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문재(文才)를 타고나는 것도 힘들고, 글 잘 쓰기는 더 힘들다. 감동을 주는 글 남기기 지난하고, 남긴 글이 천년 넘어 이어지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신라 말기의 학자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은 비문 가운데 국문학, 한문학, 불교 사상, 종교학, 역사학에서 자료가 될 만한 이름난 비문, 네 편을 뽑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한다.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터에 있는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국보 제8호),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碑銘-국보 제47호),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는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보물 제138호),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 대숭복사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銘)이 그것이다.

앞의 셋은 낭혜화상과 진감선사, 지증대사 이 세 선사가 신라 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일생 행적을 적은 비문이다. 또 화엄종 왕실 원찰이었던 대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것은 나머지 비문이다.

신라 스님들의 일대기 읽는 즐거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884년) 뒤로부터 왕에게 신라의 개혁안인 시무 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고(894년) 은거하기 이전에 찬술된 것이다. 진감선사비와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직접 글씨까지 썼다. 낭혜화상비는 화상의 종제인 최인연이, 지증대사비는 분황사 승려 혜강이 썼다. 웅혼하다는 감상은 이 글을 읽은 사람마다 느끼는 바다. 유려하고도 힘이 느껴지는 글이다. 인터넷 사이트(db.itkc.or.kr)로도 해석문을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산비명 중에서 2편의 비명에서 차(茶)를 기록한 내용이 나온다. 먼저 ‘진감화상비명’에서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잃지 않았으며, 말도 기교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입는 것은 허름한 옷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거친 음식도 맛있게 여겼으며, 도토리와 콩이 뒤섞인 밥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다. (…) 혹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자가 있으면, 질화로에 잿불을 담아 환(丸)을 만들지도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냄새가 무슨 냄새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마음을 경건히 할 따름이다.” 하였다. 또 중국차를 올리는 자가 있으면, 돌솥에 불을 지피며 가루로 만들지도 않고 달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 하였다. 진성(眞性)을 보지하고, 속정(俗情)을 멀리하는 것이 모두 이런 식이었다.

진감선사 혜소(慧昭, 774~850)의 성품이 검박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차도 맛이 아니라 속기를 털어버린 선기로 대하고 마셨다. 다선(茶禪)의 경지가 그윽하다.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의 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이때 헌안대왕(憲安大王)이 즉위하기 전에 단월(檀越 불교 신도)인 계(季) 서발한(舒發韓) 위흔(魏昕) 김양(金陽)과 함께 남북상(南北相)으로 있었는데, 멀리서 제자의 예(禮)를 행하여 차와 향을 예물로 바치며 매달 거르는 때가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사의 명성이 동국(東國)에 모두 퍼지게 되었으므로, 사류(士流)로서 대사의 산문(山門)을 모르면 한세상의 수치로 여길 정도가 되었다.

헌안왕이 임금에 오르기 전에 제자의 예를 다하여 ‘차’와 ‘향’을 무염에게 예물로 바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무염이 불교 스승으로서 명성이 높았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 비문에도 등장하는 ‘김립지’라는 학자가 쓴 ‘성주사 사적기’에도 ‘성주사 낙성법회가 열릴 때 차와 향을 두 손으로 높이 받들어 올렸다.’는 ‘다향수(茶香手)’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 조사선의 차맥을 신라에 잇다

무염 스님은 누구인가? 신라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던 성주산문을 연 스님이다. 속성은 김씨로 호를 무량(無量), 또는 무주(無住)으로 했다. 설악산 오색석사에서 법성을 스승으로 출가했고, <화엄경>을 배웠다. 821년 당나라로 가서 성남산 지상사에서 배웠고, 마곡 보철에게서 법맥을 이어받았다. 마곡 보철에게서 법을 인가 받은 무염은 20여 년 동안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보살행을 실천해 ‘동방의 대보살’이라고 불렸다.

마곡 보철은 마조 도일의 법을 이은 조사이다. 마조 도일 선사 아래 서당 지장, 백장, 남전 스님과 같은 선사들이 나와 마조의 종풍이 선연했다. 사찰의 각종 의식에 차를 올리도록 한 ‘백장청규’를 남긴 백장 회해 선사도 마조 도일의 제자이고, ‘차 한잔 마시고 가게[끽다거(喫茶巨)]’라는 차 공안으로도 유명한 조주 스님은 남천의 제자이다.

최치원이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에는 신라의 입당 구법승을 귀화승과 귀국승으로 나누고 있다. 귀화한 인물로는 무상, 혜각, 귀국한 인물로는 도의, 홍척, 혜철, 현욱, 혜소, 도윤, 범일, 무염을 거론하고 있다. 이들은 신라 왕자나 왕손들로 불문에 들어 당나라로 구법을 위해 떠났다. 당의 조사들에게서 배우고 인가를 받았다. 조사선과 다선(茶禪)의 정신이 입당 구법승들에게 전해지고, 이것은 이제 신라의 차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845년(문성왕 7) 귀국하여 공주 성주사를 선문구산의 하나인 성주산문의 보난으로 삼고 대중을 교화하였다.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등 여섯 왕이 모두 스님에게 법을 물었고, 제자는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조사선을 신라에 전했으며, 888년 89세로 입적하였다. 성주산 성주사에 세워진 낭혜화상탑비에서 보듯 시호는 대낭혜(大朗慧), 탑호는 백월보광(白月葆光)이다. 국보 제8호인 탑비에 또 무염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낭혜화상이) 또 말하기를, “저 사람이 마신다고 해서 나의 갈증을 풀어 주지 못하며, 저 사람이 먹는다고 해서 나의 굶주림을 구해 주지 못한다. 어찌하여 자기가 직접 마시며 먹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 대개 대사는 자기와 같아도 편들지 않고 자기와 달라도 비난하지 않았으며 조용히 앉아서 기심(機心)을 쉬었으니, 그야말로 누더기 옷을 입은 성자와 비슷했다고 할 것이다.

‘누더기를 입은 성자’가 바로 무염 스님이었다. 교와 선을 모두 놓치지 않았으며, 신분을 떠난 평등한 자비 정신으로 오로지 참선을 말할 뿐, 기심을 쉬었다. 진감국사처럼 차를 마시는 데에도 검박했던 선사였다.

차 마시는 데에도 누구를 편들지 말라

성주사는 원래 ‘오합사’로 백제 시대 건립된 호국 사찰이었다가 백제 멸망 이후에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원찰이 되었다. 이후 건헌창의 난으로 폐사가 되었다가 낭혜무염이 이곳을 성주산문의 중심 사찰로 우뚝 세웠다. 임진왜란 이후 탑비와 석조대좌, 오층석탑, 삼층석탑 3기만이 남겨지게 됐다.

낭혜무염탑비는 보령 특산인 남포 오석에 적은 최치원의 5천 글자가 선명하다. 최치원도 무염 스님도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새로운 통일 신라의 웅혼한 사상사를 꿈꿨다. 그러나 그 평등한 사회에 대한 꿈은 꺾였다. 그러나 그 차향은 최치원의 그 문자향과 무염 스님의 선의 향기와 함께 천년을 흐르고 있다. 그 오랜 시간을 생각하면 저절로 소름이 돋는다.

대동문화 86호 [2015 1,2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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