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 찾거든/ 생오지에 있다고 전해라/ 무등산 뒷자락 오금탱이/ 버스도 오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 질경이 뿌리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깔딱거리고 있다고 전해라/ 질투와 욕심으로 부푼 헛배/ 새벽 공기로 채우며/ 박새와 벗이 되었다고 전해라// 누가 나 기다리거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전해라/ 머리를 하얗게 비우고 나니/ 동서남북조차 분간 못 하고/ 길도 찾을 수 없어/ 그냥 부엉이처럼 부엉부엉 산다고 전해라/ 허명으로 얼룩진 내 이름/ 잊어달라고 전해라 <문순태 ‘나 생오지에 있다’ 전문>

담양 남면에 가면 ‘생오지가’가 있다. 문학의 집이다. 이름처럼 그곳은 생오지다. 단단히 마음을 먹어도 찾아가기 쉽지 않다. 버스는 들어가지 않고, 휴대폰은 통화권 이탈지역이다. 그곳에 사람들이 모인다. 지나는 길 누구라도 와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굳이 문학이 아니더라도 버거운 삶의 짐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다.

2006년부터 그곳을 운영하는 사람은 소설가 문순태(74)이다. 그는 ‘징소리’, ‘철쭉제’, ‘된장’, ‘그들의 새벽’, ‘41년생 소년’ 그리고 ‘타오르는 강’ 등 많은 소설로 세상과 소통했다. 또 순천대 교수와 전남일보 편집국장 등을 거쳐 1996년부터는 광주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난 2006년 8월 16일의 일이다. 그가 정년퇴임 하던 때를 기억한다. ‘후련합니다.’ 이 한마디에서 직장생활과 창작활동을 함께 하느라 지쳐있던 영혼의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머리 아플 때 글을 쓸 수 없어야지…’

“수염도 기르고 싶고 청바지도 입고 싶었어요.” 그의 숨 소리가 깊다. “5·18 이후 딱 5년 쉬고 계속 직장을 다녔어요. 아이 셋 키우면서 내가 특별한 재주가 없잖아요. 부모님이 유산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칠팔십 년대에는 한동안 팔이 아플 정도로 잡문을 썼어요. 시내버스 손잡이를 못 잡을 정도로요. 그때는 펜으로 썼던 시절이라 너무나 팔이 아픈 거예요. 이제 팔이 아파서 글을 못 쓰겠다고 아내에게 말했더니 머리 아플 때 글을 쓸 수 없어야지, 팔이 아파서 글을 못 쓴다는 말은 맞지 않다 했어요. 그래서 명작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하하하….” 그의 시원스러운 웃음이 자유롭다.

닥치는 대로 쓰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직장이었던 신문사와 대학에 재직하면서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문사는 정말 바빴다. 편한 자리가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은 사회부와 정치부 부장을 돌아 결국 편집국장까지 했다. 그래도 소설만은 계속 써왔다. 그 만큼 시간을 잘 활용했다. 퇴근하면 무조건 글을 쓰기 위해 어딘가로 사라졌다. 다시 일상(신문사)으로 돌아오면 절대로 소설은 읽지 않았다. 개인을 위한 책 한 권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 모든 걸 다 걸었다. 곧은 심성이 만든 책임감이 그의 인생을 휘감아 많이 아팠지만 또한 그것이 그를 지켜주는 힘이었다.

광주대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던 시간이 10년이고, 그 시간 동안 23명의 제자를 등단시켰다. 광주의 문단은 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문이 침체돼 있다. 80년 오월의 영향이 적지 않다. 죽음의 시절을 견딘 광주의 문인들은 분노를 곧바로 시의 형태로 표출했다.

산문의 길 위에서 그는 외로웠지만 늘 주변을 살폈다. 산문 쓰는 문단 후배들에게 힘을 보태주고 싶었고, 그 내적 약속을 생오지에서도 지키며 산다. 역으로 생오지에서 그는 시를 쓴다. 생오지에서는 경계가 없다. 모두 함께 어우러진다. 봄날 꽃이 아름다워서 마음이 동행한다. 그래서 해마다 꽃과 시와 음악이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마을 주민들과 함께하는 작은 축제가 됐다. 농민들과 함께 문화를 느끼는 자리다. 문순태의 ‘생오지에 가면’ 모든 문화가 경계를 지우는 것처럼 문이 항상 열려 있다.

오랜 세월 먼 길 돌고 돌아/ 헐벗은 마음 여미고 나 여기 왔다/ 몇 해 만인가/ 이제야 귀천의 길 찾았구나/ 무등산 새끼발가락 언저리/ 깊고 푸른 품에 꼭 안겼으니/ 고단한 내 영혼 쉴 만한 곳 아닌가/ 나무들과 함께 깨어나고/ 풀잎 속에 은둔하듯 누워서/ 바람 부는 대로 흔들다가/ 흔들다가 잠들고 싶은 곳/ 이제 강물 타오를 때까지 유년의 나를 기다리겠네 <「생오지에 누워」전문>

어린 순수시절로의 회귀

돌아보면 문순태의 인생은 참 단출했다. 장기도 바둑도 두지 못한다. 낚시도 해본 적 없고, 자전거도 타지 못한다. 글을 쓰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하지 못한다. 글 쓰는 일이 그저 전부였다.

“한승원 선생의 부인이 대단했어요. 모두 다 접고 서울 올라가 글만 쓰겠다하니 술장사라도 해서 뒷바라지 해주겠다는 말을 했어요. 큰절 하고 싶을 정도로 존경스러웠어요.”

사실 소설은 자투리 시간으로 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몰입하는 강도가 세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면 버티기도 힘든 게 소설쓰기다. 생오지, 그곳에서 이제 그에게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삶의 여유가 생겼다.

“여기 들어와서 새로운 꽃들과 많이 만나요. 며느리밥풀꽃이 있어요. 작년 가을에 처음 본 꽃입니다. 산에 가는 길에 만났는데 빨간 밥풀이 하얗게 뭉친 것처럼 너무나 앙증맞게 이쁜 거예요. 도대체 이 꽃이 뭔가 궁금해 알아봤더니 며느리밥풀꽃이더라고요. 그 꽃에는 전설이 있어요. 아주 가난한 여자아이가 시집을 갔어요. 시어머니 생일날 모처럼 쌀밥을 했죠. 김이 모락모락 날 때 뜸 맛을 봤어요. 그 때 시어머니가 상도 차리기 전에 밥 먹는다고 두들겨 패서 죽고 말았어요. 그 어린 며느리의 빨간 입술에 밥풀이 두개 묻었어요. 그 이듬해 빨간 꽃이 피어났어요. 사람들은 꽃 이름을 며느리밥풀 꽃이라고 지었어요.”

그는 생오지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에게서 이야기를 읽어낸다. 그 소소한 일이 즐겁다. 요즘 그가 가장 즐겨 듣는 이야기는 키우는 닭과 진돗개의 것이다. 닭을 키우면서 많은 것을 배운다. 닭의 모성애가 참으로 놀라웠다. 병아리를 낳아서 어미닭이 새끼를 훈련시키는 걸 보고 있으면 재밌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어미가 먼저 뛰어내리면 새끼들도 뛰어내린다. 어미는 절대 모든 새끼들이 뛰어내리기 전까지는 혼자 자리를 이동하지 않는다.

키운 지 3년 된 진돗개는 주인의 마음을 읽는다. 그가 만져줘야만 밥을 먹는다. 개들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하는지도 이제 조금은 안다. 개들은 아프면 밥을 먹지 않는다. 처음엔 그걸 몰라서 개의 병을 방치했지만 이젠 개의 언어를 이해한다.

“생오지 와서 짐승들과 살다보니 내가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아요. 사람이란 원래 그렇잖아요. 막 태어났을 땐 얼마나 순결한 존재인가요. 때 묻지 않잖아요. 점점 자라면서 온몸에 세속의 때가 생기죠. 늙어지면서 그 때가 벗겨진 사람이 있고 벗겨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시골에 들어와 자연과 함께하면 그 때가 자연스레 벗겨지더라고요. 그래서 원래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랄까? 모든 게 새롭고 아름답습니다.”

이순의 강 건너/ 타는 노을 업고/산길 오른다/ 부끄러운 행적/ 꾹꾹 눌러 밟으며/ 돌아올 수 없는/ 먼 길 떠나듯/ 숨 가쁘게/ 산을 오른다/ 가야 할 길보다/ 걸어온 길이 더욱/ 서러운 나날/ 지금 나는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이승의 마지막 길/ 내려가고 있구나 <「뒷산에 오르며」전문>

그래도 그냥, 그래도 쓴다!

퇴직 후 잠깐은 작가로서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잠시였다. 소설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제 글에 몰두하는 시간이 줄었다. 조금 솔직히 말하자면 나이가 들어가니 힘도 많이 딸린다. 그래도 생오지에 들어와 많은 것을 얻었다. 창작집 2권과 에세이 2권, 시집까지 대여섯 권을 묶어 발표했다.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장편소설 하나를 마무리 하고 있다. ‘소쇄원에서 꿈을 꾸다’이다.

작품 내용을 살짝 엿들었다. 양산보 선생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소쇄원에 구경 왔다가 적잖이 실망하고 돌아간다. 여행하는 사람들이야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양산보 선생의 고뇌와 외로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의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 책은 문순태가 세상에 전하는 소쇄원의 내면이다.

“양산보 선생이 17살쯤에 이곳에 들어와 소쇄원을 만들었잖아요. 완전 세상과 담쌓고, 그 처절한 외로움을 쓰고 싶었어요. 어린 시절 얼마나 세상에 나가고 싶었을까요. 조광조 선생이 살아있었으면 엄청나게 출세했을 사람이거든요. 애제자였기에 권력에 대한 욕망, 그런 걸 다 지우고 혼자 걸었어요.”

정말 이제 나이 들었음을 느낀다. 기억력이 사라지고 있다. 단어들이 어딘가에 막혀 있다. 맞춤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혈압도 올라간다. 세상 보는 안목의 날카로움도 무뎌지고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 끝자락이 오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그냥, 그래도 쓴다.

아직 남은 일이 많다. 단편집 하나도 손질해야 한다. 그러고 마지막 꿈도 있다. 그의 소설들은 전통적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원래 철학과를 다녔는데도 일부러 은유니 알레고리니 이런 것들은 개떡이라 생각했다. 우리 삶의 실제적인 모습을 통해 뭔가 메시지를 전해야 된다는 생각에 일부러 철학적인 것들은 배제했다.

그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존재의 대해 묻고 답하는 그런 소설을 쓴 뒤에 죽고 싶어요. 인간의 존재는 뭘까? 삶은 무엇일까? 이런 걸 묻고 답하는 내용들 말입니다. 그걸 하나 쓸려면 또 엄청난 힘이 들어가는데 그게 가능할지….”

개인적으로 그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도, 해야 할 일도 많아진다. 대면하면 마음이 무겁고, 어떤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만 늘어간다. 그런 마음을 아는 듯 따스한 말을 건넨다. “괜찮다. 모두 같은 인생이고 넘어야 할 산이다. 그렇게 누구나 살아간다”고. 마음이 따뜻했다.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한경숙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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