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남도를 하나로 묶다

영산강은 전라남도 담양군 용추봉(560미터)에서 발원하여 담양군 봉산면에서 오례강, 증암강과 합류한 후 광주광역시에 들어가는데 이 구간부터 극락강이라 부른다. 광주광역시 송대동에서 황룡강과 합류하고 나주시 금천면 북쪽에서 지석강과 합류한 후 남서쪽으로 흐른다. 이어 나주시와 함평군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영산호를 지나 서해로 흘러든다.

총 길이는 150여 ㎞이고, 유역 면적은 전라남도 총 면적의 약 30%를 차지한다. 강 유역의 충적 평야는 매우 비옥하여 대부분 논으로 이용된다. 담양 평야를 비롯, 광주와 나주, 함평 일대에 넓은 평야를 형성한다. 넓은 평야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남도인들의 밥줄이 된다.

강줄기는 최고의 교통로가 되어 홍어를 비롯한 각종 어류와 소금을 내륙 깊숙이 실어 날랐고, 내륙의 쌀 등이 서남해안 일대로 실려 나갔다. 영산강 유역에서 형성된 문화도 함께였다.

영산강 유역의 기름진 땅은 고대 사회 지배자의 물적 기반이 되어 청동기 시대 족장들의 무덤으로 알려진 고인돌이 강 유역에 축조된다. 그 중 화순 효산리, 대신리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기원 전후의 광주 신창동 유적(사적 제375호)의 출토 유물과 함평 초포리 출토 유물, 화순 대곡리 출토 유물(국보 제 143호), 영암 거푸집(국보 제231호) 등은 고대 문화가 영산강 유역에서 꽃피웠음을 보여준다. 이후 이러한 고대 문화는 대형 옹관고분을 축조한 남도 최초의 정치체인 마한 소국으로 발전된다. 대형 옹관 고분을 남기면서 6세기 중엽까지 독자적인 세력으로 남았던 나주 마한의 중심지 또한 영암 시종면과 나주 반남면, 나주 복암리 일대의 영산강 유역이다.

남도를 하나로 묶었던 영산강은 남도 문화의 발원지며, 중심지가 된다. 그리고 그 문화가 만들어 낸 정체성은 영산강변에 자리 잡은 나주, 광주가 중심이 되어 수 천 년을 이어왔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남도의 중심이 된 나주와 광주

남도 최초의 정치체는 기원전 3세기경의 마한 소국이었다. 마한 54개국 중 남도에 어떤 마한 소국이 어디에 존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6세기 중엽 무렵까지 나주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마한은 환두대도와 금동관을 지닌 강력한 지배세력이었다. 그리고 돌방무덤을 사용하던 백제와는 달리, 대형 옹관을 사용하였다.

이후 잠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지만 곧바로 신라에 병합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 6년(686), 광주에 무진주를 설치하고 15개 시군을 관할한다. 고려 성종 2년(983), 전국을 12목으로 나누면서 남도는 나주목과 승주목의 관할이었다가, 현종 9년(1018)에 전국을 5도 양계로 개편하면서 강남도(지금의 전라북도)와 함께 전라도가 된다.

전주와 나주의 앞 자를 딴 전라도가 드디어 등장한다. 1895년, 전라도는 23부제 실시에 따라 전주부·남원부·나주부 등으로 나뉘었다가, 1896년 13도제 실시로 노령 이남의 땅을 전라남도로 분리하고 광주에 도청을 둔다. 1986년 광주시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되면서, 광주와 전라남도는 행정적으로 분리된다. 그리고 2005년, 전라남도 도청이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로 이전한다.

행정 구역으로 보면 남도와 광주는 1,300여 년 동안 무진주 혹은 나주목, 전라도, 나주부, 전라남도의 지방조직으로 함께였다. 그리고 1,300여 년 동안 광주와 나주는 남도의 중심지였고, 두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남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요, 하나라는 뿌리의식이었다. 그리고 이 의식은 1986년 광주가 광주직할시로 승격된 후에도, 2005년 전남 도청이 무안군 삼향면으로 이전된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하나라는 뿌리 의식은 한때 같은 전라도의 행정구역이었던 전북과는 분명 다른 의식이다.

남도인의 성황신, 무등산

광주, 화순, 담양군에 걸쳐 있는 무등산(1187m)은 예로부터 남도인들의 진산이었고, 남도인들을 지켜주는 성황신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무등산이 남도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산이었는지는 다음 사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나주 출신인 최부(1454~1504)는 1487년 제주도에 추쇄경차관으로 갔다가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뭍으로 나오던 중 폭풍을 만나 중국까지 떠밀려간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겪다 반 년 만에 귀국한다.

이때의 내용을 기록한 책이 <표해록>이다. 이 책에는 폭풍을 겪은 선상에서 수행원들이 쑥덕거리는 말을 우연히 엿듣게 되는 대목이 나온다. 제주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무등산 신사와 금성산 신사에, 제주를 떠나는 사람들은 제주 일원에 있는 여러 신사에 제사를 지냈어야 하는데, 최부가 그렇게 하지 않아 결국 바다의 노여움을 사 낭패를 당했다는 쑥덕거림이었다.

이는 무등산과 금성산(나주)이 당시 남해바다를 관장하고 항해자의 안전을 살피는 수호신이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바다로부터 수십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무등산이 남해 바다의 항로를 관장한다고 믿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남도인들의 이런 믿음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렬왕 7년(1281), 제 2차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앞두고 광주 출신의 동정원수 김주정이 제사를 지냈을 때 무등산 산신만이 세 번이나 방울을 울려 승리를 기원했고, 이를 알게 된 고려 조정에서는 무등산 성황신에게 벼슬을 내린다. 이 이야기는 조선 초기에 씌어진 <동국여지승람>에 전한다. 그런데 이때의 일이 조선시대까지 남도인들의 기억에 남아 최부와 같은 배를 탔던 동승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남도의 진산이 무엇인지 물으면 누구나 무등산이라고 대답한다. 남도인과 무등산은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사이인 셈이다. 남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무등산은 남도 지킴이였고 안식처였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무등산은 광주만이 아닌 남도인 모두의 성황신이다.

경계가 없었던 남도 의병

6,000여의 고경명 의병 부대는, 남도는 하나의 공동체였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1592년 5월 29일 고경명과 두 아들인 종후·인후, 곡성의 유팽로, 남원의 안영·양대박, 광주의 김덕홍, 남평의 최후립·최홍립 형제 등 21개 읍 61명의 사림과 유생이 담양 추성관에서 회합한다. 이 회합에서 고경명은 만장일치로 의병장에 추대된다.

곧이어 추성관에 의병청이 설치되고 총대장 고경명, 좌부장 유팽로, 우부장 양대박, 종사관 안영을 지휘부로 하는 6,000여 명의 호남의병이 결성된다. 그리고 6월 11일, 담양 추성관을 출발한 후 7월 10일 금산 전투에서 고경명 의병장을 비롯 좌부장 유팽로와 종사관 안영, 그리고 고경명의 둘째아들 고인후와 수많은 의병들이 순절한다.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이들은 단지 유팽로, 안영, 고인후 뿐만 아니었다. <호남절의록>에는 고경명과 함께 순절한 20여명의 의병이 더 적혀 있다. 김덕홍, 정귀세, 박언신, 신건, 하정, 김세근(이상 광주), 최응룡·최영수 부자, 최후립·최홍립 형제(이상 나주), 고훈(화순), 강염(장성), 조효원(담양), 박응주(함평), 이인우(영광), 박광조·박광종 형제(무안), 고몽룡(해남), 이억수, 채희연, 양정언(이상 남원), 김봉학(순창), 김신문(정읍), 전용관(옥구) 등이 그들이다. 고경명이 이끈 호남 의병 부대는 이처럼 광주는 물론 나주, 곡성, 장성, 화순, 담양, 영광, 함평, 해남 등 각처의 남도인들이 모여들었고, 심지어는 정읍, 남원, 옥구 등 남도와 인접한 전북 인근에서도 합류하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반발하여 남도에서도 의병이 일어난다. 이 중 장성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의병과 나주를 중심으로 한 이서(吏胥)들의 의병이 가장 두드러졌다. 장성의병은 송사 기우만(1846~1916)을 중심으로 노사 기정진의 문인들인 기삼연·정의림·고광순·김익중 등이 앞장섰다. 기우만은 기정진의 친 손자로,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1896년 1월 인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국모시해와 단발령의 원수를 갚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임금을 모셔오자고 호소한다. 기우만은 2월, 장성부의 향교에서 200여 의병을 편성한 후 나주로 향한다. 나주 의병과 연합하여 단발령에 앞장선 나주관찰부 참서관 안종수를 죽인 후 의병진을 광주향교로 옮긴다.

그가 광주 향교로 의병진을 옮긴 것은 광주가 갖는 지리적 이점과 충의의 고장 때문임을 이유로 내세웠다. 광주 향교로 의병진을 정하자, 광주향교 재임이던 박원영 등 광주의 유림 상당수가 합류한다. 조선 후기 유림들에게도 전남과 광주, 즉 ‘남도는 하나다’라는 의식이 짙게 남아 있었고, 그 중심지는 광주였다.

한말 전국 최대의 의병 항쟁지는 광주였고, 그 최대 격전지는 호남대학교 뒷산인 어등산이다. 어등산이 남도 최대의 격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 나주, 함평을 잇는 지리적인 이점 때문이었다. 또한 3~4개 군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관할 구역이 애매했고, 주위에서 가장 높은 산(338m)이었기 때문에 일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주변 지역을 관측하기에도 용이했다. 그리고 인근 지역과의 연락 면에서도 편리했다.

1908년 4월 25일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23명이 어등산에서 격전 끝에 전사했고, 1909년 1월 10일에는 조경환 의병장 이하 30여 명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을 포함 10명 등 60여 명 이상이 전사한다. 전국 최대 의병 격전지 어등산의 영웅들은 광주 출신인 조경환, 양동환 의병장만은 아니었다. 어등산에서 전사한 김태원 의병장과 그의 동생 김율은 나주 출신이었다.

광주에는 두 분의 의병장을 기리는 동상과 비가 서 있다. 농성광장에 두 눈 부릅뜨고 어등산을 향해 서 있는 김태원 의병장 동상과 광주 공원에 세워진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그것이다. 그런데 두 분은 다 광주 출신이 아닌 나주와 함평 출신이다.

광주 출신인 전국 유일의 부자 의병장인 양진여 의병 부대의 주 전투지는 광주를 비롯하여 인근의 장성, 담양, 창평 등이었고, 아들 양상기 부대의 중심 활동 지역은 광주를 비롯하여 동복, 담양, 장성, 창평이었다. 의병에게 의병진의 참여도 활동 영역도 광주와 남도의 경계는 없었다.

광주공원에 함께 세워진 영랑과 용아 시비

빛의 타워가 들어선 광주 사직공원에는 10여기가 넘는 시비가 세워져 있다. 광주 출신인 김덕령, 박상, 정충신, 김현승, 박봉우 등의 시비만은 아니었다. '어회 버힐시고…'의 장성 출신의 김인후, '풍상이 섞어친 날에…'의 담양 출신 송순, '오우가'의 해남 출신 윤선도, '청초 우거진 골에…'의 나주 출신 임제, '강강술래'의 해남 출신 이동주, '봄비'의 함평 출신 이수복 등은 전남 출신들이다.

충혼탑이 세워진 광주 공원에도 시문학파의 상징 시인인 영랑과 용아의 시비가 나란히 서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영랑 김윤식은 강진 출신이며, '떠나가는 배'의 용아 박용철은 광주 출신이다. 사직공원이나 광주공원의 시비 중 광주와 전남을 벗어난 시인들의 시비는 하나도 없다. 심지어 같은 호남권인 전북 출신도 없다. 이는 광주와 전남 즉 남도는 하나라는 역사적 인식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광주와 전남이 하나라는 인식은 광주의 도로명에도 보인다. 광주에 의재로, 송강로, 죽봉로, 지호로, 면앙로, 하서로 등 도로명이 있다. 이들 도로명의 주인공인 허백련, 정철, 김태원, 오지호, 송순, 김인후 등은 광주 출신이 아닌 진도, 담양, 나주, 화순, 장성 등 남도 출신이다. 남도인으로 광주에 시비가 세워지고 도로명이 된 것은 광주와의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전북 출신은 물론이고 충청, 경상도 출신의 시비도, 거리명도 없다. 광주와의 연관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겠지만,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1986년, 광주시가 광주직할시가 되면서 광주와 전남은 행정구역상 둘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천년 이상을 함께 살아 온 진한 공동체 정신은 임의로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그 하나임의 흔적은 역사 여기저기에 너무 진한 모습으로 묻어 있다.

대동문화 86호 [2015 1,2월호]

노성태 국제고등학교 수석교사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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