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그가 다 구마모토 농장이었고, 여그는 방앗간이었어! 뒤짝으로 가문 살던 집도 고대로 있당께. 글씨 다다미방이 고대로여~”

아픈 우리나라의 역사지만,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흔적은 곳곳에 그대로 남아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쌀을 대량으로 수확했던 평야 지역과 이를 쉽게 수송할 수 있는 항구도시에 그 잔재가 많다.

일본인 지주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의 잔재가 남은 전북 신태인읍 화호리를 찾았다. 화호리는 일제강점기 수탈현장의 하나였다.

정읍 화호리 근대 역사 흔적 그대로 남아

화호리는 전국 최대 호남평야였던 김제평야와 바로 맞닿아 있다. 수확한 쌀을 반출해가는 통로였던 군산과도 가깝다.

이곳은 본래 숙구지(宿狗地)라 불리던 곳이다. 숙구지는 마을지도에서 잠자는 개 형상을 닮았다고 붙은 이름이다. 주변의 광활한 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은 착취와 수탈의 대상이었다.

일본인 구마모토는 화호리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생산된 쌀은 신태인역을 거쳐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했다.

화호리 766일대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음산하고, 싸늘한 기운이 온 몸을 감쌌다. 한 눈에 봐도 일제강점기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적산가옥들이 폐허로 쓰러져 가기 일보직전이다.

농장의 입구인 듯 보이는 양쪽으로 서있는 돌기둥도 검게 그을려 있다. 입구 바로 앞에는 창문과 문이 다 뜯겨진 폐허가 보인다. 괜히 등골이 싸늘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곳에는 구마모토 농장과 사택, 창고, 농장사무실 등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물들이 남아있었다. 근대 역사 이해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입구에서 마주친 한 할머니가 말을 건넨다. “어디서 왔어? 요짝 보러 왔당가?”라며 알은체를 먼저 한다.

농장 일대에 가장 큰 건물은 반출할 쌀을 쌓아 놓았던 농장 창고다. 이 농장창고는 구마모토의 이름 ‘웅본’을 따 웅본 창고라고 불리기도 했다. 적막한 마을에 위치한 창고의 모습이 스산하다.

창고 정면에는 건물 2층 정도의 높이로 지어진 계단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 조심스레 계단으로 발을 내딛고 올라가 보니 바닥에 십자가가 그러져 있다. 해방 이후 창고가 병원으로 사용된 곳임을 알려주는 증거다. 병원으로 사용했던 흔적은 돌계단에 새겨진 표식만 있을 뿐이다.

미곡창고, 병원과 학교 교사 사용되기도

구마모토 농장 창고는 1948년 화호중앙병원으로 사용됐다. 구마모토 농장의 의무실 진료 소장이었던 이영춘(1903∼1980)은 창고를 병원으로 바꿔 아픈 마을 사람들을 진찰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지금은 정면에 있던 많은 창문과 문을 막은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창고 내부에 더욱 선명하게 흔적이 남아있다. 계단 아래로 뚫려 있는 입구에 들어가 창고 내부를 살펴보니 더욱 을씨년스럽다.

농장 창고 내부는 버려진 온갖 잡동사니 쓰레기로 가득 찼고, 지붕은 무너져 내려 목조로 된 골조가 널브러져 있다. 언제 쓰인지 알 수 없는 낡은 만국기도 천정에서 떨어져 거미줄을 친 것처럼 대롱대롱 휘감아져 있다.

창고 입구의 오른쪽 2층 높이에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작은 사무실로 쓰인 듯한 문이 뚫려있다. 아마 창고 내부 2층 작은 방은 원장실로 사용한 공간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1층의 작은방에는 우물이 있다.

화호중앙병원이 생기기 전에 일본인 사택 한쪽을 임시 진료소로 사용했다. 화호자혜진료소는 화호중앙병원의 전신인 셈이다. 이 건물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농장건물 건너편 밭쪽에는 허물어져 가는 창고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이곳은 병원에서 숨을 거둔 사람들을 안치한 지금의 영안실로 사용되는 공간이었다. 병원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화호리에 사는 주민은 “쩌~짝 보이제? 저기는 사람 죽으믄 놔두던 곳이었어, 장례식장이였다니께~”라고 증언한다.

정부 보조를 받고 운영되던 화호중앙병원은 1972년 운영난으로 결국 폐쇄됐다. 이후 한때 화호여고의 교사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방치된 모양새다.

일제 강점기 기억하고 있는 마을 곳곳

한 마을 주민이 “그 당시 병원이었을 쩍에 무진장 사람들이 오갔었찌”라며 “창고 오른쪽 뒤편에 집 봤능가? 거기는 구마모토 집이었어, 언능 따라와봐, 여기에 일본식 기와가 고대로 있당께”라고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구마모토가 살았던 화호리 구 일본인 농장가옥은 지난 2005년 11월 11일 등록문화재 제215호로 지정됐다. 이 일대는 근대 일식 주거 건축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적산가옥이 모여 있지만, 농장가옥만 유일하게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아쉽게도 농장가옥은 관리가 전혀 안 되고 굳게 닫혀있다. 현재 개인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을 주민은 “얼마 전까지 여그에 사람도 살았당께, 집 속에 봐봐, 무섭쩨? 여기 주인이 안 좋게 되고 나서 다 떠나부렀어”라고 알려준다.

농장가옥 뒤편에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인 듯한 커다란 당산나무가 있다. 수백년 된 당산나무만이 화호리의 지나온 역사를 지켜봤을 터다.

정읍 신태인읍 화호리는 근대 역사가 남긴 흔적들이 있지만 전북 군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화호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일식 가옥들은 부서지고, 쓰러지기 직전인 곳이 많다.

서글픈 우리 민족의 삶이 스며있던 곳이 사람들의 아픔을 치료해주고, 달래주던 병원으로 뒤바뀐 곳. 아무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오래된 역사 속 장소로 기억되다 마침내 잊혀질 듯 싶다.

대동문화 97호 [2016 11,12월호]

김다이 기자  -08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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