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햇살이 곱다. 겨우내 움츠린 나뭇가지에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짙푸른 호수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은빛 물비늘을 드러내고 있다. 봄을 담은 햇살은 국도를 달리는 차창의 이마에 부딪혀 맥없이 부서지더니 분수처럼 흩어져 초록의 빛깔로 드러났다.

차는, 그렇게 한참동안 봄 속을 달렸다. 풍경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희뿌연 무엇인가가 풍경과 사람 사이를 일정하게 떼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가서고 싶었지만 풍경은 더 이상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고, 길도 자꾸 엇나갈 뿐이었다.

봄 속에 있었으나 그를 체감할 수는 없었다. 어느 한적한 마을에 핀 매화에서, 길체의 목련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화사한 자태 속에 숨은 하얀 그늘이었다.

광주에서 한 시간 남짓, 봄 속을 달리다 도착한 곳은 녹찻골 보성이다. 소설 <태백산맥>의 숨소리가 살아 있는 곳, 차와 소리, 문학이 있는 대표적인 남도의 예향(藝鄕)이다.

보성의 문화를 하루 일정으로 돌며 살펴본다는 것은 무리다. 그만큼 알려진 곳도 많고 찾는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우선 지난해 개관했다는 판소리 성지부터 찾는다. 회천면 영천리 도강마을에 세워진 테마공원이다. 처음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득음문이 보이고, 이어 생활관, 판소리전수교육관이 들어서 있다. 생활관과 판소리전수교육관 사이에는 박유전 (1835~1906)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박유전․정응민 숨결 담긴 판소리 성지

박유전 선생은 조선 후기 판소리의 명창으로 서편제에서 갈라진 강산제를 창시한 분이다. '춘향가' 중 '이별가'에 뛰어났으며, 독특한 창법을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죽은 후 3일동안 밤이면 마을 뒷산에서 '내 소리 받아 가라'는 혼백의 외침이 있었다 한다.

이어 야외에 판소리 다섯마당을 정감있는 인형 조형물로 만들어놓은 곳이 눈길을 끈다.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심청가, 춘항가 등 다섯마당을 재미있게 구성해 친근감을 준다.

이곳을 지나면 판소리전시관과 송계 정응민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정응민(1896~1964) 선생은 조선시대 판소리 명창으로 서편제 보성소리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소리와 관련된 장소로 보성읍 용문길에 위치한 '서편제소리 전수관'이 있다. 지난 1998년 준공된 이후 매년 10월 서편제보성소리축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평소엔 판소리와 보성소리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서편제보성판소리보존회에서 임대해 사용하고 있다.

보성이 녹찻골인 만큼 차를 마시며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도 좋다. 보성에는 차를 마시고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곳만 20여 곳에 달한다. 이 중 보성읍 동암 1길에 위치한 '보향다원(寶香茶園)'은 고려시대 이규보가 빼어난 명차로 꼽은 유로향(乳露香)이 감도는 '보향명차'와 찬란하고 영롱한 황금 빛깔 속에 특유의 향미를 갖춘 한국 최초의 유기농 인증발효차인 '황금명차'를 개발한 곳이다. 어디서 온 길손이든 묻지 않고 정성 가득한 차부터 대접하는 인심이 더욱 발길을 끈다.

매년 봄이면 보성다향대축제를 개최하는 데 올해는 5월 22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한국차문화공원과 보성차밭 일원에서 개최한다. 온 가족이 함께 차내음과 철쭉향 속에서 낭만과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김범우․현부자집․무당 딸 소하를 만나다

보성은 소설 <태백산맥>의 숨소리가 살아있는 곳이다. 벌교에 들르면 가는 곳마다 등장 인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태백산맥>은 만주, 서울, 부산, 강원도까지 배경이 넓혀지지만 소설의 중심공간은 벌교라고 할 수 있다.

민초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한 자책과 죄의식을 가진 김범우, 야성적이고 행동적 성격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염상진, 일찌감치 좌익 활동에 몸담고 있던 정하섭이 있다. 또 연정의 마음으로 정하섭의 좌익활동을 돕는 무당의 딸 소화, 염상진의 오른팔로 좌익행동대장을 맏고 있는 하대치, 염상진의 동생이지만 형과 반대로 우익세력의 우두머리인 염상구 등이 걸쭉한 입담과 사투리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진행한다.

특히 <태백산맥>은 논픽션이 아닌 소설이지만 작가가 생활했던 벌교를 무대로 삼은 관계로 현실의 벌교에는 작품 속 사건들이 펼쳐졌던 이런 저런 장소들이 똑같은 위치에 있어 사실감을 더해주고 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소설 <태백산맥>이 문을 여는 첫 장면에서 등장한 현부자집이다. 조직의 밀명을 받은 정하섭이 활동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새끼무당 소화의 집을 찾아가고 이곳을 은신처로 사용하게 되면서 현부자와 이 집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펼쳐진다. 소화의 집은 현부자집 왼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난 2008년 개관한 '태백산맥 문학관'이다. 건축가 김원씨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과거 아픈 역사를 끄집어내기 위해 벌교읍 제석산의 등줄기를 잘라냈으며 2전시실은 공중에 매달려 있는 형상으로 건축됐다.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북쪽을 향하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전시실에서는 '작가 조정래'에 대한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

또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엇간디라"하며 방죽쌓던 일의 어렵고 힘들었음이 묘사된 중도방죽을 비롯, 포구의 양안을 이어주는 소화다리, 염상구가 희한한 결투를 벌였던 철다리, 벌교의 이름이 비롯된 홍교,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회정리 돌담교회, 김범우의 집, 보성여관 등이 남아있다.

이 중 소화다리는 여순사건의 회오리부터 시작해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비극과 상처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양쪽에서 밀고 밀릴 때마다 총살형이 이뤄졌던 핏빛 상흔을 간직한 장소이기도 하다.

소설 <태백산맥> 무대의 문학기행과 함께 벌교옹기, 천연염색, 용문석 등 전통문화 체험과 채동선 생가, 나철선생 유적지, 부용산공원, 등을 연계 관람할 수 도 있다.

보성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차박물관과 티벳불교박물관이 있고 미술 작품을 보고 싶다면 군립백민미술관이나 우종미술관을 갈 수도 있다.

대동문화 88호 [2015 5,6월호]

김만선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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