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날 강진 병영성으로 향했다. 아주 가까운 지인께서 늘 그랬다. ‘각시 팰라고 날 받아 놓으니 장모 온다고.’ 연일 온화한 기온으로 가벼운 옷차림이었는데 하필 강추위라. 두꺼운 옷도 모자라 내의까지 껴입을 판이다.

강진은 남도답사 1번지답게 역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풍부한 꺼리가 많아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남해바다가 강진만을 이루고 풍부한 어족자원과 넉넉한 물산이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는 것이겠다.

바닷가 인근으로는 정약용이 유배생활 중 ‘목민심서’ ‘경세유포’ ‘흠흠심서’ 등을 집필한 다산초당이 자리하고 백련결사를 이룬 사찰 백련사, 한우를 닮은 가우도가 자리한다.

내륙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무엇보다도 자랑스러운 강진청자박물관이 있다. 그 옆에 민화박물관도 자리한다. 강진읍으로 들어오면 민족시인 김영랑의 생가가 있고 그 옆엔 정약용이 유배지로 강진 땅을 처음 밟은 후 4년간 머물렀던 사의재라는 주막이 있다. 서쪽으로는 무위사와 백운동 정원, 월출산 남쪽의 차밭이 자리한다.

장흥 쪽으로 치우친 세 개의 조그마한 면들이 있다. 작천, 옴천 그리고 병영이다. 작천은 전라남도에서 운영하는 동물시험소가 있고 전남농업기술원에서 운영하는 축산연구소가 자리 잡은 지 오래전이다. 옴천 또한 옴천사라 하여 선각종 총본산의 고찰이 있는데 크고 작은 돌탑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사찰이다.

그곳을 지나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병영면 소재지에 위치한 병영성이 기나긴 역사를 품은 채 묵묵히 서 있다. 나를 반기듯 손짓한다. 어느새 추위는 사라지고 없다.

용생구자(龍生九子) 공복(蚣蝮)과 우아한 병영성

병영성에 올라서기에 앞서 병영성 홍교(虹橋) 앞에 섰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129호로 지정된 이 무지개다리는 병영면 성동리에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후기(18세기)에 축조된 것이다. 류한계 정승의 금의환향을 기념하기 위해 축조된 다리로 경술년(1730년)에 숭록대부에 오른 류한계를 위해 축조 되었다고 전해진다.

병영의 관문인 배진천에 건축된 홍교는 일명 ‘배진천 다리’라고도 하는데 장방형 화강석재 74개를 26열로 정교하게 무지개 형으로 서로 짜 맞추고 잡석을 채워 보강한 후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교 상단 중앙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머리를 치켜든 모습은 용생구자(龍生九子) 중 여섯 째 아들인 공복(蚣蝮)이다. 용생구자란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동물로, 용이 낳았다는 아홉 자식을 가리킨다.

각각 그 모습과 성격이 다르며 그 성격에 맞는 장소에서 각자 활약은하나 용은 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을 "용생구자불성룡"(龍生九子不成龍)이라고 한다. 이 다리에 배치된 공복(蚣蝮)은 물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강을 따라 들어오는 악귀들을 막아준다고 하여 물을 가로지르는 다리의 기둥이나 아치 부분에 주로 조각을 새긴다.

매우 해학적이며 그 의장 또한 만인월교의 외경 신앙을 함축성 있게 시사하고 있는 듯하다.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한참을 넋을 잃고 있다가 강한 바람이 귓불을 때리는 바람에 정신을 가다듬고 병영성으로 향했다.

병영성 동문(東門) 주차장에 도착하여 주차를 하고 동문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성 안쪽에서는 옛 건물터를 발굴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동문(東門)에 올라 성곽을 훑어봤다. 그다지 넓지는 않은 듯하다. 성 안쪽이 온통 파 헤쳐진 것으로 보아 거의가 건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병영성은 조선조 600여 년 간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성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 장군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눈(雪)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대동지지"나 "색지"등에 따르면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599년(선조 32)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8년여 동안을 억류생활 했던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 때 폐영 되었다.

전라병영성지는 당초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다가 1997년 국가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성곽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한 차원 높이기 위해 성곽 등을 복원하였으며, 관련유적으로 하멜체류지, 한 골목, 병영홍교, 비자나무, 은행나무 등이 있다.

네덜란드인 하멜의 꿈이 무너진 흔적을 보다

병영성을 돌아 나와 하멜기념관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풍차와 하멜의 동상이 기념관 앞에 서 있다. 둥근 모양의 기념관은 보기에도 정겹다. 그들이 추구했던 무역의 꿈도 잊은 채 조선인들에 의해 억류되어 7년이라는 긴 세월을 병영성에서 보내야 했다.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은 네덜란드 호르큼시에서 태어나 동인도회사 소속의 선원이자 서기로 근무하였다. 1651년 바타비아에 도착하여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하던 중 1653년 8월,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하멜일행이 제주도에 난파하여 1666년 9월 일본으로 탈출할 때까지 조선에서 보낸 시간은 13년 28일이다. 이 기간 동안 이들은 제주, 서울, 강진, 여수 등 여러 곳을 전전 하면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1656년부터 약 7년 동안 병영성에 억류되어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구걸을 하기도 하고 나막신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하멜일행의 병영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으며 민간인, 승려 등과 친밀하게 교류하였다.

강진군은 우리나라를 최초로 서양에 알린[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8년 네덜란드 하멜의 고향인 호르큼시와 자매결연 하고 이를 계기로 문화적 교류를 통해 2007년 하멜기념관을 개관하였다.

하멜기념관은 목조건축으로 타원형이다. 타원형은 하멜이 표착한 남도를 상징하며 맞은편 사각형 건물은 망망대해에 표류한 선박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상징한다. 하멜기념관은 하멜이 조선에 표착한 역사적 의미 및 17세기 국제 교류사의 조사연구, 유물전시를 통한 교육, 더 나아가 한국과 네덜란드 간의 문화적 교류 증대를 위해 역할을 다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병영마을의 하멜식 담장 골목마다 장관 이뤄

하멜기념관을 나와 마을 안길로 접어들었다. 순간, 저절로 터지는 감탄사의 연발이다. 온통 자갈과 흙으로 형성된 돌담이다. 아기자기하고 올망졸망 작고 아담한 담장이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강진 병영마을은 옛 병마절도사의 영(營)이란 명칭에서 유래된 마을로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주위의 수인산, 성자산, 옥녀봉, 별락산, 화방산 등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형태로 형성되어 있다. 병영성 덕분에 빠르게 상업의 발달을 이룬 곳이다. 병영마을의 담장은 전체적으로 돌과 흙을 번갈아 쌓은 토석담으로 하부는 비교적 큰 화강석을, 중단 이후로는 어른 주먹 크기 정도의 비교적 작은 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렸다.

담 위에는 기와로 지붕처리를 하였다. 또한 담장 역할을 하는 부속채도 담장과 같은 높이와 방식으로 축조되어 서로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담장의 높이는 2m 정도로 높은 편인데 이는 병영마을이라는 특성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마을 안길이 직선형으로 되어있어 담장이 한층 정연해 보인다.

특히, 하멜 일행이 1656년부터 1663년까지 7년간 이 곳에 머무는 동안 그들로부터 습득한 것으로 전해오는 담 쌓기 방식인, 중단 위쪽으로 얇은 돌을 약 15° 정도 눕혀서 촘촘하게 쌓고, 다음 층에는 다시 엇갈려 쌓는 일종의 빗살무늬 형식이라 부르는데 이 곳에서는 이 형식 을 ‘하멜식 담쌓기’라 부른다.

타 지방과 다른 독특한 방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동네에 쌓여있는 담장 길이만 해도 약 10.000m정도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병영마을은 등록문화재 264호로 지정되어 정부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병영성과 병영마을 가는 길은 광주에서 영암을 지나고 청풍원 휴게소의 커브 길을 돌자마자 우측으로 나가는 옛길을 탄다. 옛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왼편의 지하도로를 선택하여 약 5km정도 들어가면 병영면이 나오고 홍교와 병영성, 그리고 하멜기념관 담장마을을 차례로 볼 수 있다.

대동문화 98호 [2017 1,2월호]

이동호 기자  ddmh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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