뙤약볕이 강타하는 폭염을 뚫고 광주에서 두어 시간쯤 걸리는 충남 공주로 달렸다. 백제가 남겨놓은 진한 감동과 향기를 느끼기 위해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내내 한바탕 소나기라도 쏟아 부을 태세다. 시커먼 먹구름이 머리 위를 맴돈다. 간혹 새하얀 뭉게구름이 어울리지 않게 먹구름 사이를 빠르게 스쳐간다. 얼마 후면 백제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흥분의 도를 넘어 졸도하기 직전인데 그깟 태양빛에 어깻죽지 좀 타진들 어떠리.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대 성황을 이루던 백제, 그 화려함에 비해 그리 많지 않은 유적과 유물이 못내 아쉽게만 느껴진다. 모든 역사는 정말 승자의 차지였을까? 이런저런 궁금한 생각들이 더위마저 잊게 할 즈음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 도착했다. 이곳은 웅진시기(475~538년)의 백제 왕릉군으로 7기의 고분이 정비되어 있으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 곳 중 한곳이다. 공주 부여는 역사적인 공부를 위함이 아니더라도 종종 찾는 곳이다.

지난 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지역이라니 그 기대감이 은근히 컸다. 유네스코는 교육, 과학, 문화 등 지적 활동 분야에서의 국제 협력을 촉진함으로써 세계평화와 인류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유엔전문기구다.

역사, 예술, 학문적으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있는 유산이나 민족학상, 인류학상 그 가치가 보존할만한 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세계문화유산은 우리나라에 몇 곳이나 될까? 2015년까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합하여 12곳에 불과하다. 심사 중에 있거나 심사를 마치고 결정을 기다리는 곳도 상당수 있지만 결과는 미지수이다.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뿐 아니라 세계기록유산, 인류무형문화유산 등도 심사하여 관리 중에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유산 12곳과 기록유산 13개, 인류무형 문화유산 18개 종목 등이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다. 이러한 유산들이 특별한 것은 변화하고 진화되어온 인류의 흔적과 찬란한 과거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95년도에 처음으로 석굴암과 불국사,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등 세 곳이 한국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지난해 백제역사유적지구가 12번째로 지정되었다.

한반도에 형성된 초기 삼국 중 하나였던 백제,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어 660년 멸망할 때까지 700여 년 동안 존속했던 고대왕국이다.

기록에 보면 부여족 계통인 온조가 고구려를 떠나 남으로 내려온 후 기온이 따뜻하고 기름진 땅, 위례성(서울지역)에 뿌리를 내렸다고 나와 있다. 4세기 중반에 북으로는 황해도 일대까지 남으로는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영역을 확장하였으며 총 3차례 본거지 천도를 단행한다.

한성, 웅진 및 사비로 천도하면서 중국의 남조문화(南朝文化)를 표본삼아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로 발전시켰다. 또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고 백제의 문화로 정착화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왜(일본)와 가야(加耶)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공유(共有)문화권을 형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공산성 왕궁지, 백제유적의 진정성 검증

충남도와 전북도는 공동노력으로 지난 10여 년간 백제의 옛 수도였던 전북 익산과 충남공주, 부여 등이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거듭 했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지난 2006년부터 꾸준히 추진해왔고 2012년,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단이 발족돼 문화재청과 전북, 충남 등이 공동으로 등재작업에 착수했다.

2015년 5월 4일 문화재청은 세계유산 등재 권고안을 유네스코에 제출했고 같은 해 7월 4일 독일 본에서 열린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고대 백제왕국의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등재를 통과시키는 쾌거를 이뤘다.

등재가 확정된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oric Areas)는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2곳을 비롯해 공주의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의 관북리 유적·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와 부여 나성 등 모두 8곳이다. 이곳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이웃 지역과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했던 고대 백제 왕국의 후기 시대를 대표한다.

점심시간이 다가 왔음인지 배속이 요동친다. 잘게 부순 얼음아래 냉동되어있는 시원한 콩물국수가 눈에 선하다. 높은 습도와 고온의 협공으로 사람 잡겠다. 일정은 빡빡한데 한가로이 여유를 부릴 틈이 없어 점심 전 공산성에 오르기로 했다.

공산성은 웅진성(熊津城)·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에 접한 표고 110m의 구릉 위에 석축과 토축으로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 산성이다. 475년 백제 문주왕이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천도하여 538년(성왕 16) 사비로 옮길 때까지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공산성 왕궁지에 올라 갑옷 입은 백제의 명장으로 신라. 고구려군 대신 “더위야 물렀거라.”를 외치고 싶다. 산성 내 가장 넓고 평탄한 지형에 있는 왕궁지는 건물지, 축대도로, 저수시설, 배수시설 등이 확인 되었고 저수시설에서 옻칠갑옷, 마갑, 화살촉 등은 백제유적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700년 대백제의 꿈이 여물던 부여와 익산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은 사비시기(538~660) 백제의 왕궁관련 유적지다. 왕궁의 주요 시설들과 정교하게 판축된 토성이 확인되었다. 가로35m, 세로18m의 대형 건물지는 왕궁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물로 보인다. 익산의 왕궁리 유적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건물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되었다.

부소산성은 흙으로 축조한 토성으로 나무로 거푸집을 만들고 점토질과 마사토를 번갈아 다져 올려 성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판축공법은 나성을 건설하는데도 사용하였다. 또 산성 서편에 낙화암이 위치하는데 백제 최후의 날에 대한 전설이 전해지는 장소로 백화루에 올라서면 백마강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화루에서 망국의 위기에 처한 백제의 여인들이 신라의 개돼지가 되느니 죽는 것이 낫다하여 떨어져 죽은 장소이다. 또 백제의 왕궁에서 생활하던 궁녀들이 같은 이유로 집단으로 떨어져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백화루에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고란사가 위치하는데 고란사 뒤뜰의 약수터에는 고란초에 씻겨 내려온 약수가 관람객들의 인기를 사로잡는다.

부소산성을 돌아 나와 부여 읍내에 자리한 정림사지로 자리를 이동했다.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중앙에 위치했던 절터로 도심에 세워진 절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 중 하나다. 목탑의 한계를 극복한 높이 8.3m의 석탑이 남아있으며 금당지, 강당지, 승방지 등 불(佛), 법(法), 승(僧)의 불교 3보를 모두 구비한 백제 고유의 사찰건축을 보여준다.

백제인들이 꿈꾼 미래, 익산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시였다. 여전히 습도가 도를 지나쳐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얼음물 몇 개를 들이키다 보니 사르르 배가 아픈 듯하다. 이마를 거쳐 목으로 타고 내리는 땀줄기는 금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간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사비시기 수도(부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성된 왕궁이다. 장방형의 궁장 내부에 왕궁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남쪽에는 의례나 정치와 관련된 건물이 북쪽에는 후원이 배치된 왕궁 내부구조를 알 수 있다.

익산의 미륵사지는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터 중 하나다. 미륵사는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는 모습을 가람으로 구체화한 백제문화의 탁월한 독창성을 보여준다. 미륵사지 서탑은 2001년부터 해체작업을 진행하여 현재 복원 중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유구하다. 현재는 12곳에 불과하지만 역사를 바꿀만한 문화유적은 무한대다. 발굴과 지정으로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 견줄만한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 쏟아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동문화 96호 [2016 9,10월호]

이동호 기자  ddmh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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