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차는 무엇엔가 이끌리듯 광주를 벗어나 나주를 지나고, 다시 영암을 지났다.

햇살은 눈이 부시게 따뜻했지만 몽니도 있었다. 자동차는 가속기와 제동기의 물리적 기능을 잊은 범인(凡人)에 의해 한 차례 크게 덜컹거렸고, 규정속도 여부를 따지는 카메라는 자석처럼 이끄는 무엇인가에 의해 이미 주체할 수 없는 탄력을 받은 후에야 가시권에 잡히곤 했다.

그렇게 빠르고 느리게, 또 느리고 빠르게를 반복하다 닿은 곳, 해남이었다.

한반도 최남단 땅끝에 위치한 곳, 두륜산 아래 삼면이 바다에 접해 천혜의 자연경관과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해남에서 두드러진 것은 문학이다. 푸른 바다에 포근히 안긴 전원과 온화한 산세, 땅끝이라는 지리적 여건은 조선시대 문인과 근현대 시인 등 수많은 작가들을 탄생시켰다.

차가 해남에서 가장 먼저 멈춘 곳은 ‘고산 윤선도(1587~1671) 유적지’이다. 이제야 알겠다. 차를 무작정 해남으로 이끌었던 힘.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본 공재 윤두서(1668~1715) 특별전의 강한 여운이 아직도 남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후에는 차를 이끈 힘이 고산이었는지, 증손자인 공재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는 고산도, 공재도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고산 유적지에서 가장 대표적인 건축물은 역시 고산의 고택이자 해남 윤씨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이다. 집 뒤로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쏴아’하는 소리가 비내리는 듯 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 전남의 민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특히 사랑채는 효종이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지어준 집을 해상 운송을 통해 그대로 옮겨왔다고 한다. 중부지방의 특성을 보이는 ㅁ자형 가옥구조에 차양이 있는 사랑채가 눈길을 끈다.

고산 유적지는 ‘말을 타고 달리며 산을 보듯(走馬看山)’ 지나치는 공간이 아니다. 녹우당은 물론 비자나무숲이며, 백련지, 담장길을 묵언수행하듯 나릿나릿 걸을 때 비로소 마음의 근심이 풀리고 눈이 차는 힐링의 공간이 된다.

유적지를 돌아본 후에는 ‘고산 윤선도 유물전시관’을 찾는다. 고산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외증조부인 공재의 시서화, 화첩 등 5,0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는 곳이다. 해남 윤씨 문중은 공재의 아들 낙서 윤덕희(1685~1776)와 손자 청고 윤용(1708~1740)으로 이어지는 3대 화가를 배출했으며 청고가 그린 미인도는 섬세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봉학리 김남주 생가-송정리 고정희 생가‘겨울을 이기고 사랑은/봄을 기다릴 줄 안다/기다려 다시 사랑은/불모의 땅을 파헤쳐/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천년을 두고 오늘/봄의 언덕에 오늘/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사랑은/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사과 하나 둘로 쪼개/나눠 가질 줄 안다//너와 나와 우리가/한 별을 우러르며’(김남주, 시 ‘사랑은’ 전문)

해남 삼산면 봉학리에 가면 혁명시인 김남주(1946~1994) 생가가 기다린다. 그의 시는 강렬하다. 유장하면서도 강한 호흡으로 반외세와 분단극복, 광주민주화운동, 노동문제 등의 현실 모순을 꼬집고 참다운 길을 모색했다.

시인의 생가에는 당시 그가 썼던 원고와 사진 등이 남아 있어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들을 수 있다.

생가터에는 시인의 흉상과 ‘노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사랑은’ 등 대표 시를 담은 시비 등이 건립돼 있다.

김남주 시의 출발점이었으며 창작의 산실이었던 독방 감옥을 재현해 놓은 ‘감옥체험실’도 있다. 시인은 두 차례에 걸쳐 10여 년동안 수인(囚人)생활을 했으며, 그가 남긴 470여 편의 시 가운데 300여 편을 옥중에서 썼다고 한다.

해남에서는 매년 ‘김남주 문학제’를 통해 육필원고와 사진전, 시쓰기 체험마당, 작가와의 대화, 생가길 걷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또 현재 시인의 생가는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고 있어 시인의 삶과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이곳에서 하루를 묵어도 좋다.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중략//쭉정이든 알곡이든/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고정희, 시 ‘사십대’ 중)

김남주 시인 생가를 마주보고 있는 송정리에는 현대 시문학의 독보적인 페미니스트 시인 고정희(1948~1991) 생가가 있다.

기독교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역사의식과 여성해방 의식을 끈질기게 탐구하며 작품활동을 펼쳤으나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타계해 주위를 안타깝게 한 시인. 방에 걸린 작은 나무 현판에는 ‘고행, 청빈, 묵상’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정좌하고 단정한 글씨로 시를 써내려 가던 마음자세를 엿볼 수 있다. 또 방안을 가득 채운 각종 서적이며 육필원고, 유품을 보면 시인이 생전에 가졌던 열정적이고 치열한 삶의 모습이 보인다.

매년 6월이면 시인을 기리는 ‘고정희 문화제’가 진행된다. ‘해남여성의 소리’와 ‘고정희 기념사업회’가 주최해 시인의 삶과 문학을 되짚어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의미를 더한다.생가 뒷산에는 시인이 안장된 묘가 있다. 시인의 간단한 이력과 민족문학장으로 치렀다는 내용이 담긴 안내석이 보인다. 묘의 뒤로는 아담한 숲, 앞에는 저수지가 있어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는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

해남 우수영에 법정스님 생가터 남아

‘우리는 필요에 의해 물건을 갖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뜻이다.’(법정스님, 책 <무소유> 중)

해남 우수영에 가면 법정스님(1932~2010) 생가터도 있다.

법정스님 생가터는 당초 초가집이었으나 수십 년 전 다른 사람에게 매각돼 현재는 블록건물이 들어섰다고 한다. 군에서는 평생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다간 스님의 고귀한 뜻과 가르침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생가 복원을 추진 중이다.

스님은 <무소유> <오두막 편지>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등 현대인의 물질만능사상에 경종을 울리는 많은 작품들을 펴냈다.

이밖에 이동주(1920~1979) 시인은 향토적인 감각과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감정과 정서를 그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표현했던 작가. 시조문학 대중화 연 이지엽시인, 황지우 시인, 김준태 시인 등은 지금도 한국문단을 대표하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해남에는 일반적인 볼거리도 풍부하다. 땅끝에는 조각공원, 달마산, 미황사가 있고, 대흥사권에는 두륜산, 대흥사, 포충사, 일지암이 있다. 우수영권의 충무사, 우항리공룡화석지, 오시아노 관광단지와 각종 축제도 즐길 수 있다.

한반도 끝에서 한국 문학의 불씨를 당긴 곳. 해남은 땅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김만선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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