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 가면 한 작품이 사람을 5분 이상 발길을 붙잡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여기는 다르다. 작품 속 이미지들이 나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계속 서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씨 작품의 매력이다. 우리 눈에 낯익은 고전명화를 영상화면으로 가져와 생명을 불어넣었다. 수백 년이 지난 명화들은 디지털 기술의 도움을 받아 캔버스와 화선지가 아닌 영상매체 화면에서 꿈틀거린다.

멈춰있던 나비와 벌들이 움직이고, 꽃잎과 대나무가 바람에 나부끼며,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모나리자의 얼굴이 움직인다. 때로는 비행기가 날고, 헬리콥터도 소리를 낸다.

한국 미디어아트, 유럽 미술시장 뒤흔들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바뀌면서 미술의 흐름도 바뀌었다. 캔버스에 그리는 것만 미술이 아닌 시대가 됐다. 그중 미디어아트는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한 현대미술로 다가왔다.

오늘날 전 세계가 미디어아트를 주목하고 있다. 정적인 미술 작품을 동적으로 환생시킨 작가의 도발에 대중들은 열광한다. 해외 전시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48) 작가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남구 백운동 푸른길 옆에 위치한 이이남의 작업실은 외관부터 깔끔하다. 2층으로 올라가 작업실을 문을 연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다. 작업실 벽면은 온통 잡지, 신문 등에 실린 이미지 사진이 도배되어 있다.

미디어아트를 사랑하는 이이남의 열정을 한 눈에 느낄 수 있다. 작업실 벽면 가득 붙여있는 이미지들은 그의 머릿속을 그대로 꺼내서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숱한 고전 명화를 오마쥬 기법으로 영상과 조화시켜 미디어아트로 탄생시켰다.

최근 유럽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이 작가는 올 들어 해외 전시로 바빴다. 5월엔 3주 동안 유럽 곳곳에서 각각 다른 전시로 몸을 움직였다.

“작품 제작은 곳곳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특히 광주에서 살다가 외국에 한번 씩 나가면 새로운 곳에서 영감이 굉장히 많이 떠오르죠.”

독일 베를린 안도파인아트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비롯해, 노르웨이 베스트포센 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아티스트 그룹전’에 참여했다. 또 스위치 취리히 리트베르크 뮤지엄이 개최한 ‘세계의 정원’전에 한국 대표 작가로 나섰다.

수많은 해외의 콜 세례로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반열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외에도 샌프란시스코 아시아미술관에서 ‘전통 나전칠기 특별전’에 참여했다.

세계적 트렌드, 플렛폼 여전히 부족하다

국제 이벤트에서 빠지지 않은 것은 개·폐막식이다. 그는 지난 2015년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미술총감독을 맡아 영상미술과 화려한 미디어아트로 개·폐막식을 장식했다.

이이남은 미디어아트로 물든 빛고을 광주의 아름다움 ‘빛’을 전 세계에게 뽐냈다. 광주는 지난 2014년 유네스코 지정 미디어아트 창의도시로 선정되고, 이이남 작가를 홍보대사로 발탁했다.

“앞으로 광주문화재단은 미디어아트를 위한 플랫폼도 만들고, 작가와 연계할 수 있는 프로젝트도 진행해야 하는데 (재단이) 굉장히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점점 광주가 미디어아트 도시가 되어가고 있구나! 느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죠.”

하지만 여전히 미디어아트 창의도시로써 부족한 부분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이남 작가는 광주가 좀 더 빠르게 미디어아트 트렌드를 읽고 앞서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누가 했던 것을 가져와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죠. 광주비엔날레가 지금 이렇게 된 이유도 유럽에서 했던 것을 다시 가져와서 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아트는 늘 새로운 것을, 핫(Hot) 한 것을 가져와야 주목받는다고 봅니다.”

광주비엔날레가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세계적인 수준까지는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했던 것을 가져옵니다. 감독들도 비슷한 사람들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하기 때문에 ‘그 밥에 그 나물’이 되는 거라고 봅니다. 세계적인 무대에서 봤던 것들을 가져오니 새로운 것이 없는 거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남 우수한 자연 환경, 예술적 상상에 보탬

‘이이남’ 세 글자를 말하면 떠오르는 작품으로 디지털 병풍과 묵죽도가 있다. 그는 대나무의 고장 전남 담양 봉산면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둘째로 태어나 ‘이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유년시절 시골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던 어린 아이였다.

큰 형은 빼어날 정도로 상당히 그림을 잘 그리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맏아들의 책임감으로 산업현장에 뛰어들어 아쉽다고 한다.

담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작가는 등굣길에서 땅거미, 새소리, 물소리, 개구리소리 등 생명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예술적 자산으로 축적됐다. 이이남 작가가 처음으로 미디어아트를 선보인 작품도 대나무 그림인 김홍도의 ‘묵죽도’다.

디지털 병풍은 이이남 작가를 한국을 대표하는 미디어아티스트로 만든 작품이다. 전통적인 산수, 학, 매화가 잔잔하게 흐르는 액션으로 변형시키고, 멜로디에 따라 계절의 변화까지 생긴다.

그의 움직이는 디지털 병풍은 뉴욕에서 베이징, 독일 등 전 세계를 돌며 수백 번 전시된 작품이다. 이이남의 미디어아트는 고전 명화를 입혀 작품을 제작하기 때문에 저작권에 관해 궁금증도 생긴다.

“고흐, 피카소 등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은 사후 70년 이후에는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 여러 작가들이 작품으로 재해석하는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이이남의 작품 기법을 카피하는 작가들이 생겨나고 있다.

미디어아트 신진 작가 육성, 대폭 지원 필요

그는 앞으로 광주에 미디어아트 작가들이 많아져야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고 바라본다. 미디어아티스트 양성을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활성화 시키고, 신진작가를 지원해야 한다. 대학과 연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시민들의 눈높이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플랫폼들을 마련해야 교육도 쉽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한편 8월 28일까지 서울 DDP 디자인 박물관을 찾는다면 이이남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간송문화전에 참여해 ‘꿈속의 선비’, ‘미인도와 오송빌 백작부인’을 전시한다. 이 작가가 출품한 ‘꿈속의 선비’는 단원 김홍도의 명화 ‘마상청앵도’를 현대적인 미디어 예술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마상청앵도’ 실사에 애니메이션 기법을 추가해, 화면의 인물과 새들을 움직이게 했다. 나른한 봄날 오후, 산행 나온 선비가 소재인 원작 내용에 작가 특유 상상력을 더했다.

‘미인도와 오송빌 백작부인’에서는 한국 고전 신윤복의 ‘미인도’와 앵그르의 ‘오송빌 백작부인’ 옷이 서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가는 옷이 서로 바뀌는 단순한 이미지 교차를 통해 문화적 소통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아닌 개미들이 옷 조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해학과 풍자가 특징이다.

이밖에 오는 9월 부산 비엔날레 참여, 중국 베이징 798예술구 ‘화이트박스’, 11월 벨기에 지브라스트라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 예정으로 바쁜 여정을 보내고 있다.

대동문화 95호 [2016 7,8월호]

김다이 기자  -08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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