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필자는 영산포가 원래 나주시 삼영동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다는 얘기를 했다. 실제로 삼영동의 전남운전면허시험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내영산(內榮山)’이란 마을이 남아있다.

이‘내영산’이란 지명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삼영동의 원뿌리가 이 마을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앞으로 다루게 될‘외영산’과 구별해 이곳이‘원조 영산포’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것이다.

물론 18세기까지는 이처럼 내영산과 외영산을 구분할 이유가 없었다. 그 때만 해도 나주 영산포는 오직 내영산을 의미했다. 즉 포구 가득 장삿배들이 돛을 내려놓고 짐을 부리거나 다시 짐을 싣고 출항하는 장소는 오로지 내영산 뿐이었다. 따라서 1722년 충청도 선비 이하곤(李夏坤)이 목격한 영산포도 두말할 나위없이 내영산이었다. 그가 <남유록(南遊錄)>에 남긴 당시 내영산의 모습은 이랬다.

“나주성에서 10리를 가면 영산강이 나오는데 금강(錦江)이라고도 한다. … 이곳 포구에는 강을 거슬러 올라온 돛단배들이 떼 지어 모여 있곤 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울의 한강을 연상시키는 듯하다.”

내영산, 마을은 남아있지만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내영산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1813년 <나주읍지>에 그런 정황이 담겨있다. 이 책엔 그 당시 나주 관내지역에서 장삿배들이 자주 정박하는 곳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런 곳 가운데 하나로 지량면(知良面)의 영강포(榮江浦)를 꼽았다. 지량면은 오늘날 영산동, 즉 외영산에 속하는 지역이다. 반면에 내영산, 즉 신촌면(新村面)의 포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내영산의 쇠퇴는 1872년 <나주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이 지도에 제민창(濟民倉)이란 창고와 장삿배들, 그리고 배의 접안에 필요한 정보인 수심을 표시한 곳은 내영산이 아니라 제포(濟浦)로 불리던 지금의 안창동이었다. 내영산에서 영산강 하류 쪽으로 1.5km쯤 떨어진 포구다. 그런데 이 지도에서도 내영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물론 외영산이 하루아침에 큰 포구로 부상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초엽 이하곤이 이곳을 지날 때만 해도 외영산은 딱히 부르는 지명조차 없었다. 그저 영산포 맞은편의 한가로운 강변으로 인식됐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는 눈에 띌만한 특징이 없었다. 외려 그런 모습이 안빈낙도를 즐기려는 선비에게는 가거지(可居地)로 삼을 만했는지 모른다. 다음은 그런 마음을 담은 이하곤의 시다.

“해 저물어 영산포에 이르니 / 외로운 배 한척만이 강을 건너네 / 파도는 잔잔하고 백사장은 널찍한데 / 눈발이 뜸해지니 서쪽 산이 환하게 미소 짓네 / 멀리 나무는 나그네에게 손짓하고 / 자욱한 안개 속에 기러기 소리마저 파묻혔네 / 강가엔 겨우 어부의 집 몇 채뿐 / 여생을 보낸다면 이런 곳은 또 어떨는지”

그런데 19세기 초엽 외영산은 영강포 또는 홍해포(洪海浦)로 불리기 시작한다. 장삿배들이 하나둘 이곳을 찾은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기의 말엽이 되면 외영산은 내영산의 이름까지 훔쳐 새롭게 영산포란 이름을 갖기에 이른다. 이를 방증하듯 1897년에 간행된 <금성읍지>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영산포는 나주 남쪽 10리 떨어진 지량면에 있다.”

이 구절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이전 같으면 영산포가 강북(江北)에 속한 신촌면에 있다고 했을 것을 이때부터는 강남(江南)인 지량면에 있다고 확언하고 있는 점이다. 이어 <금성읍지(錦城邑誌)>는 새로운 영산포에 대해 이런 설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해산물을 실은 배들이 이곳 포구에 모여들어 정박하는데 인근 열 두 고을의 물자가 모두 이곳에서 거래된다.”

새로운 영산포로 부상한 외영산

그렇다면 이즈음 외영산이 새로운 영산포로 급부상한 까닭은 무엇일까? 1930년대 삼영동 앞에 제방 탓에 지형이 많이 바뀌었지만 본래 내영산은 강물이 숨을 고르며 잠시 쉬어가는 물굽이였다. 그래서 유속이 느려지면서 강물에 실려 온 토사가 퇴적했다. 그래서 수천년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오랜 퇴적으로 인해 배를 강둑에 바로 대는 것이 곤란해졌고 결국 배들은 다른 접안장소를 찾아야 했다.

그에 비하면 외영산은 예나지금이나 강물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 때문에 간혹 강의 범람으로 저지대가 침수됐고 그래서 1970년대 지금처럼 강변을 따라 거대한 콘크리트방벽까지 쌓아야만 했다. 반면 이런 위치는 수심이 깊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외영산 주변에는 봉황천과 만봉천(일명 새끼내)까지 유입하면서 수량도 풍부했다. 깊은 수심과 풍부한 수량은 배의 접안에 유리한 조건이었고 내영산과 비교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외영산이 부상하는 데는 지형변화 외에 다른 요인도 있었다. 이곳은 남평장으로 드나드는 길목이었다. 지금은 나주시 남평읍이지만 본디 남평은 나주와 엄연히 구분되는 독립된 고을이었다. 나주에 비하면 고을의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었다.

영조 35년(1759)에 작성된 인구기록을 보면, 나주 인구가 1만8천여 가구에 5만6천여명인데 비해 남평은 5천여 가구에 2만명을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남평 읍내에서 1일과 6일마다 열리는 오일장의 위세만큼은 대단했다. 남평장은 조선 후기에 영산강 유역은 물론이고 전남 전역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오일장이었다.

그렇다면 남평장이 이토록 컸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의 열쇠는 이 장에서 거래되는 목화와 무명베에 있었다. 1904년 일본인 츠키다 도자부로의 조사기록에 따르면, 목화와 무명의 성수기인 9~12월 사이에 남평장에서 거래되는 무명베는 하루 2천필에 달했다. 이는 전라감영 소재지인 전주장에서 하루 1천필,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장에서 하루 600~700필이 거래된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양이었다.

츠키다만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인 1906년 니시무라 순지(西村眞次) 등은 남평장에 출시된 무명베를 연간으로 합산해 100만 필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그리고 남평장 전체 거래액에서 무명베가 차지하는 거래비중이 40%에 달한다고도 했다.

이처럼 남평장에서 무명베 거래량이 많았던 것은 당시 전남지역에서 곡식으로 거둬들인 세금을 이곳에서 운반에 편리하도록 무명으로 교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된 무명은 멀리 목화재배의 불모지인 함경도로까지 팔려나갔다.

여기서 외영산의 독특한 역할과 위상이 나온다. 함경도로 목화와 무명을 싣고 간 배들은 되돌아오는 길에 그곳의 특산인 명태를 싣고 왔다. 이들 명태는 원산, 명천 등 등 함경도를 출발해 동해와 남해를 돌아 목포항을 거쳐 다시 영산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와 외영산에서 하역된 뒤 남평장에 들어왔다.

이처럼 전남 내륙지역의 명태 공급중심지가 되는 데는 외영산의 역할이 컸다. 사실 19세기 말엽 외영산을 거쳐 들어온 명태의 반입량에 비하면 오늘날 영산포를 상징하는 어종인 홍어는 당시엔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로 미미했을 것이다.

남평장, 무명베의 주요 집산거래

그렇다면 외영산이 신흥포구로 성장할 무렵에 지금과 같은 번화가의 모습을 갖췄을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1898년 일본외무성이 작성한 <통상휘찬(通商彙纂)>이란 자료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영산강유역의 포구에는 객주들이 있으나 그렇다고 건물들이 즐비한 시장이 있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상인이 아니라 농민이다. 그들은 강가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진 산 아래에 모여 산다. 포구에는 객줏집 한 두 채만 있을 따름이다.”

실제로 1900년대 초엽의 영산포, 즉 외영산을 담은 사진을 봐도 이런 정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외영산이 본격적으로 탈바꿈한 것은 어찌됐건 일본인들이 정착하면서부터다. 1897년 목포 개항 직후 뜨내기 상인들이 일본으로 반출할 쌀이나 목화를 사들이고 옥양목이나 잡화류를 팔기 위해 외영산을 드나들었다.

물론 그들의 최종 행선지는 외영산이 아니라 남평장이었다. 그들은 남평장으로 향하는 교두보로 이곳을 이용했을 뿐, 딱히 외영산에 정착하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전후로 일본인들이 외영산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외영산이 전남 내륙으로 통하는 전초기지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곳을 영구적인 상업거점으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그들이 맨 처음 한 일은 남평장을 견제할 목적으로 시장을 개설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04년 영산포장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장날이 남평장보다 하루 빠른 5일과 10일인 것도 외영산의 일본인들이 남평장으로 가려는 상품과 상인들을 붙잡아두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남평장의 위세가 금세 시들해진 것은 아니었다. 1917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것에 따르면, 나주장이나 영산포장의 연간거래액은 각각 1만여 원에 불과했지만 남평장은 여전히 10만원을 훌쩍 넘어서 있었다.

영산포장 개설에 이어 일본인들은 1910년 강점 전까지 외영산에 도로와 창고, 상가와 주택 등을 건설했다. 재밌는 사실은 당시 그들이 이런 인프라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복권발행으로 조달했다는 사실이다. 어떻든 그즈음 외영산은 명실상부한 내륙항구, 즉 영산포가 돼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영산포라고 하면 나주시 영산동이나 이창동을 떠올리게 된 배경이 됐다.

대동문화 93호 [2016 3,4월호]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사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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