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벽돌로 지은 요양소 병동 앞마당에는 둔덕진 언덕이 있었는데 그곳에 달맞이꽃들이 무리지어 피었다. 노란 달맞이꽃은 주로 저녁 무렵에 피었다. 그물 같은 햇빛이 지상에서 하루를 수확한 푸른색을 거두어가고 뒷산 너머에서 슬슬 내려오는 어둠이 아직 짙어지기 전 쯤 환자복을 입은 우리들이 저녁을 먹고 할 일 없이 병동 앞마당에 나와 앉아서 실없는 담소를 나눌 시각에 달맞이꽃들은 피어났다.

달맞이꽃은 하늘로 곧게 뻗친 줄기 여기저기에서 작은 봉오리로 머물러 있다가 피어났다. 그런데 유심히 눈길을 주며 보노라니 가느란 바람결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꽃봉오리는 금방 꽃잎을 활짝 열었는데 꽃봉오리가 한 잎 한 잎 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푸드듯푸드듯 하는, 하여튼 그런 작은 날개짓 같은 부드럽고 희미한 소리가 내 귀에는 분명히 들렸다.

달맞이꽃에 대해서 평소 관심을 가져본 일도 없고 그것들이 피건 말건 내 아픈 몸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서 건성으로 보고 지냈더랬는데 그날은 무슨 탓인지, 아마도 그 꽃피는 소리 때문이었으리라 짐작하는데, 나는 달맞이꽃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체 저 작은 꽃들은 이 병동 앞에서 어쩌자고 저녁 내내 이 꽃봉오리 저 꽃봉오리가 연이어 피어나는 것일까, 그런 턱도 없는 의문이 들어서 마치 답을 찾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달맞이꽃에 맞추어놓은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달맞이꽃에 슬그머니 장난을 걸고 싶어졌다. 내가 달맞이꽃이 피는 까닭을 알 수는 없지만 그 꽃을 피게 하는 그 ‘힘’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었으리라.

나는 달맞이꽃 봉오리 하나를 내 손바닥으로 계란을 쥐듯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그리고는 다른 꽃봉오리들이 푸드듯푸드듯 하고 활짝 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한참 지나서 꽃봉오리를 감싸 쥔 내 손바닥을 가만가만 펴보았다. 꽃봉오리는 잠자는 새처럼 쥔 손 안에 그대로 있었다. 순간, 내가 꽃송이 하나를 못 피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몸을 앓고 있다 보니 하찮은 것에도 성가시게 구는 일이 꺼려졌다. 그때는 그랬다. 삿된 마음을 먹어도 투병생활에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린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손바닥을 완전히 펴자 달맞이꽃 봉오리는 활짝 피어 있었다. 이 장면을 다시 묘사하면 내가 꽃봉오리를 꼬옥 쥐고 있을 때는 잠든 새처럼 봉오리째 그대로 있었지만 달맞이꽃은 이미 그 꽃봉오리 안에서 피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손을 펴자마자 꽃은 날개를 활짝 편 모습으로 내 눈 앞에 마술처럼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때 무척 감동을 받았다.

이럴 수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꽃을 피게 하는 어떤 힘, 나는 그 힘을 전우주적인 작용이라고 하고 싶은데, 내 손으로 막을 수 없는 힘이 꼬옥 쥔 꽃봉오리의 내면에서 피어 있게 한 것이었다. 나는 그 신비한 힘을 느꼈던 것이다.

놀랍고 신비스런 경험이었다. 꽃봉오리를 쥐고 있어도 꽃은 꽃봉오리 속에서 피는 일을 완료해놓고 있었다니! 그렇다면 저 수많은 꽃봉오리들은 어떤 안 보이는 존재가 지금 손으로 가만히 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방금 내가 손바닥을 편 것처럼 그 쥐고 있는 손바닥을 펴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모든 꽃들이 피는 것은 아닐까.

나는 모른다. 그저 추측만 해볼 따름이다. 자연의 신비는 우리의 추측 범위를 벗어나 있으므로 우리는 그저 멀뚱하니 짐작만 할 따름이다. 한 송이 달맞이꽃을 피게 하는 힘이 이 자연을 경영하고, 우주를 운행케 한다. 저 작은 힘, 그러나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힘이 꽃봉오리 안에 있는 것이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을 이런 데다 써서 합당할지 모르겠지만 그 어떤 힘으로 세상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나도 그 힘에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달맞이꽃을 피게 하는 힘이 나를 존재케 한다.

내가 달맞이꽃과 연대감을 느끼는 순간에 앞산에서 둥두렷이 달이 떠올랐다. 달빛으로 테를 두른 달맞이꽃들은 노란색이 한층 더 선명하고 생기가 감돌았다. 막 떠오르는 달과 달맞이꽃이 비밀스런 교감을 나누는 듯하다. 나는 그날 저녁 달맞이꽃을 보면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여름 저녁에 샛강 둑을 거닐며 나는 그 아득한 날 요양소에 지낼 때 달맞이꽃에서 느낀 전우주의 연대감이 떠올랐다. 꽃이 피는 것은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어 피게 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한 송이 달맞이꽃을 피게 하는 힘이 나를 여기 존재케 한다고 믿는다. 내가 이밖에 더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문틈 시인  webmaster@chkorea.news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