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결에서도 가을이 묻어난다. 들녘에선 허수아비를 희롱하는 참새들의 날갯짓이 부산하다.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의 요란한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흙돌담에 매달린 조롱박과 수세미도 가을을 노래하고 있다. 단풍나무 잎도 시나브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보림사 비자림으로 간다. 이맘때면 비자 열매가 지천에 흐드러졌을 풍경이 그려져서다. 보림사는 장흥 가지산이 품은 절집이고, 비자나무 군락이 이 절집을 감싸고 있다.

숲에 비자(榧子)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500그루가 넘는다. 수령 300년이 넘은 것도 있다. 소나무와 단풍나무, 참나무도 많다. 비자나무와 소나무 아래에는 제멋대로 자란 차나무가 무성하다. 천연의 숲이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숲’으로 인정을 받았다. 산림청과 (사)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 유한킴벌리가 공동 주관한 대회였다.

‘청태전 티로드’는 우리 발효차의 효시 상징

숲길이 다소곳하다. 걸으면서 산책하기에 좋다. 길이 차밭과 비자나무 사이사이로 나 있다. 한낮의 햇볕을 한 올도 허락하지 않는다. 비자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도 마음을 다독여준다. 숲길의 이름을 ‘청태전 티로드’로 붙여 놓았다.

청태전은 1200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근세까지 장흥을 중심으로 남해안에 존재했다. 우리 발효차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찻잎을 햇볕에 말리고 찧어서 만든다. 엽전 모양의 덩이처럼 생겼다고 ‘떡차’, ‘전차’로도 불린다.

차나무가 많은 비자나무 숲에 앉아서 쉴만한 의자와 산림욕대가 군데군데 놓여있다. 걷다가 잠시 앉아서 비자나무가 내뿜는 향을 호흡할 수 있다. 차향과 솔향도 코끝을 간질인다.

비자나무는 껍질이 회색빛 도는 갈색이다. 잎은 뾰족하며 짙은 녹색을 머금고 있다. 생김새가 한자 비(非)를 닮았다. 나무의 질이 좋아 바둑판이나 가구의 재료로 쓰인다.

비자 열매를 날것으로도 먹는다. 아몬드처럼 생겼지만, 그보다는 조금 크다. 비자나무 아래에서 주워 먹는 비자가 달달하면서도 조금 떫다. 하루에 네댓 개씩 먹으면 좋다. 기침을 멎게 하고 배변에 효능을 지니고 있다. 열매의 기름을 짜서 먹기도 한다. 비자식혜도 독특한 맛을 지닌다고. 숲길은 그리 길지 않다. 절집의 요사채를 내려다보며 솔방솔방 걸을 수 있다. 절집의 품격까지 더 높여준다. 참 좋은 비자림이고, 야생의 차밭이다.

‘가난과 영화는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뜻대로만 되리요/ 나는 내 멋대로 유유히 지내왔노라/ 고향 하늘 바라보니 천리길 아득하고/ 남녘을 떠도는 내 신세 허망한 물거품/ 술잔을 비삼아 쌓인 시름 쓸어버리고/ 달을 낚시삼아 시를 건져 올리네…(후략)’

보림사 부도군 앞에서 봤던 김병연의 시 ‘보림사를 지나며’가 떠오른다. 방랑생활을 하면서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떨치지 못한 그의 애잔함이 짙게 배어있다. 내 마음도 잠시 숙연해진다.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寶林)

비자림이 감싸고 있는 보림사도 편안한 절집이다. 웅장하지 않아서 더 정겨운, 마음의 안식처 같다. 보림사(寶林寺)는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정착했다. 신라 말 헌안왕(860년경) 때 원표대사가 터를 잡았다고 알려져 있다. 산세가 인도의 가지산, 중국의 가지산과 같다고 ‘가지산’이라 이름 붙었다. 인도와 중국의 보림사와 함께 동양의 3보림(寶林)으로 불린다. 원감국사와 각진국사 등 대선사들이 여기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사세가 약해져 송광사에 소속돼 있지만, 절 안팎에 귀한 유물이 많다. 국보 2점과 보물 8점을 보유하고 있다. 삼층석탑과 석등,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국보로 지정돼 있다. 보조선사 창성탑과 창성탑비, 목조 사천왕상, 동부도와 서부도는 보물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도 13점을 간직하고 있다. 규모나 유명세에 비해 문화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보물창고’다.

절집 입구의 외호문(外護門)도 색다르다. 담장과 연결된 문에서 용 두 마리가 반겨준다. 오른 편 용은 입을 벌리고 있다. 부릅뜬 눈은 뭔가를 찾는 것 같다. 왼편의 용은 입안에 여의주를 하나 물고 있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흡족한 표정이다. 절집으로 들어갈 때는 빈손이지만, 나올 때는 보물 하나씩 갖고 나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마음속의 보물이다.

외호문을 지나서 만나는 사천왕상도 범상치 않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동서남북, 사천국을 다스리는 왕들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이다. 1515년에 조성됐다. 우리나라에 있는 목조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보물이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대적광전과 마주한다. 그 앞에 남북으로 세워진 두 기의 탑이 있다. 2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었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과 닮았다. 경문왕(870년) 때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석등에도 세월의 더께가 묻어난다. 국보로 지정돼 있다.

대적광전의 불상도 진귀하다.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이다. 신라 헌안왕(858년) 때 김수종의 시주로 만들었다. 당시 쇠 2500근이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에 있는 철불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한국전쟁 때 피눈물을 흘렸다는 철불이다. 비 내린 뒤에 흘러내린 철물이 와전됐다고 한다. 국보로 지정, 보존하고 있다.

대웅보전 뒤쪽에 있는 보조선사 창성탑비와 창성탑은 보물이다. 보조선사는 신라 때 주지였던 지선에게 헌강왕이 내려준 시호다. 보조선사의 사리를 모셔둔 창성탑은 왕이 내려준 탑 이름이다.

절집 마당의 단풍나무 고목 옆에 있는 약수도 별나다. 겉보기에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지만 한국자연보호협회가 ‘한국의 명수’로 지정한 약수다. 수량이 일정하고 미네랄이 풍부하다. 비자림과 차밭에서 뿜어내는 자양분 덕분이다.

약수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면서 코스모스와 어우러지는 전각을 보는 것도 보림사에서 맛보는 여유다.

가는 길

보림사는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에 있다. 화순읍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보성·장흥 방면으로 가다가 이양으로 나간다. 이양에서 839번 지방도를 타고 청풍면을 지나 곰치를 넘으면 보림사로 연결된다.

가볼 곳

유치자연휴양림이 가깝다. 심천공원도 있다. 언덕 위에 큰 물방울 모양의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소나무숲과 어우러진 정자 부춘정과 용호정, 동백정도 멋스럽다. 옛 장흥읍성을 따라가는 천지인 둘레길은 장흥읍내에 있다. 장흥동학농민혁명 기념관과 기념탑도 있다. 맛과 흥에 취할 수 있는 토요 풍물시장도 별난 재미가 있다. 억불산으로 가면 편백숲 우드랜드가 있다. 별들의 향연을 볼 수 있는 정남진 천문과학관도 있다.

여행 문의

보림사 ☎061-864-2055

장흥군 문화관광과 ☎061-860-0380

대동문화 97호 [2016 11, 12월호]

이돈삼 전라남도 대변인실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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