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공모전은 작가로의 등용문이었다. 하여, 공모전을 향하여 부단히 작업하며 자기 실력을 일궈가곤 했다. 공모전을 통해 자기 예술세계를 드넓히는 것은 물론 작가로 우뚝 서는 게 일반적인 로드맵이었다. 조규일 화백(84·보성백민미술관장)은 공모전에 무려 18회 입상하는 진기록을 갖고 있는 작가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전남도전, 목우회 등에서 기량을 뽐내며 입상의 영예를 안았다. 보기 드문 사례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보성 대원사길 백민미술관

광주서 벌교·고흥 가는 길로 가다보면 주암호가 나온다. 주암호 못 미처 우로 틀면 정말 아름다운 길과 맞닥뜨린다. 대원사 가는 길이다. 그 중간 쯤 언덕배기에 옛날 폐교를 단장해 운영되고 있는 백민미술관이 있다. 10여년 만에 다시 찾는 이 길은 언제 와도 정겹다. 가로수가 더욱 무성하다 못 해 빽빽하다.

나뭇잎 끄트머리에 가을이 연하게 묻어있다. 이제 나날이 그 가을은 짙어질 것이고 빨갛게 달아오를 것이다. 백민미술관 가는 길에서 필자는 그렇게 초가을을 마주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더 달려 찾아간 백민미술관에선 가을길보다 더 정겨운 조규일화백이 마치 천년 만에 만난 듯 버선발로 반긴다.

미술관 옆 건물 2층에 마련된 작업실엔 크고 작은 캔버스에 인물들이 자리해있다. 노화가의 캔버스에 인물이 가득한 것은 어떤 의미일까. 노화가가 답한다. “반백년 넘는 그림 인생 중 여러 소재를 많이 다뤘지만 인간만큼 심금을 울리는 대상은 없었다.”고. 그리고 미술사적으로도 인물 데생은 아주 중요하다며 다른 것을 잘 그려도 인물 데생을 잘 그리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고 덧붙인다.

다른 대상물의 경우 비율이 정확히 맞지 않아도 얼른 티가 나지 않는 반면 인물의 경우 조금만 맞지 않아도 누구나 알아보기가 쉽다. 전문가는 물론이거니와 일반에게도 인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금방 알 수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인물을 그릴 때는 그만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인물화 사이사이로 수련이 눈에 띈다. 10여 년 전 방문했을 때 노화가가 꽂혀 있던 대상이 바로 수련이었다. 대원사 주변과 백민미술관 인근에 그리고 수련이 많기에 그걸 그렸던 거다. 최근에도 수련 그리기를 꺼리지는 않지만 수적으로 인물화보다는 적다.

흰 두루마기 초로의 노인 오지호 선생과의 인연

오래 전부터 미술계에서 미술노동자로 낙인 찍혔었다. 미술평론가 유준상 씨는 그의 작업을 두고 활달한 운 필력으로 운영되는 일회성의 표현양식은 아니다고 일갈했다. 짙은 질감이 마치 부식토가 쌓여서 지층을 형성하는 것 같은 안괴로 구성되는 세계이며 그래서 토착적이고 서민적이라고 평했다.

다르게 비유하면 투박하게 손으로 빚은 흙덩이를 하나하나 쌓아서 토담을 구성하는 전체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게 조화백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만큼 무기교이고 고졸적인 분위기를 띤다. 흙덩이는 전체를 구성하는 제어단위이며 몽당붓으로 짤막하게 뭉개 바른 것 같은 색 면이 흙덩이와 같다는 것. 이것은 모종을 계속한 결과 한 마지기의 땅을 논으로 변환시키는 일꾼의 작업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게 유씨의 지적이다.

유씨의 말마따나 조화백은 무더위에도 묵묵히 비지땀을 흘려가며 붓질을 하고 있었다.

미술노동자로 대변해도 좋을 법한 이 노화가는 남도 구상미술의 대가인 오지호화백의 애제자다. 조선대 미술과에 입학하면서 오지호선생과 만난다. 그 첫 만남을 조화백은 이렇게 표현한다.

"웬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다정스럽게 보이는 한 초로의 노인이 미술실기 시험장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나는 그 노인이 아마 어떤 학생을 찾는 학부모인가 했다. 그런데 그 분이 바로 미술과 교수님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오지호선생은 그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다. 화가들이 그림만 그렸지 무식하다는 말을 듣기 쉬웠던 게 당시 현실이었다. 스승은 그런 현실을 보기 좋게 뒤집어놓기 일쑤였다. '미와 회화의 과학'이라는 우리 미술사상 처음인 거창한 논리를 30대에 완성했고 50대 부턴 문하생들에게 강의하곤 했고 그 밖에도 '태양과 회화의 관계''순수회화론' 등을 통해 뽀얗게 안개에 싸여있던 미의 세계를 훤히 밝혀주었다.

사재 털어 고향의 폐교활용 미술관 열다

스승의 가르침을 은연중에 물려받는 조화백 역시 미술이론 공부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본 미술잡지를 구독했고 그 외에 문예관련 서적도 열심히 탐독했다. 폴 세잔느와 에밀 졸라가 주

고받은 편지를 모아 만든 책도 일본판으로 접했다. 그 때의 충격 아닌 자극을 기점으로 조화백은 스승과 끊임없이 주고받았던 서신을 소중히 간직했다.

그게 벌써 50여 통이나 됐다. 훗날 스승의 전람회에서도 공개돼 미술계는 물론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조선대 2학년 때 조화백은 진도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한다. 원래는 스승의 큰 아들인 오승우씨가 가기로 된 자리였으나 대신 소개해주어 진도중학교로 내려가 후진양성에 힘쓰게 된다. 조화백 자신은 마치 자신이 타이티로 떠나는 것 마냥 들떠있었으나 정작 스승은 안쓰럽게 여겼다.

해서 시간되는 대로 그림을 그려오게 해서 지산동 초가에서 보아 주셨다. 이 부분은 이렇게 저 부분은 저렇게 등 일일이 그림 지도를 해주셨다. 이곳은 옆으로 문질러서 색깔을 내라, 여기의 색깔을 이렇게 해서 저 부분에 칠해라 등 소상한 가르침이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스승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진도중학교에서 13년간의 미술교사 생활을 접고 1968년 광주 유은학원으로 옮겼으나 11년 만에 그만두고 아예 전업작가로 나선다.

전업작가로 활동하기 1년 전 다녀온 넉 달간의 유럽미술기행이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하루 종일 작업만 해도 생전에 명작을 하나 남길까 말까한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을 그는 떨쳐버렸다. 이후 전업작가로서 개인전과 각종 기획전, 단체전 등에 참여하면서 왕성한 활동력을 보인다. 남도 구상화풍의 적자로서 그는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개인전 때마다 그는 큰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베스트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작품을 위한 외국여행도 부지기수로 다녔다. 미술기행 때마다 쪼그라드는 작가로서의 존재를 추스르며 다시 작업에 나서야 했다. 그 와중에 그는 미술관 설립 작업을 벌인다. 사재를 털어 고향 보성의 한 폐교를 리모델링, 백민미술관 개관의 기초를 닦는다. 그리고 수 개국을 다니며 수집해놓은 작품과 자신의 그림, 그리고 미술관련 자료 등을 그곳에 기증했다. 그가 모은 도록만 해도 수 만권. 아마도 광주전남에선 가장 많은 양을 모은 것일 거라며 껄껄 웃는다.

그의 미술에 대한 큰 뜻을 아들들과 며느리가 잇고 있다. 큰 아들 조현씨는 조선대 미술대학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고 둘째아들 조솔, 박민광 내외는 러시아 레핀미술학교를 나란히 유학한 뒤 현재 광주에서 조각가로 활동 중이다. 조화백은 자신의 미술인생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아직도 전라도의 산하가 고스란히 대작들에 내걸리고 연꽃이 함초롬히 피어나며 다기다양한 표정의 인물들이 그의 붓질아래 완성되어 간다.

대동문화 97호 [2016 11,12월호]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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