때 주민들이 추렴해주는 전별금을 공적비나 선정비로 대신해줄 것을 요구해 그가 근무한 고을마다 선정비가 세워진 경우를 볼 수 있다.

사람의 평가는 죽어서 관을 덮을 때라야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어떤 고을에 가면 그가 그 고을을 떠날 때 세운 공적과는 달리 이임 후 횡령 사건으로 파직 당한 경우도 있고 역사 기록에 악덕을 행한 인물로 기록된 사람도 발견하게 된다.

근래 빈축을 사는 비석은 옛날에는 당상관 이상의 벼슬아치가 아니면 세울 수 없던 거대한 비를 세워 선조를 기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하기야 세상이 바뀐 왕조 시대도 아닌데 조선 왕조 시대의 제도로 비의 형식이나 크기를 비판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이처럼 별의별 비석들이 세워지고 있는데 광주 포충사 경내에는 전쟁에서 주인과 함께 싸우다 죽은 노비의 비가 있다. 근래 필자는 광주 역사 산책을 하느라 금호동 병천사(秉天祠) 뜰에서 희한한 비를 발견했다.

새우젓 장사 모자를 기억하는 비

병천사는 1927년 지응현(1868∼1957) 씨가 세운 사우로 79년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우의 주차장에는 지 씨가 1918년 전후 광주 지역 소작인들에게 베푼 선행을 기리는 공덕비 10여기가 있고 한쪽에 ‘제세하상모자비’가 있다.

이 비의 뒷면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지씨가 담양 대전면 중옥리에서 살 때 그의 집에 유숙한 새우젓장사 모자가 새우젓 8말, 백미 닷 되, 면화 다섯 근을 두고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아 이를 팔아 1말 닷 되직이 땅을 사서 모자가 집을 나간 10월 15일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므로 이 사실을 잊지 않도록 이 비를 세우는 것이라는 경위이다.

재미난 것은 이 비를 세운 내용이 1918년 6월 26일자 매일신보에 2단 기사로 보도되었다. 일설에는 지응현 씨가 광주 3대 지주가 된 것은 이 새우젓 8말이 밑천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비는 중옥리에서 병천사로 옮겨졌고 제사는 중지된 듯하다.

이런 사실을 세상에 소문내지 않고 말아도 될 일이었지만 이 같은 사실을 비문으로 남긴 것은 특이한 일이다. 지응현 씨의 부인 김계(1868∼1964) 할머니는 이 같은 이적이 모두 문수보살의 현신 때문이라면서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 일제 중기에 폐허가 되었던 무등산 원효사의 십왕전과 칠성각을 짓도록 시주했다.

또 6·25때 원효사가 불타버리자 다시 돈을 내 중수 사업을 벌여 그 공적비 3기가 원효사 경내에 남아 있다.

일제시대 지주들이 한결같이 높은 소작료를 받았던 악덕 지주로 지탄을 받는 터이지만 지응현 씨의 선덕비나 공덕비가 17기에 달하는 것을 보면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았던 듯하다.

문제는 지씨가 생존해 있을 때 세운 비들이다. 본인이 금석문을 사양하지 않았던 험결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려웠던 소작인들 입장에서는 이문도 있어서 비를 세웠을 것이지만 그 당시의 비 값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지응현 씨는 광주에서 최초로 민간인으로 응세농도학원을 세워 덴마크의 그룬트비히(1783∼1872)가 일으켰던 농촌 부흥 운동을 시도한 점 등을 보면 지주이면서도 보통 지주들과 달랐던 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손자 두 명이 국회의원을 지냈고 증손자도 국회의원을 지냈으므로 이름 없이 사라진 광주 일제 시기의 부자들 중에서는 기억할 만한 인물이었다.

대동문화 81호 [2014 3,4월호]

김정호 광주향토문화연구소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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