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가 자욱한 아침이다. 장성 가는 길은 고속도로도 좋지만 여유로운 국도를 타고 가는 것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예전에는 못재를 넘어 다녔지만 지금이야 어디 그런가. 터널이란 기술을 한껏 이용해 못재에도 큰 굴이 뚫리고 그 덕분에 장성은 광주와 더욱 가까운 거리가 되었다. 상무대가 광주에서 장성으로 옮겨간 이후 장성은 군사도시가 된 기분이다.

장성읍에서 상무대로 가는 길을 따라 삼계면 능성리로 길을 바꾸어 들어가 본다. 벼들이 수확된 논에는 황량함이 펼쳐지고 찬바람 에이는 들을 지나면 능성리 한켠에 성산이란 마을이 있다. 팔마산 남지맥인 매봉 서남쪽 해발 약 60여미터에 자리 잡은 성산마을은 마을이름에서는 옛 성터라도 있음직한 냄새가 나는데 정작 동네사람들은 성이라고는 구경을 못했다고 말한다. 혹시 토성이라도 있는 건 아니었을까 의구심은 가지만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효행이 어린 응벽정

성산 마을 입구에 서면 연륜이 깊은탓과 전쟁의 상흔을 품고 있는 당산나무를 만나게 된다. 마을회관과 비석군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 느티나무는 6.25때 화재를 만나 옛 모습을 잃었다고 한다. 그 통에 시원한 가지가 쭉쭉 뻗은 모습은 볼 수 없다. 속이 빈 채로 세월을 버티고 있을 뿐이다.

장흥고씨 상계를 살펴보자면, 중시조 고중연은 제주고씨 1세조 고말로의 10세손으로 고려 말 제2차 홍건적 침입 때 공민왕을 호종해 호종공신으로 책봉되면서 장흥백에 봉해졌다. 이로써 장흥고씨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고중연은 일명 고복림이라 하며 시호는 양헌공이다. 그의 아들 고합은 음서로 좌우위보승별장을 지내고 문과후 지신사판상서를 지냈다.

여말선초에 이르러 그 아들 고백안은 지영주사 보승중랑장 참의를 역임하고 영광으로 은둔했다. 장성 입향조는 4세로 병부시랑 북부상서를 지낸 삼계(森溪) 고협이다. 그는 태종과 동문수학을 했다. 태종이 신부(臣傅)라는 호를 지어 주는데 신하 겸 스승으로서 자신을 도와달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 익원대군 왕소의 사위였던 그는 태종이 호조참의를 제수했으나 고려의 의를 저버리지 않는다며 벼슬을 마다했고 아울러 그의 두 아들인 고열과 고직도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거절했다.

일곱마리 자라를 풀어주고

조선조 첫 출사한 6세 고상지는 세종대왕과 같은 청주한씨 외손이었다. 외가 쪽으로 6촌 계안을 만들었는데 서른세 명의 계원 중 서열이 열세 번째였다. 그는 창신교위 충좌우부사직에 올랐다. 부인되는 광산김씨가 태몽에 용왕이 나타나 자신의 자식들이 잡혀 있는데 이들을 살려주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겠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보약으로 쓰기 위해 일곱 마리의 자라를 솥에 삶으려 하고 있어 급히 중지하고, 능성리 개울에 풀어주었다. 김씨 부인은 7형제를 두어 번창하는 가문이 되었다. 고씨들이 자라를 먹지 않는 이유라 한다.

진사공파 파조 고자신은 고협의 증손으로 고상지의 일곱째 아들이다. 그 아들 고습의 호는 초연정(超然亭)이며 중종 1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승지, 공조정랑을 지낸 청백리이다. 고상지의 넷째이자 고자신의 형인 고자검의 증손자가 창의사로 알려진 고경명이며 그 아들 고종후와 고인후가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했다.

10세 고문두는 호는 운봉이며 자신의 고손자이다. 자하(紫霞) 변경윤, 추담(秋潭) 김우급과 교유하며 학문을 논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6남1녀를 두었다. 13세 고준은 고문두의 손자로 호는 능암이다. 옥강 송명현, 명재 윤증과 더불어 학문을 논했다.

14세 고가현의 호는 존재이다. 그는 준의 셋째로 태어나 천성이 강직하고 총맹 했으며, 학문에 조에가 깊었다. 이인좌의 난과 소론과 노론의 당쟁으로 구너력 침탈이 심함을 한탄하고 스스로 벼슬을 나가지 않았다. 대신 학문을 닦으며 후진 양성에 전념해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큰교리 작은교리

고응붕은 고가현의 장자로 호는 능계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해 잠시도 자식의 도리를 잊은 적이 없었으며 모친이 중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려 10일간 연명케 했다. 상을 당해서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슬퍼했다고 한다. 바른 행실로 남의 잘못이나 허물을 입 밖으로 발설치 않았으며 자신이 가진 재물을 이웃을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성산마을 앞에 그를 기념한 효자비가 교리들의 비를 양옆에 두고 세워져 있다.

고시면은 고만로의 손자이자 고망겸의 아들로 호는 석정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형, 홍문관 교리 등을 역임했다. 1866년에는 최익현과 함께 지평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고시협은 호가 간암이다. 고시면의 동생으로 고종2년 과거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을 역임했다. 삼사의 연합 상소에 불참한 혐의로 순안으로 귀양을 갔으나 곧 풀려났다. 그 후 홍문관 부교리를 제수했으나 사양했고 임금의 권면으로 홍문관 교리에 취임하니 후손들은 고시면과 고시협을 일러 큰교리 작은교리 할아버지라 부른다.

고시한은 고만로의 손자이자 고일겸의 아들로 호는 죽곡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문학에 자질이 뛰어났다. 26세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고시경의 호는 수산으로 고봉겸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으나 갑오경장을 빌미로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고시기는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을 역임했으며 사헌부 지평을 제수했으나 나라에 도움 될 일을 하지 못하였다하여 사양하고 귀향했다.

한국전쟁으로 종택 소실되고 사당도 사라져

종택에 들어서니 우측으로는 산자락에 이어진 동산이고 거기에는 다듬어진 정원수들이 예전에 풍족히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높다란 곳에 자리한 안채를 보니 중압감이 몰려온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이미 종택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그저 시골의 시멘트 한옥으로 꾸며져 있음이 못내 아쉽다. 안채 아래쪽에는 사랑방 자리에 창고와 사과 저장고가 들어섰다.

파조의 10대 종손 되는 고재진(1962생)님은 어려서 부친을 잃어 주변에 있는 일가친척의 도움과 특히 작은아버지 되는 고광설님의 큰 도움으로 지금까지 바른 종손으로 설 수 있었다. 그는 현재 농업경영인이자 장성군 군의원(무소속)으로 활동 중이어서 가문에 얼룩이 지는 일은 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종택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산사(道山祠)가 있다. 장흥고씨 중시조 고중연, 고합, 고협, 고열, 고직, 고상지, 고상덕, 고운, 고경리, 고문두, 고순후, 고유후, 고부천을 음력 3월 1일에 제향 하는 곳이다. 삼서 두월리에는 영모재를, 삼계 덕산리에는 천산재를 두어 현조에 대한 숭모의 예를 다하는 집안이다.

집안에 내려오는 고문서 중 압권은 1782년에 고가훈이 생전에 자녀들을 위해 재산을 분배한 분깃문서다. 재산 분배의 대상자는 맏며느리 진주정씨, 차자 고응묵, 3자 고응수, 넷째며느리 광산김씨, 함평 월악사는 딸, 서자며느리 진주정씨, 서자며느리 무송윤씨, 서자며느리 금성나씨, 서녀 3명를 대상으로 하되 차자 고응묵의 등과로 인한 별급과 종손 고문수, 소실 정씨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그 글을 쓴 이는 조카 고응봉이다. 재산이 얼마나 많든지 가로가 5.5미터 세로 0.5미터이다.

비교적 사과농사가 풍작이라는 종손의 말에 어려운 농사일이지만 그래도 조금은 위안이 된다. 상큼한 사과를 물고 나서는 길이 싱그럽다. 동구 밖에 있는 응벽정은 주변 느티나무로 인해 여름에는 푸르름 때문에 심히 추울 것으로 보인다.

대동문화 98호 [2017 1,2월호]

최성은 전문위원  koindol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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