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는 죽음이다’.

폴 비릴리오가 자신의 저서 ‘속도와 정치’에서 한 말이다. 20세기 초반에 일찍이 ‘속도’를 화두로 삼았던 급진적 사회학자인 그가 이 명제를 통해 지시하고자 한 바는 아래와 같다.

대중들은 주민도, 사회도 아니다. 행인의 무리일 뿐이다. 혁명의 분견대는 (공장이라는) 생산의 장소가 아니라 거리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취한다. 인위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기를 잠시 멈춘 채 스스로 일종의 동력기(공격 기계), 즉 속도의 발생장치가 되는 때에.(폴 비릴리오, <속도와 정치>, 이재원 옮김, 그린비, 2005, p.49)

인용문에서 보듯, 비릴리오에게 무릇 혁명이란 질주와 방랑, 곧 통제되지 않는 이동으로부터 일어난다. 권력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군중들이 공장에서의 통제된 노동 대신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고 다닐 때, 혁명은 일어난다. 반면 그 자유로운 질주가 ‘이동의 독재’에 의해 조절되고 관리될 때, 혁명은 무산되고 거리는 제도화된다. 이것이 ‘정지는 죽음이다’라는 명제의 첫 번째 함의이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이후 “모든 교통로는 국가의 것이 됐다”(같은 책, p.76)는 것이 또한 비릴리오의 주장이다. 혁명에 일단 성공하자, 속도도 질주도 거리에서의 이주와 방랑도 모두 국가 권력의 것이 되었다. 이후로 허락받지 않은 질주는 용납되지 않는다. 오로지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의해 허락된 질주, 무한 속도의 생산과 파괴만이 권장되는 바, 마샬 버먼은 생산과 파괴의 이 악무한적 리듬을 이름하여 ‘부르주아 모더니티’라고 불렀고 비릴리오 자신은 ‘질주정 사회’라고 불렀다. 스스로 세운 것을 파괴해서라도 생산의 속도를 가속화하기, 이것이 ‘정지는 죽음이다’라는 명제의 두 번째 함의이다.

질주와 운동의 좌절

곧 정지는 혁명의 죽음이다

요컨대 두 가지 의미에서 정지는 죽음이다. 그것이 혁명을 지시할 때, 질주와 운동의 좌절, 곧 정지는 혁명의 죽음이다. 그것이 부르주아 모더니티를 지시할 때, 정지는 생산의 종말, 곧 자본주의의 죽음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속도와 정치’에 관한 저와 같은 양면적 관계를 ‘속도와 예술’에 대해서도, 그리고 다소 유머러스하게 말해 ‘KTX와 한국문학’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듯하다.

발터 벤야민은 어느 글에서 20세기 초 파리의 시민들에게 널리 번졌던 안질에 대해 보고한 바 있다. 그 시기의 안질은 전염에 의한 것이 아니었는데, 날로 근대화되어가던 유럽 최대 도시 파리의 ‘속도’(아케이드, 마차들, 영화, 라디어, 전화)를 시민들의 눈은 견뎌낼 수 없었고, 덕분에 파리의 안과 의사들은 수입이 제법 짭짤했단 요지였다. 생각해 보면 루브르의 벽에 걸린 모나리자를 칸트의 권유에 따라 사심없고 무목적적으로 ‘관조’하는 눈과, 기차를 타고 휙휙 지나가는 바람에 그 형체조차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뭉개진 풍경의 파노라마를 보는 눈이 같을 수는 없다.

근대문명, 속도 가속화

달라진 시각 달라진 예술 낳아

그런 의미에서라면 현대 예술은 바로 그 속도로부터 탄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근대 문명은 일상 모든 분야의 속도를 어마어마하게 가속시켰고, 인간의 지각은 그 속도를 따라 잡아야 했다. 그리고 달라진 지각은 당연히 달라진 예술을 낳는다. 영화와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사진의 스냅숏처럼 찰나를 그리던 인상파 화가들, 인간 신체의 운동 방식을 정교하게 묘사하던 브라크의 입체주의, 일종의 단절 없는 ‘운동’으로서의 의식의 흐름(초현실주의와 조이스, 프루스트, 버지니아 울프 등) 기법들은 그 방증에 해당한다. 그랬으니 속도는 분명 예술에 있어서도 어떤 혁명을 낳았다. 그것은 미학적 혁명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예술에 대해서도 ‘정지는 죽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르주아 모더니티가 예술의 영역인들 그냥 내버려 둘리는 만무해 보인다. 다시 벤야민을 인용하자면, 속도는 예술 작품으로부터 ‘아우라 Aura’를 앗아간다. 작품들이 빨리 이동할 수 있게 된 덕에 그것이 가지고 있던 희소성이 사라진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작품들은 이제 제작과 거의 동시에 아주 빠른 속도로 복제되기 때문에, 원본과 사본의 구별 같은 것은 무의미해진다.

그리하여 원본이 가지고 있던 역사성과 진본성(벤야민은 이것이 아우라의 조건이라고 말한다)은 예술 작품에 대해 구성적인 본질이 되지 못한다. 가령 현대 예술 특유의 일회성(행위예술, 설치예술)을 염두에 둔다면 속도가 어떤 방식으로 전통적인 예술의 존립 방식을 훼손하고 있는지 명백해진다.

부르주아 모더니티는 아마도 이런 현상으로부터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아우라가 사라진 예술을 ‘상품’과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우크의 ‘상품미학’이란 말은 정확이 이런 사태를 지시한다. 상품이 미학화하고, 미학은 상품화한다. 그리고는 전파를 타고, 광케이블을 타고, 혹은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아주 ‘민주적’으로 세계 곳곳에 동시적으로 유통된다. 예술과 상품과 민주주의는 이런 식으로 ‘속도’에 의해 매개된다. 역시 예술 시장에 대해서도 ‘정지는 죽음’인 셈이다.

그런데 KTX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대체로 그럴 것이다. 더 많은 시민들이, 그리고 예술가들이 바빠질 것이고 또 바빠질 태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을지도 모를(남아 있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일단 제쳐두더라도) 소위 ‘지역사회’의 정서 같은 것은 더욱 더 희미해질 것이고, 이 빠른 속도에 적응하느라 지각과 사고와 욕망이 분주해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종종 ‘지역 예술계’라고 표현하곤 하는 어떤 자족적(방어적) 공동체는 빠른 속도로 그 존립 기반을 상실해 가게 될 것이다.

변화에 대한 가치 평가

첫째는 한탄, 둘째는 편입

그런 식의 변화에 대한 가치 평가는 둘로 갈릴 수 있을 듯한데, 첫째는 ‘한탄’이고 둘째는 ‘편입’이다. 한 편에서는 지난날의 순수하고 여유롭던 공동체를 그리워하며 세태를 조소할 것이고, 한 편에서는 속도를 기회삼아 ‘거대 문화도시 서울/고사 직전의 지역문화’라는 한국 특유의 기괴한 이분법을 극복(실은 편입일 테지만)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두 경우 모두 양날의 칼을 쥔 형국이다.

첫째로, 실은 오래 전부터 ‘지역성’이라고 하는 것이 어쩌면 상상의 산물이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며 TV며 기타 다양한 문명의 이기들 탓에 이 좁은 국토에서 ‘지역 고유의 문화’ 같은 말은 고래의 특산물이나 경제적 고려에서 발명된 지역축제들, 혹은 거기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지칭하는 말 이상의 내포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지역 문학’이니 ‘지역 예술’이니 하는 말들도 실상에 있어서는 ‘상상된’ 지역성에 기반한 방어적이고 수세적인 공동체를 지시하는 말들은 아니었는지 자성해 볼 일이다. 그럴 때, 속도에 의해 잠식되어 버린 ‘지역성’에 대한 한탄은 실은 향수이거나 회고에 불과하다.

둘째로, KTX가 가져다 줄 속도의 혜택이 설사 ‘중앙/지역’의 이분법 해소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그 도움이 실로 예술을 위한 것인지 국가의 예술 정책, 혹은 문화 자본의 유통 산업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따져 볼 일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비릴리오는 ‘이동의 국유화’야 말로 혁명(정치적인 것이건 미학적인 것이건)에 대해서는 최대의 적이라고 말한다. KTX가 터놓은 길로 시인들도 화가들도 평론가들도 분주히 서울행을 하게 되겠지만, 실로 그 길은 국가가 닦았고, 최대의 이용자는 문화자본이 될 것이다.

기차는 예술가들만 타는 것이 아니고, 시민들의 ‘편의’가 국가 정책의 대세를 정한다고 하니, ‘광주-대전’ 간 KTX는 이제 곧 확대 개통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광주의 예술계에, 그리고 한국의 예술계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다면적인 자성과 주의가 요구된다는 말이 하고 싶었다. 문학 한답시고 매주 서울과 광주를 왕복하는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

대동문화 85호 [2014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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