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남쪽을 일컫는 ‘남도’는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는 지역이다. 산과 들, 바다와 섬이 자연을 닮아보려는 시인묵객들의 노래와 그림 속에 펼쳐진다. 예나 지금이나 화가들은 자연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한다. 눈앞에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붓과 물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화려한 색채와 붓끝 리듬을 살려 흔히 말하는 ‘한 폭의 산수화’를 펼쳐낸다.

산수를 이루는 것 중에서 ‘나무(木)’는 화가들이 가장 즐겨 다루는 소재다. 산수도와 풍경화에 나무가 들어가지 않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그만큼 화가들에게 있어 나무는 자연 대상물 중 미적인 의미부여 차원에서 아주 매력적인 대상인 것이다. 한번도 나무를 그려보지 않은 화가는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 이후 문인 사대부로 지칭되는 우리 조상들이 남긴 ‘산수화’에도 나무는 반드시 그려졌다. 화면 전체의 구도를 잡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제에 따른 화가의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매체로 나무는 등장했다. 특히 산수화와 문인화가 유행했던 시기를 지나며 소나무(松)와 대나무(竹), 매화(梅花)는 가장 다양하게 그려진 소재였다.

소나무는 우리 산천에 가장 많이 자생하는 나무이기도 하지만 예부터 불로장생을 뜻하는 ‘십장생’의 하나였다. 가장 오래 사는 나무의 하나로 꼽혔고 그래서 선인들의 삶 속에 깊숙하고 친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소나무는 또 푸르름을 간직한 강인한 품성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무 중의 나무로 소나무를 쳤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은 시대정신의 표상

조선 초기 문인 사부대로 학자이자 호남 최초의 화가로 불리는 학포 양팽손(1488~1545)의 ‘산수도’에도 노송들이 들어앉아 있다. 무엇보다 우리 미술사에서 양팽손의 활약은 호남 미술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평가되고 있어 그 의미는 남다르다. 그는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된 조광조를 추앙하며 전남 화순에 학포당을 짓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하였다.

한국적 산수화풍을 일궜다는 평가를 받는 화가 안견의 산수화풍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려진 양팽손의 ‘산수도’는 강변 기암절벽 위에 뿌리 내린 소나무 무리를 화면 중심에 놓고 산수화의 전형적 구도를 이룬 작품이다. 화면 하단에 낮게 지붕들이 보이고 화면 중단 좌측으로 불끈 솟아 오른 암벽 위로 노송들이 줄지어 서 있다. 바로 오른편으로 낭떠러지 아래로 강이 흐르고 작은 배 한척이 가로로 드리워져 있다.

또한 화면 원경 암벽에 역시 노송 두 세 그루가 서 있어 중심부의 원근감을 만들어 입체적 산세와 공간의 감흥을 자아낸다. 이 소나무들은 ‘살아남은 자’, 조광조와 함께 죽지 못하여 세상에 남겨진 자신과 신진 사림파 충신들로 해석될 수 있다.

양팽손의 또다른 수작 ‘절죽도’(浙竹圖)는 광풍이 부는 세상에서 동지들과 함께 죽지 못한 아픔과 시대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두 그루의 대나무를 화면 한 가운데 병립하여 그렸다. 하지만 대나무의 상단부는 부러지고 없다. 곧고 둥근 수직의 원통과 매듭을 통해 강단 있고 유연한 이미지로 다가 와야 할 대나부의 상단부가 부러져 실타래 같은 아픈 흔적만 남았다.

이처럼 ‘부러진 대나무’를 통해 양팽손은 신뢰와 절개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드러낸 것이다. ‘부러질지언정 결코 굽히지는 않는다.’는 강인한 선비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하겠다.

충절과 의리를 전달한 편지 그림, 세한도

나무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린다. 스스로 자리를 바꿔 더 높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비와 눈과 바람과 햇빛을 견딘다. 줄기를 뻗고 가지를 내밀며 잎과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나무는 ‘변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 충절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를 보자. ‘추운 시절의 그림’이란 뜻을 가진 이 그림은 김정희가 제주도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자신과 제자 우선 이상적(1804~1865)의 입장과 처지를 소나무와 잣나무를 통해 표현한 작품이다.

그런데 세한도는 그림이라기보다 ‘편지’로 보는 편이 옳다. 그래서 세한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그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그림에는 황량한 겨울날에 작은 집 한 채를 가운데 두고 좌측에 잣나무 두 그루, 우측에 소나무 두 그루를 그린 것이 전부다.

여기에 등장하는 소나무와 잣나무는 상록수다. ‘항상 그대로’, ‘늘 푸른’, 즉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그림 속 소나무와 잣나무가 갖는 의미는 공자의 말에서 기인한다.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한 말에서다.

계절이 바뀌어도 항상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상록수, 즉 세상 풍파가 몰아쳐도 절개와 지조를 지킨 인물임을 뜻한다. 그 인물은 곧 김정희 본인이자 제자 이상적이다.

비록 귀양살이를 하지만 김정희 자신은 여전히 왕과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의 마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죄인이 된 스승이지만 존경심을 잃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사제지간의 마음을 전한 편지인 셈이다.

남도 자연에서 뽑아낸 시적 서정성

조선 후기 해남에 ‘녹우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인사대부 집안의 화업 일가를 이룬 공재 윤두서(1668~1715)는 풍속화와 문인화에 능했다. 강렬한 메시지와 이미지를 갖춘 ‘자화상’에서 보여준 것처럼 윤두서의 작품은 사실적이고 뚜렷한 상황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품 경향을 보인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 관념 산수의 화풍을 벗어나 삶 속 현실의 풍속과 인물들의 표정을 강조하여 시대정신을 표현하였다. 여기에 산수화의 근간을 이으며 자연의 서정적 분위기를 더하여 자신만의 화격을 이룬 것이다.

윤두서의 화첩에 담긴 작품 ‘조어’(釣魚)는 조선 중기 절파화풍을 풍기지만 감정을 배제한 차분한 서정이 엿보이는 산수화이다.

일반적으로 산수화는 산과 물이 있는 자연풍광을 통해 화가의 이상을 표현한다. ‘조어’는 근경과 원경의 적정한 배치로 화면을 분할하고 있다. 화면 중하단부가 전경을 이루고 중상부는 원경으로 멀리 산세를 간결하게 드리워 놓아 공간감과 거리감을 준다.

전체적으로 산보다는 물과 나무에 초점을 두었다. 화면 상단에서 중단 좌측으로 흘러 우측 하단으로 꺾이는 넓은 강폭을 근경에 펼쳐 화면 가득 부각시키는 구도이다. 물의 흐름은 대각선이 교차하여 S자 구도를 완만하게 이루고 있어 시야를 툭 트이게 해준다.

화면 우측 중단부에 강조한 나무는 이 작품의 전체를 지배하는 대상이다. 특히 강변 둔중한 기암절벽 중간에 뿌리를 두고 선 나무는 보는 이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기도록 강조하였다. 초여름 무성한 가지와 잎사귀에서 보듯 자연의 계절감과 생명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그림의 주제는 낚시하는 자연인의 모습이다. 평온한 강물에 배를 띄워 낚싯대를 드리우고 물표면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는 낚시꾼, 즉 화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이 그림이 빼어난 것은 화면의 구도 내 배치, 묵점의 농담 등 기법적 탁월함도 흠잡을 데 없지만 주제를 잘 살려낸 서정성이다. 짙푸른 녹색 기운과 생명력을 뿜어내며 상승하듯 뻗어가는 절벽의 나무와 소리 없이 흐르며 평온함을 지켜 가는 강물을 대비시켜 화가의 심경을 표현토록 하는 극적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남종 문인화풍의 전통 계승한 소치 허련

호남 화단의 남종문인화의 꽃을 활짝 피운 화가는 소치 허련(1808~1893)을 꼽는다. 허균의 후손으로 진도에 운림산방을 세워 화업을 일궜다. 추사 김정희가 추구한 남종 문인화풍을 계승 발전 시켜 법통을 이은 문인화가로 평가받는다.

녹우당에서 윤두서의 그림과 화보를 통해 그림을 익히고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알려진다. 그의 대표작 ‘산수’(山水)와 ‘소림모정(疏林茅亭)’은 농묵 위주에 건필이 구사된 거친 필치와 완숙한 화면구성의 화풍을 보여준다. 추사의 작품을 따르려는 가칠한 마른 필치에 적묵법을 구사한다.

‘산수’와 ‘소림모정’ 등의 작품에서 구도상 화면 중심에 나무숲을 놓고 전체적인 화면 구성을 풀어 나갔다. 당대의 화풍을 반영하는 마르고 거친 붓놀림으로 산수화 정신을 실리고 있다. 특히 ‘산수’의 화제는 중국 명나라 학자이자 화가인 당인(唐寅)의 시를 받아 그림으로 풀어냈다. ‘소림모정’은 명나라 동기창의 화지를 초록한 내용을 다뤄 그림과 함께 담았다.

의재 허백련(1891~1977)은 남도의 산수를 완성하였다고 할 만큼 품격 있는 작품을 남겼다. 그의 산수화 중 ‘추경산수’(秋景山水)는 남종 산수화의 전형으로 가을 소나무의 멋들어진 풍광을 예찬한 시제를 해석한 작품이다.

화면 상하를 근경과 원경으로 나누고 대각선 방향으로 원경에 봉우리, 근경에 소나무를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화면 상단 우측에 제시를 써 넣어 그림을 설명한다. 소나무의 까칠한 느낌과 사자등 같은 산세의 치솟음은 허백련만의 산수 특징을 잘 나타낸다. 이 그림에서 소나무는 시의 주제이자 소재로 ‘5월 늦봄의 소나무 아래 모정은 아직 서늘하지만 구름 덮은 나무는 짙푸르다.’는 당나라 시를 회화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호남 최초 서양화가 김홍식의 ‘봄날의 정원’

전남 여수 출신으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동경미술학교에 유학해 호남 최초의 서양화가가 된 김홍식(1897~1964)의 풍경화 ‘봄날의 정원’은 화사한 봄날의 감흥을 담은 작품이다. 벚꽃이 만개한 아틀리에 정원의 아름다운 정경이 우러나는 작품으로 자신의 아틀리에가 자리한 여수 만성리 절골 오른편으로 흐르는 계곡의 수림과 그 사이에 지은 사랑채를 배경으로 약간 내려다본 위치에서 그렸다.

이 그림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의 초점은 초가집과 그 앞에 곧게 선 ‘나무’에 맞춰져 있다. 직립한 나무 앞에는 흰옷을 입은 소녀가 서 있다. 이 작품의 묘미는 가깝고 좁은 시야 내에 들어온 정원 나무숲 속의 원근감과 공간감을 잘 드러낸 점이다.

사랑채와 나무, 소녀보다 앞에 위치한 벚꽃나무는 가지나 줄기, 꽃잎의 형태를 가볍게 처리하고 더 멀리 있는 사랑채와 나무, 소녀를 사실감 있게 그린 것은 공간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사랑채 앞에 선 고목 두 그루를 표현하는 방식은 20세기 유럽화단에서 유행하던 수직 묘법에 영향 받은 흔적이다. 수직으로 곧게 선 두 그루의 고목이 잔가지 없이 숲 속으로 뻗어간 느낌에서 상하로 움직이는 상승감을 줌으로써 화면 전체를 장식한 복잡한 꽃가지와 사랑채 뒤로 자란 잡목들의 어지러움을 억제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자연의 빛과 색채 살린 오지호의 ‘남향집’

전남 화순 동복 출신으로 김홍식 보다 동경미술학교 3년 후배였던 오지호(1905~1982)의 대표작 ‘남향집’은 개성 시절의 작품이다. 초가집을 소재로 화창한 봄날의 집 앞 마당의 풍경을 그린 이 작품은 화면 한 가운데 고목의 조형감을 잘 살려냈다. 근현대기 평범한 가정집의 전형적인 모습의 하나로 집 마당에 선 ‘가목’(家木)을 통해 가정의 행복과 안녕, 소망, 기원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후기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자연채광을 최대한 화면에 살려 나무의 그림자를 청보라색으로 그려 자연의 빛이 만들어낸 외광의 느낌을 살려냈다. 원색의 터치를 태양광선의 변화에 따라 적절히 구사한 색채도 인상주의 화풍을 엿보게 한다.

민중의 삶과 뿌리 담은 손장섭의 ‘신목(神木)’

전남 완도 출신 서양화가 손장섭(1941~)은 우리 민족성과 삶의 근본, 즉 뿌리를 찾는 여정으로 ‘신목’ 시리즈를 선보였다. 그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마을 앞 당산나무를 화폭에 담아내며 한민족의 토속적 삶의 뿌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역사성 짙은 회화 세계로 민중 미술 운동을 견인해온 손장섭은 ‘신목’ 연작을 통해 사람과 마을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온 나무가 겪고 보아온 민주의 역사를 자신만의 시각과 기법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풍경화라기보다 영혼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써 나무를 그렸다.

남도의 농촌 마을 입구에 무성하게 가지를 뻗고 수호신처럼 마을을 지켜주는 거목의 자태와 이미지를 차분하면서도 안정적인 구도로 그린다.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놀이터이자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공간이었고 토속 신앙의 영적 믿음을 깊게 심어준 ‘신목’의 의미와 가치를 예술적 미감으로 살려내고 있다.

남도 화가들의 마음속에 들어온 나무

전남 진도 출신인 박은용(1944~2008)은 한국화의 전통적 기법으로 실경산수와 풍속화에 가까운 서민의 일상적 삶의 풍경을 그렸다. 그가 선보인 작품 속 ‘나무’는 동네 담벼락이나 길가, 마당 한켠에 선 평범한 것들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가축처럼 한 가족의 일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연을 지키며 자연에 순응하며 이 땅을 지켜온 선량한 민초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과 나무의 관계를 들여다보았다.

전남 영암 출신으로 남도민의 서정과 애환을 현장감 있게 그렸던 이강하(1953~2008)의 작품에 나타난 ‘나무’는 신작로 길섶에 둔탁하게 줄을 서 있거나 땅심에 뿌리를 움켜쥐 듯 밀착한 소나무가 춤을 추듯 생동감 있게 표현돼 있다. 이것은 그가 나고 자람 남도땅의 역사와 사상, 미학을 재해석하여 보여준다.

이와 함께 송필용의 ‘노송’, ‘적송’, ‘반송’, ‘해송’ 등은 삶터 주변으로 눈을 돌려 그 속에 살아 숨쉬는 역사와 숨결과 무한대의 생명사랑과 감동을 전달한다.

한희원의 ‘은행나무’와 ‘고목’ 등은 문학적 시심이 발동하는 서정이 흐르고 있으며 고독한 인간의 영혼을 풍성하고 맑게 해주는 자연의 변화를 간결하고 단순화 하여 보여준다.

문인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김영삼 수묵화에서 만나보는 ‘매화’와 ‘대나무’, ‘노송’ 역시 시적인 정취가 풍겨 나오는 동시에 함축된 형상과 여백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감흥을 준다.

위에서와 같이 남도 미술인들에게 나무는 가족이자, 생명이자, 역사이기도 했다. 나무를 한 가족이자 생명의 증거자이자, 역사의 한 맥으로, 때로는 자신을 나무로 여기는 생명 존엄의 표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간절한 원초적 생명과 우주를 자신의 화폭 속에 갈무리해 두었던 것이다. 나무는 언제나 남도 미술인들의 손에서 다시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풍성한 잎으로 튼실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대동문화 83호 [2014 7,8월호]

김옥조 광남일보 편집국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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