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감독의 102번 째 영화는, 200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화장>을 원작으로 했다. 김훈의 단편 <화장>은 화장품 회사의 중년 남자가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보살피는 와중에, 함께 근무하는 젊은 여직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김훈의 단편은, 화자인 오상무가 ‘죽어가는’ 아내와 ‘살아있는’ 여인 사이에서 욕망하고 번민하는 마음의 풍경을 따라가는 소설인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점이 생겨난다. 그간 자신의 작품 속에서 한국적인 소재와 풍광을 담아 왔던 임권택 감독이, 인간의 내면으로 여행을 떠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도전은 쉽지 않아 보인다. 소설의 화자가 독백하듯이 들려주는 농밀한 문자언어를, 눈으로 직접 확인시켜야 하는 영상언어로 옮기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길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첫 장면부터 영화는 소설과의 차별화를 선언한다. 소설이 아내의 죽음을 알리는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면, 영화는, 검은 상복을 입은 무리들이 모래사막에서 하얀 상여를 메고 가는 장면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이 상여 행렬에서 인물들의 행동과 표정에 주목한다. 상여꾼의 무리에서 상주인 오상무(안성기)는 뒤돌아서 추은주를 바라보고, 후미의 추은주(김규리)는 붉은 옷을 입고 뒤따르고 있으며, 상여 속의 죽은 아내(김호정)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러니까 감독은 오프닝 장면에서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예시한다. 앞으로 전개될 인물들의 관계와 캐릭터를 강렬한 색의 대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배우 대사와 표정 통해 극 전개

그렇다. 소설은, 화자인 오상무가 들려주는 내면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상황과 인물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면, 영화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대사와 표정이 주가 되어 극이 전개된다는 말이다.

김훈과 임권택 혹은 소설과 영화의 차이는 명백하다. 우선 김훈은, “당신의 이름은 추은주(秋殷周). 제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으로 불린 그 사람인가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당신의 이름이, 추은주, 당신이름인지요.”라는 문장을 네 번이나 반복하며 추은주에 대한 오상무의 간절한 속마음을 드러낸다.

이에 반해, 임권택은 오상무가 추은주에게 이끌리는 마음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클럽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때 오상무는 매력적으로 춤을 추는 추은주에게 흠뻑 빠져든다. 추은주는 이를 알고 있다는 듯 오상무에게 와인을 선물하고, 이에 오상무는 추은주를 향한 연정의 마음이 뜀박질 하는 것이다. 택시 안에서 오상무가 안절부절 애를 태우는 장면은 이를 입증한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추은주를 오상무가 응시하는 장면에서도 김훈과 임권택의 선택은 다르다. 김훈이 영정사진 앞의 추은주에게서 발뒤꿈치와 엄지발가락 밑의 둥근 살과 엉덩이의 곡선에 집중한다면, 임권택은 맞절을 하는 추은주의 가슴골을 훔쳐보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화는, 소설보다 더 직접적으로 오상무가 추은주에게 빠져드는 속마음을 피력한다. 김훈의 오상무가 추은주를 조심스럽게 흠모한다면, 임권택의 오상무는 추은주에게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모양새인 것이다.

영화 속 오상무의 추은주에 대한 욕망은, 오상무가 병이 악화된 아내와 섹스를 나눌 때 추은주의 벌거벗은 육체를 상상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임권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생각을 선명한 이미지로 제시한 것이다.

임권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원작의 뼈대에 살을 덧붙이며, 이 영화가 죽음에 대한 사유와 생의 에너지에 집착하는 구체적인 인간의 이야기로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

오상무는 아내를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내는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음을 직감한다. 추은주가 선물한 와인병을 의식하며, 또는 추은주를 위해 추천서를 작성하고 있는 남편의 손놀림에서, 아내는 남편의 여자를 상상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생과 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남편인 오상무는 아내가 병으로 죽어갈수록 젊은 여인인 추은주가 내뿜는 생의 에너지에 빠져들고, 곧 죽게 될 아내는 아내대로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임권택의 인간 탐구는 한발 더 나아간다. 아내가 죽은 다음의 상황을 연출하며 인간에게 있어 부끄러움이란 무엇인가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아내는 와인을 선물한 남편의 여자를 질투했다. 하지만 아내는 자신이 죽은 이후에 남편 앞으로 와인박스가 배달되도록 한다. 이는 속 깊은 아내가 자신에게 헌신했던 남편을 위해 준비한 마음의 증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오상무가 와인박스를 마주하며 그 의미를 헤아리고, 아내의 유품에서 자신의 사진과 마주하고 있을 때, 와인박스 선물의 원인 제공자인 추은주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오상무는 이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 임권택은 이 상황을 오상무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경이 되어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으로 연출한다. 아내의 깊은 뜻을 깨닫고 오상무는 심히 부끄러운 마음이 되는 것이다. 오상무는 추은주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을뿐더러, 넋을 잃은 표정이 되어 무거운 발걸음으로 퇴장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의 체면일 것이다.

그렇다. 임권택은, 자신의 농익은 지혜로 삶의 진실을 빚어내며, 영화어른으로서의 위엄을 갖춘 것이다.

대동문화 88호 [2015 5,6월호]

조대영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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