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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 ‘톡’ 오지게 쏘는 맛…홍탁․삼합이 부른다기획연재Ⅰ-홍어(3)
역사 소용돌이 부대끼며 오랜 노하우로 소비자 발길 유혹
김만선 기자 | 승인 2016.07.12 06:03

제2부 600년 전통 잇는 영산포

역사 상흔 간직한 영산포구

어부는 마음이 급했다. 촌음이라도 아껴 하루빨리 포구에 닿아야 했지만 바람이 자꾸 뱃머리를 짓눌러 제자리걸음만 하게 만들었다.

답답하기는 동무들도 마찬가지였던 듯, 누군가 노라도 저어보자는 의견을 내 몇몇이 머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용을 써봤지만 돛배는 그 때만 잠시 앞으로 나아가는가 싶다가도 다시 맥없이 눌러앉곤 했다.

‘휴우~.’ 어부는 자신도 모르게 날숨이 흘러나왔다. 어부의 속종이라도 보여주듯 숨을 내쉴 때마다 허공에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이내 맥없이 사그라지곤 했다.

어부는 막막한 마음에 짜디짠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그는 곰방대에 연초를 욱여넣고는 불을 당긴다. 포구는 멀지 않았지만 어느덧 또 하루 해가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후우~.’ 어부는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머릿셈을 해본다. 포구에서 먼바다까지 며칠이 걸렸더라, 신통치 않은 어획량 때문에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는 바람에 허비한 시간은 또 며칠이었나…. 거충 계산을 해봐도 집을 떠난 지 벌써 열흘이 훌쩍 넘어 있었다. 어부는 다시 한 번 곰방대를 깊숙이 빨고는 하늘을 원망하듯 바라본다.

어부는 원래 흑산도 사람이었다. 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따라 어부가 됐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이웃 마을 여인과 인연이 닿아 혼례도 할 수 있었고, 아이까지 낳아 자족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하지만 모든 것이 원만하지는 않았다. 수시로 왜구들이 침략해 분탕질을 일삼았고, 어떤 이는 바다에 나가 아예 소식이 끊기기도 했던 것이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나라에서는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피해가 잇따르자

섬 주민들을 내륙으로 집단 이주시키는 공도(空島)정책을 펴게 된다.

이때 흑산도를 비롯한 신안군의 여러 섬들은 나주목 관할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바다와 강을 거슬러 나주 영산포에 이주하게 됐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을 영산현이라 하고 영산현 앞의 강을 영산강이라 불렀으며 뱃길따라 물류가 형성되면서 이를 영산포구라 했다. 영산포라는 이름은 신안 영산도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었다고도 한다.

어부들은 고향 바다를 잊지 못했다. 특히 먼 바다에서 잡아 올려 먹었던 홍어의 ‘찰진(?) 맛’은 더욱 그리웠다.

어부들은 주저없이 바다에 배를 띄웠다. 어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홍어잡이에 나선 것은 홍어에 대한 향수 때문만이 아니다. 홍어는 곡물이나 소금 등 다른 생필품과 교환을 하기 위한 재화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가족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홍어잡이는 이맘 때 어부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어부는 뱃머리에 곰방대를 탕탕 두드리며 재를 비웠다. 어부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이번 출어는 운이 좋았다. 그동안 적지 않게 배를 타고 나갔지만 이번처럼 많은 홍어를 잡은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두어 번은 어획량이라고 입에 담기조차 남새스러울 정도인데다 절반 이상이 수컷이어서 모두 맥이 빠졌었다. 수심이 깊고 뻘이 있는 곳이 홍어 서식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이야 잘 알지만 이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수 십 년 동안 고기를 잡아온 어부들에게도 녹록치 않은 일이었다.

한 번 더 자리를 옮겨보기로 했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겨울 바람이 살품을 파고들수록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질 터였다. 배는 조금 더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왜구와 맞닥뜨릴 일이 걱정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걱정은 일단 묻어둘 일이었다. 그런데 요행인지 천운인지, 이곳에서는 홍어들이 잇따라 올라왔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홍어는 점차 어창을 채워갔고, 고기를 들어올리려 연신 허리를 접어야 하는 어부들에게서는 힘겨운 노동의 신음소리 대신 흥겨운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홍어가 상하기 전에 포구에 닿아 물건을 내놓아야 하는 데 돌아가는 길이 쉽게 열리지 않은 것이다. 5일이면 족히 닿을 수 있는 길이건만 어찌된 일인지 계속 맞바람만 불어 더딘 걸음걸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보시게. 오늘은 마음을 비워야 할랑갑네. 무담시 속태운다고 될 일이 아닌갑시. 내일 동틀 무렵이나 보드라고.”

한 동무가 어부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뱃머리를 강 어귀로 돌렸다. 이미 어둠은 높게 깔려 있고, 달빛에 젖은 강은 이따금 물비늘을 껌벅이며 무관심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칠 뿐이었다. 어부는 까맣도록 멀게만 느껴지는 포구와의 거리처럼 자신의 속도 새카맣게 타는 것을 느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다음날은 바람이 방향을 바꿔 ‘순풍에 돛단 듯’ 포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부들은 배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노를 저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포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부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만선의 소식을 듣고 기뻐할 가족들, 당분간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먹을거리 등을 생각하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는 포구도 길게만 느껴졌다. 그 때였다. 홍어를 살피러 간 동무의 매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워매, 이것이 뭔 일이다냐. 얼른들 와보소. 난리가 나브렀네-.”

삭힌 홍어로 전국적인 명성 얻어

영산포는 영산강 하구인 목포에서 상류로 65㎞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홍어와 영산포의 인연은 6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민왕의 ‘공도정책’에 따라 흑산도 주민들이 나주로 이주했으나 고향의 맛을 잊을 수 없었던 어부들은 보름 이상 걸리는 먼 항해를 통해 홍어를 잡아왔다.

그러나 영산포까지 올라오면서 홍어는 애석하게도 푹 삭아버리고 말았다. 미간이 좁혀지고 코를 막아도 느껴지는 지독한 냄새까지 있었다. 하지만 어부들은 차마 아까운 고기를 버릴 수 없었다. 어쩌다 그대로 먹어보니 의외로 먹을만 했다. 다른 상한 음식처럼 탈이 나지 않는 것도 특이한 일이었다. 삭힌 홍어는 영산포 사람들에게는 점차 보편화된 일반 음식이 됐다. 손암 정약전도 자산어보에서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즐겨 썩힌 홍어를 먹는데 지방에 따라 기호가 다르다’고 썼다. 그 이후 영산포는 점차 삭힌 홍어로 전국의 명성을 얻게 됐다.

영산포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까지 가까이는 신안과 목포, 멀리는 동중국해(동지나해)에서 생선과 젓갈, 소금 등을 실은 배의 왕래가 잦았다. 인천과 군산 등 홍어잡이배도 찾았고 경상도의 고기잡이 배들도 교역을 위해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영산포는 소금과 젓갈을 싣고 들어오는 배와 가마니, 면화, 쌀 등을 싣고 떠나는 배로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에는 바람을 이용한 무동력선이 대부분이었고, 20~30톤 가량 되는 증기선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면서 영산포는 일본인 진출이 가장 활발한 지역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전남의 새로운 경제중심지가 됐다.

1970년대까지 영산포는 영산강 뱃길을 따라 서해안 도서지역에서 포획한 어류와 젓갈류가 모여드는 집산지 역할을 했다.

특히 영산포는 홍어의 최종 소비처였다. 흑산도 인근 도서를 비롯해 멀리 백령도 대청도 근해에서 잡힌 홍어는 영산포로 운반돼 지역민들에게 팔려나갔다. 영산강 뱃길을 따라 올라오면서 삭혀진(숙성된) 홍어는 영산포를 ‘삭힌 홍어’의 본산지이자 소비지로 떠오르게 했다.

삭힌 홍어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돼지고기, 김치와 어우러져 ‘삼합’이라는 개성있는 음식으로 재탄생했으며, 막걸리와 먹는 ‘홍탁’과 함께 영산포 고유의 음식문화로 자리잡게 됐다.

그러나 육로와 철도의 발달은 수운 교통의 침체를 불러왔다. 또한 1972년 영산강 하구언 공사가 시작되고 1976년 완공 이후 영산포는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홍어집산지로서의 명성도 함께 사라졌다.

근대역사의 거리

나주 영산포구가 위치한 영산동 일대는 목포항 개항과 함께 일제 침략의 교두보였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10년 일제는 영산포에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개폐식 목교를 설치하고 1930년대에는 아예 철큰 콘크리트 다리를 설치했다.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연결된 다리는 나주평야의 쌀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탈해가는 수단이 됐다.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이 지어지고 배가 더 이상 드나들지 않게 되자 영산포는 포구로서의 역할을 잃었다.

하지만 아직도 영산포 곳곳에는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영산포 등대(등록문화재 제129호)가 가장 대표적인 시설로, 아픈 역사를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영산포 등대는 1915년 일제가 영산강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다. 이제 배가 드나들지 않아 수위를 측정할 필요는 없지만 내륙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로서 저녁이 되면 여전히 불을 밝힌다.

1914년 건립된 목교는 자료사진을 통해 흔적을 볼 수 있다.

배가 오면 다리를 들어 올려 통행할 수 있도록 한 개폐식 육교로, 영암과 강진, 장흥 등의 지역과 나주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개인회사가 영리를 목적으로 가설해 다리를 지나는 사람에게 통행료를 받았으며, 우마차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신의주와 부산 영도를 포함, 전국에 세 곳만 있었다고 전한다.

등대 바로 옆에는 황포돛배 선착장이 있다. 황포돛배는 면포에 황톳물을 들인 돛을 달고 운항하던 영산강의 주요 운송수단이었다. 지금은 황포돛배와 왕건호가 옛 향수를 자극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홍어의 거리를 따라 걸으면 곧바로 원정통(元町通)이 나온다. 과거에는 영산포구에서 번화했던 동정(東町)과 중정(仲町)을 포함해 원정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목포항이 개항하고 일본 미곡상들이 등장하면서 영산포는 나주평야의 쌀을 실어내가는 포구가 되기도 했다.

일본은 식민지 토지를 수탈하기 위해 만든 동양척식회사 사무실을 1910년에 영산포에 설치했다. 동양척식회사는 영산강변의 기름진 땅을 매입하고 일본 본토 사람들을 이곳에 살도록 적극 유도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영산포에는 많은 일본인 지주나 장사꾼이 들어와 정착하는 계기가 됐고, 조선 노동자들까지 생계를 위해 모여들면서 더욱 번성한 도시가 됐다.

특히 원정통 거리는 일제 강점기 수출입 화물의 집산시장으로 일본을 주대상으로 무역이 이뤄지던 곳이다. 영산포는 미곡 집산지로 도정업이 유명했는데 원정통은 당시 최고의 거리로 옛 건물의 자취가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원정통은 쇠락한 도시로

“그 때는 볼만했제. 황실이배 300여 척이 포구에 들어오면 인력거가 끝이 없을 정도로 줄을 이었어. 그뿐인가, 소가 끄는 수레와 지게를 진 사람도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지. 쌀을 사러 오는 것이었는디 일본의 하루 매상이 2만가마니나 될 정도였당게. 거지도 남에게 얻은 쌀로 배를 곯지 않고 밥을 먹었으니깐.”

“원정통에는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가게도 선술집부터 기생집, 양하점, 미곡상, 정미소 등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즐비했으니까요. 중국인들이 모여 비단을 파는 지역도 있었을 정도였죠.”

원정통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주민들은 한 목소리로 화려한 과거를 떠올렸다.

영산포의 전성기는 1945년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영산강 물줄기가 변하지 않는 한 영산포를 찾는 사람의 발길도 줄지 않았다.

특히 원정통의 경우 나주 봉황과 다도, 세지 등에서 벼를 싣고 옮길 때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요지였고, 인근에 5일장까지 열릴라치면 인산인해를 이뤘다.

하지만 원정통은 1972년 하구언 공사가 시작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길에서 하던 일이 육지로 대체되면서 배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원정통을 찾는 발길도 점차 자취를 감췄다.

거기에다 광주에서 영산포를 잇는 국도 13호선 도로가 개설되는 등 사람들의 이동 경로가 바뀌면서 원정통 상가의 불빛도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영산포 원정통은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촬영지로 적합했던 것이다. 또 1970년대 시골을 무대로 한 드라마 ‘죽도록 사랑해’가 촬영됐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 원정통에 재현된 ‘영산포 극장’에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을 주제로 한 벽화가 한 쪽 면을 채우고 있다. 이 벽화는 2004년 지역공동체 사업으로 완성된 그림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원정통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원정통을 오갔던 수많은 사람들, 그곳에 상점을 내고 넉넉한 삶을 살았던 이들은 과거 속에 존재할 뿐 지금은 곳곳에 위치한 낡은 건물들만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

하지만 근대문화 거리가 모두 죽은 거리가 된 것은 아니다. 나주의 먹을거리로 삭힌 홍어가 유명해지면서 일부나마 홍어의 거리가 조성됐고 다시 활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영산포에 남은 일제 강점기 흔적

영산포 등대가 있는 이창동을 포함해 인근 영산동에는 일본식 건축물들이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나주가 갖고 있는 풍부한 자원과 지역적 이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 대부분이어서 가슴 아픈 증거이기도 하다.

식민지 경제정책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조선식산은행 영산포지점은 나주 영산동 원정통 거리에 남아있었으나, ‘영산포 역사갤러리’로 탈바꿈해 개관을 앞두고 있다.

조선식산은행은 1906년 6월부터 각 지방에서 설립된 6개 농공은행의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 은행이라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농업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인의 직접적인 투자와 경영에 의존하는 대형 개발은행으로 설립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산미증식 계획의 지원과 농업금융 활동에 힘쓰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군수공업화 지원에 주력하기도 했다. 1943년에는 점포를 74개로 확장하는 등 조선총독부 산하 최대의 정책금융기관으로 활동했으나 8·15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자본도입이 소멸되고 극심한 인플레이션 등으로 1954년 한국산업은행으로 재출범했다.

영산동 영산나루에서는 동양척식회사 영산포 지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동양척식회사 영산포 지점은 1910년 2월 출장소로 처음 출발한 뒤 1920년 지점으로 승격됐으며, 1921년에는 목포로 이전됐다. 1910년 7월 궁삼면(영산, 왕곡, 세지, 봉황, 다시 일대) 소재 토지 1만4,552정보와 묘지 1800필지를 경선궁으로부터 8만엔에 강제 매수해 수탈했으며, 1916년에는 쌀 6만50000섬, 보리 2000섬, 목화 1만근을 관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현재 영산나루에는 문서를 보관하던 지상 1층의 붉은 벽돌집과 숙직실 건물만 남았다. 250년 된 팽나무를 중심으로 영산재, 펜션나루재, 음식점 등으로 용도가 변해 손님을 맞고 있다.

강제 수탈 증거이자 독립운동 진원지

영산동에 위치한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은 1935년께 목재와 기와, 벽돌 등 모든 자재를 일본으로부터 들여와 건축했다고 한다.

구로즈미는 전국을 시찰하다가 나주평야를 보고 정착해 1.100여 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됐다. 일본인의 조선 이민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증가했는데 30정보 이상의 땅을 가진 대지주는 영산포에 많았다고 한다. 이들은 조선의 땅을 사들이기도 하고, 고리대금업을 통해 담보 토지를 빼앗는가 하면 영산강 주변의 넓은 땅을 개간한 뒤 전답으로 만들어 소유했다.

나주는 이렇게 일제강점기 수탈의 증거를 고스란히 안고 있지만 동시에 항일학생운동의 근원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시작이 나주역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나주에서 출발한 호남선 열차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한국 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과의 싸움으로 번졌고, 이것이 불씨가 돼 호남지역에서는 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나주항일학생운동기념관에서는 당시 나주 모습은 물론 독립운동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홍어의 거리서 만난 사람들

영산포는 서남해안 대표 항구인 목포보다 더 큰 홍어시장이 열려있다.

현재 영산포구 영산교를 중심으로 40여 판매점이 영업을 하고 있다. 이들 판매점은 식당과 함께 대부분 가공공장도 갖고 있다. 이들 공장에선 20일 이상 홍어를 숙성하고 소비자들이 먹기 편하도록 가공하는 손길들이 분주하다. 손질된 홍어는 곧바로 음식점을 찾은 손님에게 판매되거나 택배발송을 통해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업소는 각기 다르지만 저온창고에서 숙성시키는 방식은 비슷하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겨울은 대개 영상 3도, 여름은 0도 내외에서 15~20일 가량 숙성기간을 갖게 된다.

숙성 과정은 국내산(흑산도)과 수입산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수입산의 경우 처음부터 냉동된 상품으로 가게에 오기 때문에 우선 매일 일정량의 소비 물량을 해동시키게 된다. 이어 홍어 내장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창자를 제거하고 저온창고에서 숙성기간을 갖는다. 이후 주문에 따라 해체(가공) 과정을 거쳐 소비자에게 최종적으로 전달된다.

반면 국내산은 냉동이 아닌 냉장상태로 오기 때문에 해동과정 없이 곧바로 숙성기간을 갖는 것이 차이점이다. 흑산도산이 훨씬 차지고 맛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산포에서 홍어를 판매한 지 20여 년이 됐다는 김영수(48) 영산포홍어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들을 통해 홍어를 삭히는 과정을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맛있게 삭히는지를 잘 알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 영산포 홍어가 유명한 것 같다.”며 “기본 원리를 터득한데다 업소마다 자신들이 터득한 응용을 곁들이는데 ‘숙성 홍어 발원지’라는 자부심 속에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영산포홍어’의 차별성으로 ‘황토방 항아리 숙성’을 꼽는다. 일반적인 숙성방법에 비해 일손은 많이 가지만 홍어의 맛이 청량하고 깔끔하다는 것. 지난 2004년 특허를 냈는데 이곳만의 맛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기본 숙성원리-응용 곁들인 영산포만의 맛

영산포홍어 인근에 자리잡은 ‘금성수산’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이력을 지니고 있는 업소다. 특히 남편 정갑선(77)씨는 나주의 5일시장에서부터 홍어장수를 시작해 무려 60여년의 이력을 지니고 있을 정도다.

아내 김지순(73) 씨는 “나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다.”면서 “숙성이 홍어맛을 좌우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 밤중에도 잠을 자지 않고 지킬 정도로 홍어의 곁을 떠나본 적이 없다.”며 “지금은 호주 시드니와 캐나다 밴쿠버, 두바이 등 해외에 수출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때 홍어의 위기도 있었다. 1997년 영산강 뱃길이 끊긴데 이어 1998년 대홍수로 인해 영산포가 물에 잠기는 사태가 벌어졌고, 1990년에는 불법 중국 저인망 어선들이 몰려오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영산포는 물류유통의 기능을 상실한 채 내리막길을 걸었고 그 자리를 광주 양동시장이 차지하게 됐다. 수십년간 해오던 가게를 떠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칠레, 아르헨티나산 홍어를 들여오면서 다시 숨통이 트이게 됐다. 국내산보다 5~6배나 가격이 낮은 것이 더 매력적이었다. 여기에 수백년 내려온 숙성기술로 맛을 그대로 살려내면서 소비자들의 입맛을 다시 끌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홍어가게가 늘어났고 서울, 부산 등 외지인도 들어왔다.

그 사이 대형할인점과 백화점이 홍어 판매에 동참하면서 어려움이 있지만 혁신도시가 생기면서 또다른 고객이 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김씨는 “흑산도 홍어가 좋지만 아무래도 가격 때문에 수입산을 찾는 손님들이 많다.”면서 “영산포 홍어의 참맛을 느끼신 소비자들은 잊지 않고 꼭 다시 주문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어의 고장 명성 잇는다

2000년대부터 나주시는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영산포 시가지와 건축물을 영산포 근대거리라는 이름으로 조성해 이곳을 관광자원화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영산포 근대 거리 조성사업 중 하나가 흑산홍어와 추자멸치젓배가 왕래한 선창거리를 복원하는 사업이다. 시에서는 일제강점기 형성된 근대적인 시가지와 내륙에 위치한 등대라는 역사적 흔적, 삭힌 홍어의 본고장이라는 상징성을 내세워 영산포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등장한 행사가 ‘영산포 홍어축제’이다. 영산포 홍어축제 이전에는 나주시 주관으로 2000년부터 영산포 홍어·젓갈 축제를 개최했었으나 시민 공감대 부족 등을 이유로 두 번 개최된 후 중단된 바 있다.

중단된 홍어·젓갈 축제는 2007년 ‘영산포 홍어축제’로 부활했다. 홍어축제는 영산포홍어축제위원회가 주관해 치르고 있다. 축제위원회는 각계 대표 등 30여 명으로 구성되며, 실무위원이 축제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간다.

영산포 홍어축제는 지난 2013년까지 모두 9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지난해는 4월25일부터 27일까지 10회 행사를 계획했으나 세월호 참사의 영향으로 취소된 바 있다.

제9회 축제는 2013년 5월 3~5일 나주 영산강 둔치 체육공원에서 열렸다. 행사는 홍어OX퀴즈, 홍어 팔씨름대회, 홍어 예쁘게 썰기, 베스트 홍어커플 선발대회, 홍어 깜짝 경매 등 관광객과 시민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들로 진행됐다. 또 무료 시식코너 운영과 홍어무침 대향연 등 관광객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부대행사로 마련됐다.

제8회 축제는 2012년 4월 20~22일 같은 장소에서 치러졌다. 관람객들은 품바공연, 홍어경매, 영산포 선창 콘서트 등을 즐겼고, 나도 가수다, 홍어 시식왕 선발대회, 홍어 연날리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제7회는 2011년 4월 22~24일 영산포 둔치 체육공원 일원에서 열렸다. ‘영산포 홍어, 전남과 영산강의 희망을 노래하다’를 부제로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렸으며, 홍어시장과 전시관 운영, 전국 등대여행, 유채밭 포토존 등이 함께 진행됐다.

제6회 축제는 ‘알싸한 홍어와 추억과 낭만을’을 슬로건으로 2010년 4월 9·11일 열렸고, 제5회 축제는 4월 10~12일 치러졌다. 영산포 선창 주변을 노랗게 수놓은 유채꽃밭과 어우러져 열린 축제는 홍어와 홍어애국 무료 시식회, 삼합 먹기, 홍어 예쁘게 썰기 등 홍어와 관련된 프로그램들이 다양하게 펼쳐졌다.

이에 앞서 ‘2008 영산포 홍어축제’(4월 25~27일)가 ‘Again 1970 영산포구와 함께 하는 홍어여행’을 슬로건으로, ‘2007영산포 홍어축제’(4월 20~22일) ‘Again 1970 홍어익는 마을’을 슬로건으로 각각 열렸다.

이 중 ‘2007영산포 홍어축제’는 건강걷기대회를 시작으로 품바와 검무공연, 선창음악회 등이 열렸고, 홍어 퀴즈쇼, 홍어 마빡이 경연대회, 홍어장사 선발대회 등이 곁들여져 흥미를 더했다.

식도락거리 조성 등 관광명소화 프로젝트

나주시는 최근 뱃길 복원을 비롯해 근대역사문화유산 정비사업과 ‘식도락(食道樂) 거리’ 조성 등 관광명소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영산포구 등대 바로 옆 황포돛배 선착장도 그 중 하나. 시는 지난 2008년부터 영산포구에서 다시면 나주천연염색문화관까지 5㎞ 구간을 운항하는 황포돛배(24인승) 2척과 왕건호(96인승) 1척을 띄웠다. 50여 분 동안 10㎞에 달하는 강줄기를 오가며 영산강 8경 중 하나인 앙암바위, 미천서원, 임제문학관, 회진마을을 볼 수 있다.시는 또 연간 1만4000여 명이 뱃길을 이용하는 등 반응이 좋아 황포돛배 유람선(가칭 빛가람호)을 추가로 투입키로 했다. 올해 상반기에 운항하는 이 배는 118인승으로, 광주 남구 승촌보에서 나주대교, 영산포구, 회진포구, 죽산보, 영산나루까지 26㎞를 운항한다. 배가 닿는 곳마다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해 역사문화가 흐르는 강으로 가꾼다는 게 시의 계획이다.

일제 수탈의 현장을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사업도 진행 중이다. 일본식 건물인 조선식산은행 영산포지점은 ‘영산포역사갤러리’로 탈바꿈해 개관을 앞두고 있다. 건물 1층은 영산포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2층은 찻집 등으로 꾸민다.

시는 이어 홍어와 근대문화를 함께 체험하는 ‘영산포 식도락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전신주를 지중화하는 등 홍어 거리를 정비하고 포구 자원을 활용해 음식문화거리를 만든다는 방침이다.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김만선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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