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봄 소식이 닿기 전, 언 땅을 밟으며 어렵게 찾은 화순 이서 적벽은 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않았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는 눈부처에 힘을 주고 미간을 좁히며 한 걸음 다가설라치면 곧장 뒷걸음질을 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곤 했다.

박무라도 깔린 듯 희뿌연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가끔씩 얼굴을 내비치던 해는 옅은 솜털구름 기척에도 지레 놀라 꽁지빠지게 내빼기 바빴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는 일. 이미 온 길이 짧지도 않거니와 자주 찾을 수도 없는 길이다.

일반인 통제선을 넘어 비포장 오르막 산길을 따라 차를 움직인다. 사람들의 출입이 많지 않았던 때문인가, 꿩이 지천이다. 어떤 녀석은 고운 깃털을 뽐내며 차의 움직임을 주시하는가 하면 또다른 어떤 녀석은 짧지만 힘찬 날갯짓으로 시야를 가로지르며 비상하기도 한다.

꿩을 만나고, 곳곳에 남은 잔설의 풍경을 감상하느라 지루할 틈 없이 20여 분을 가다보면 좌측으로 시야가 툭 트이며 오랫동안 숨어있던 태고의 비경이 화려하고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결국 적벽은 박무에도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감추지 못했다. 실루엣처럼 드러난 적벽은 도저히 한 컷의 앵글에 담지 못할 정도-.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 웅장하게 솟아오른 기암괴석,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창랑천이 박무와 겹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옹성산 자락 7㎞ 절벽 ‘조선 10경’ 중 하나

이서 적벽은 백아산에서 발원한 동복천이 항아리 형상의 옹성산을 휘돌아 나오면서 이룬 절경으로, '조선 10경' 중 하나로 꼽힌다. 동복천 상류를 따라 이서면 장항리와 보산리, 창랑리 일대를 아우르며 7㎞에 걸쳐져 있다. 장항(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 등 4곳이 있으며, 이 곳이 바로 신선의 세계라는 '적벽동천(赤壁洞天)'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아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적벽이라는 명칭은 조선조 중종 때 기묘사화로 동복에 유배 온 신재 최산두(1483~1536) 선생이 붙인 이름. 붉은색 기암괴석이 소동파가 노래한 중국 양자강의 황주 적벽에 버금간다는 이유에서다. 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도 적벽에 반해 시를 남겼고, 제봉 고경명(1533~1592) 선생도 무등산성을 둘러보고 쓴 '유서석록'에 적벽을 노래하면서 유명해졌다.

적벽에 반한 김삿갓(김병연, 1807~1863)은 무려 13년을 화순에 머물며 수많은 시를 남겼고 동복면 구암에서 생을 마쳤다.

높이가 최대 80여 m에 달한다는 적벽은 댐이 없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지역민이 동복천에 배를 띄우고 물놀이와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은 1980년 동복댐이 세워지면서 장항·보산·물염·창랑 등 15개 마을과 함께 수몰됐다. 이후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1984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됐다. 수몰지역 주민에 한해 설과 추석, 한식 때 성묘나 벌초를 위해 허가해 왔을 뿐이다.

절반 이상이 물 속에 잠겼어도 적벽의 위용은 지금까지 잃지 않고 있다. 위에서 바라다본 적벽의 풍경은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가장 먼저 눈에 잡히는 것은 장항적벽. 산의 형세가 노루(獐)의 목(吭)을 닮았다고 '노루목적벽'으로도 불린다. 거대한 암벽이 하늘로 치솟듯 우뚝 서 있다. 깎아지른 암벽이 일품이다. 깎아지른 절벽의 높이가 50여m 돼 보인다. 물속에 잠긴 것도 35m에 이른다고 한다. 절벽의 폭도 넓어 하늘과 호수 사이에 펼쳐진 화려한 병풍같다. 화순적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

장항적벽 앞에서 정자 하나를 품고 있는 작은 적벽이 보산적벽이다. 장항적벽보다 규모는 작지만 오랜 세월만큼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가 마음을 엄숙하게까지 한다.

여기서는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카메라가 사람의 시야를 따를 수야 없지만 일부의 감흥이라도 담기 위한 욕심으로 셔터를 누른다. 마침 사진 촬영을 돕기 위해 적당한 높이의 시설물도 갖춰져 있다. 이곳은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에 따라 다른 모습의 적벽을 볼 수 있다.

적벽의 감동 배가 되는 망향정․망미정

여기에서 다시 차를 타고 내려가면 보산적벽 위에 이른다. 장항적벽은 이곳에 세워진 망향정(望鄕亭)과 망미정(望美亭), 송석정(松石亭)에서 보면 더욱 감동이다.

먼저 통천문(通天門)을 지나니 망향정이 서 있다. 댐 건설로 물에 잠긴 수몰지역 주민들의 설움을 달래주는 쉼터다.

정자 옆으로는 수몰된 15개 마을의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망향탑과 망배단도 놓여있다. 수몰민들이 명절 때마다 망향제를 지내는 곳이다.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정든 고향을 떠난 주민은 창랑, 월평 등 이서지역 15개 마을 5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적벽의 아름다움을 새긴 적벽동천, 적벽가, 적벽팔경 비도 세워져 있다.

망향정에서 대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니 망미정이 보인다. 장항적벽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망미정은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정지준이 지었다고 한다. 인조가 청태종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해 은둔하면서 비롯됐다.

원래는 적벽을 마주하는 강의 둔덕에 있었으나 동복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으며 '망미정' 현판은 198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직접 쓰기도 했다.

망미정과 5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송석정도 노송과 동복호가 어우러져 적벽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송석정은 숙종 때 광산김씨 31대손 석정처사 한명이 건립한 정자이다. 1880년대에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2003년에 복원했다.

송석정에도 올라 보고, 다시 정자 앞 깊은 물에 발담근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서면 가슴까지 확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서 적벽의 비경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지 30년만인 지난해부터 개방돼 호응을 얻었다.

매주 3회(수, 토, 일요일) 셔틀버스를 운행키로 하고 사전 예약제를 실시했는데 매회 참가 요청자가 끊이지 않았다. 관람 구간은 적벽입구~사진 찍기 좋은 곳∼망향정(적벽 관람)∼적벽입구까지 왕복 9.6㎞로,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화순은 올해도 3월부터 시민들에게 개방할 방침이다.

이서 적벽의 감흥을 조금 더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지척에 위치한 물염적벽을 찾는다. 병풍처럼 깎아지른 기암괴석과 노송이 아름답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생전에 자주 찾아와 시를 읊곤 했다는 곳이다. 지금은 시비에 둘러싸인 김삿갓 동상이 물염적벽을 응시하고 있다.

절벽 위의 정자도 고즈넉하다. 물염 송정순(1521~1584)이 세운 '물염정(勿染亭)'으로, ‘티끌 세상에 물들지 말라’는 뜻을 담았다. 김인후, 권필 등 조선 선비들이 지은 시문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운치를 더해주며, 삿갓 시비공원도 옆에 있다.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김만선 기자  webmaster@chkorea.news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