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광산구 임곡동과 본량동 경계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정상에 뾰족한 암릉이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독특한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 바로 용진산(聳珍山)이다.

해발349m인 이 산은 동쪽으로는 황룡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어등산과 마주하고 있다. 서쪽으로 날카롭게 솟아있는 봉우리를 ‘석봉(石峰)'이라 하고 완만하게 굽어있는 동쪽을 ‘토봉(土峰)'이라 한다. 석봉의 우뚝 솟은 모습에 사람들이 우리말로 ‘솟돌뫼’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자어로 다시 고친 것이 오늘날의 ’용진산(聳珍山)’이 되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석봉’의 기세는 광주 사람들의 기상을 닮아 당차기 그지없고 부드러운 곡선의 ‘토봉’은 남도 사람들의 포근한 인심을 담고 있다. 황룡강 일대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근처 월봉서원은 광주 8경중의 한 곳이다.

삼봉 정도전 길을 잃고, 고봉 기대승 봄에 취하다

조선의 설계자이자 개국의 터를 다진 삼봉 정도전 선생이 나주 회진현 거평 부옥에서 3년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이상과 현실 사이를 고민하며 전국을 유랑할 때 이 곳 용진산에서 며칠을 머물며 지냈다고 한다.

“가을 그늘은 막막하고 사방 산은 비었는데/ 지는 잎은 소리 없이 땅에 가득 붉었구나/ 시내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 돌아갈 길 물으며/ 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줄을 몰랐구나/”

삼봉 정도전은 용진산의 가을 정취에 흠뻑 취해서 돌아갈 길을 잃고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되고야 말았다.

그러고 보니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됐을 때 민심을 얻고자 ‘민생투어’를 하는 정치적 트렌드는 유사하다.

“고향 산에 봄비 내린 뒤라/ 꽃 피고 고사리도 돋아나누나/ 부질없이 꽃을 찾아 떠나갔다가/ 달빛에 시 읊고 돌아오련다/ 송료(松醪)는 동이 가득 익어 가고/ 돌나물은 뿌리내려 향기롭네/ 취해 눕자 바람이 귓가에 나니 / 도연히 세상일을 잊어버리노라"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인 고봉 기대승 선생도 고향인 이곳 용진산에 올라 봄을 노래했다.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

아름답게 ‘솟아오르는 보배’ 용진산에는 몇 곳의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다. 남쪽의 깊숙한 곳에 한말 대학자이며 애국지사인 후석 오준선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던‘용진정사’가 있다. 이곳은 광산과 나주출신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면암 최익현 선생을 비롯한 전해산, 김태원, 오성술 장군 등이 오준선 선생과 함께 항일 전략을 세우고 의논하던 곳으로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7호다.

북서쪽 기슭에는 400년의 사연을 품고 있는 유서 깊은 정자, 신선이 학을 타고 노닌다는 가학정(鴐鶴亭)이 있다. 가학정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폐광으로 추정되는 동굴이 있는데 용진산은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서도 이름 있는 금광이 있었던 곳이다. 아마 그때 흔적이 아닌가 싶다. 이 때문에 과거 임곡 사호동 일대는 작은 도시형태를 이뤄 번창하였으며 한때 사호동이 부자 동네로 소문이 났었다.

동굴을 지나 약 100여 미터를 오르면 ‘불당일월 용진수석(佛堂日月 聳珍水石)’이란 명문과 함께 왼쪽 암벽 중앙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1호인 ‘용진 마애여래좌상’이다. 용진 마애여래좌상을 지나 약 20여분 정도 오르면 가학정(鴐鶴亭)을 만날 수 있다.

가학정의 건립 역사는 400여 년 전 조선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피난 할 때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53대손이며 죽산 박씨의 중시조인 박경(朴璟)은 벼슬도 없이 백의종군(白衣從軍)하며 선조를 호위하여 공훈을 세운다. 민간인의 신분으로 분연히 일어나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며 피난길에 오른 선조의 뒤를 따라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수합하는 등의 다각적인 노력으로 당시의 왜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조선의 조정과 관료들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그들은 허구한 날 당파 싸움으로 많은 충신과 백성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고, 전란(戰亂)이 닥치자 나라를 구하려는 의지는커녕 제 한 목숨 건지기 위해 도망치기에 바빴다. 나라를 구 한 사람들은 ‘죽림처사’와 같은 의병들이었다.

그의 이러한 공훈을 높이 평가한 조정에서 이에 상응하는 벼슬, 당시 시전과 물가 등을 관장하는 관서인 ‘평시서직장’의 관직을 내리기 위해 세 번의 부름이 있었음에도 나아가지 않고 “한가한 곳을 찾아 조용한 야인으로 살고 싶다”는 그의 본뜻을 상소로 올려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러한 뜻을 가상히 여긴 선조는 특별히 궤장과 죽림처사(竹林處士)의 호를 하사 하였으며 국고로 학문을 위한 성성재(惺惺齋)와 유락을 위주로 한 가학정 등의 정자를 지어 그의 아우인 박종(朴琮)과 함께 이곳에서 학문과 풍류의 삶을 살도록 했다.

이렇듯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은 전공(戰功)의 포상을 바라지 않았으며 부귀와 공명을 탐내지도 않았다. 진정한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정부 공공기관 인사철만 되면 선거 때 세운 공적을 과대 포장하여 내세우며 혹시라도 ‘한자리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휴대전화도 끄지 못 한 채 각종 매스컴에 나와서 노골적으로 ‘용비어천가’ 혹은 ‘사미인곡’을 불러대는 한물간 인사들, 즉 ‘일수거사(一水去士)’들의 낯간지러운 행태에 비하면 오늘날 시사 하는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가학정 현판은 내, 외부 2개가 있었으며 내부 현판은 1935년 중건 때 전남 화순 출신으로 구한말 교육자이자 민족운동가였고 호남화단의 시,서,화(時,書,畵) 삼절(三絶)로 일컬어지는 염재 송태회(宋泰會 1872 ~ 1941) 선생의 글씨다. 가학정은 1601년에 지어졌다가 일제강점기 때인 1935년 중건하고 1979년에 재 중수 하였으며 2007년 폭우로 무너져 버렸고 최근 2012년에 다시 새로 지었다. 정자에는 아무것도 없이 사라지고 여느 등산로에서나 볼 수 있는 모정 같은 형태로만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

원형보존은 문화재의 ‘존엄한 자아’를 지키는 일

비록 가학정의 원형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죽림처사의 역사적인 삶’, 풍류 속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의식해야 한다. 어찌 인간의 자아만 존엄하다고 고집할 수 있을까. 문화재는 저마다의 ‘고유한 자아’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의 가치는 그 ‘원형의 고유성’ 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가학정은 새로 지으면서 원형의 고유성과 역사성을 탈색시킨 사례다. 문화재 보호법 제3조에 따르면 문화재 보호의 기본원칙으로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원형유지는 문화재의 본래 모습을 바꾸지 않고 제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보존하는 것이다. 특정지역에서 역사발전 과정에 따라 이루어진 산물이기 때문에 원형이 바뀌게 되면 그 ‘존엄한 자아’를 잃고 생명력을 잃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보존 학예실장을 지낸 문화재 보존 전문가 김주삼 선생은 그의 저서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에서 “문화재 보존은 창조를 생명으로 하는 예술가들처럼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그 방향이 좌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예술품을 다루는 보존 전문가는 생명 존중이라는 윤리의식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는 의사에 견줄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문화재의 보존과 복원은 여느 건축물을 수리하거나 아파트의 내부 개조공사 와는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어 문화재의 존엄한 자아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동문화 97호 [2016 11,12월호]

임영열 시민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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