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월홍매’(臘月紅梅)로 유명한 순천 낙안성 금둔사엔 12월만 되면 벌써 매화나무에게 꽃을 내 놓으라고 재촉하는 관광객들이 들른단다. 납월이면 12월이니 그 성급함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런데 섣달 즉 음력 12월이다. 양력(陽曆) 음력(陰曆)이 공존하니 생기는 혼동이려니. 올 설, 음력 정월 초하루는 1월 28일이고, 납월은 2016년 12월 29일부터다.

다른 매화보다 꽃이 이른 이 눈 속의 붉은 매화는 음력 12월에 봄의 씨앗을 뿌린다. ‘납(臘) 전 매화 꽃부리 터지니’(梅蕊臘前破 매예납전파)라는 두보의 시 한 구절을 ‘두시언해’(杜詩諺解)는 ‘梅花ㅅ 부리 설 아래 터지니’(일부 현대어)로 번역했다. 훈민정음으로 지은 조선 초기의 이 글에 이미 ‘설’이란 말이 올라 있는 것이다. ‘언해’는 우리말로 옮겼다는 말이다.

양력은 (거의) 국제적인 표준이다. 그러나 아직 음력이 우리 삶의 여기저기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것은 설이나 한가위(추석) 같은 기쁜 날을 기리기 위한 까닭만은 아닐 터다. 우리말 ‘설’은 어원(語源)으로 따져 해(年 년)를 의미하는 한자 세(歲)에서 온 말로 본다. ‘낯설다’의 ‘설’이 새롭다는 의미를 구성하는 어원이라는 설 등도 있다.

설을 한 때 ‘민속의 날’ ‘구정’(舊正)이란 이름으로 구박하기도 했다. 실없는 이들의 몰지각한 책동이었다. 그런다고 설이 어디 가겠는가? 거대한 겨레의 힘이 응축된 이 빨간 날은 늘 우리의 본디를 돌아보게 하는 뜻으로 작동한다. 무엇보다, 기쁜 날이다. 양력으로 새해 첫째 날 1월 1일은 ‘양력설’이다. 1월 28일을 ‘음력설’이라 부르지 않는다. 설(날)이다.

달 보고 만든 ‘달력’이 음력이다. 달이 이지러지고 차는 삭망(朔望)의 주기(週期)로 한 달을 삼는 역법이다. 서양의 캘린더(calendar)을 우리말로 ‘달력’이라고 번역한 것에서도 우리의 역법이 음력을 토대로 했던 것임을 알겠다. 다만 ‘헷갈린다’거나 ‘외워야 할 것 많아 지겹다’는 식으로 음력에 대해 험담부터 늘어놓는 것은 옳지 않다.

셰익스피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뜨거운 사랑의 맹세에 달을 담보로 한 대사를 썼다. 로맨틱한 상상을 끌어내는 도구로 그들은 달을 유용하게 쓴다. 그러나 서양의 언어나 상징체계에서 달은 일반적으로 광기(狂氣)나 비정상적 상황의 반영이다. 신화부터 그렇다.

루나(Luna)는 ‘달의 여신’의 라틴어 이름이다. 그리스 신화에선 셀레네(Selene)다. ‘태양의 신’인 솔(Sol)의 상대역이다. 루나에서 나뉜 형용사 루내틱(lunatic)은 ‘미친 것 같은, 광기의, 터무니없는’ 등의 뜻이다. 정신병원(lunatic asylum) 극렬과격파(lunatic fringe) 등도 그런 ‘달’의 속뜻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인간의 굴레’ ‘서밍업’ 등의 저작으로도 유명한 영국작가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1919년)는 화가 고갱의 얘기를 주제로 담았다. 잘 나가던 대도시의 중년 주식중개인이 남태평양 작은 섬의 열정적인 화가로 변신하는 게 줄거리다.

그 ‘달과 6펜스’의 달은 ‘꿈의 세계’를, 몇 푼 안 되는 6펜스 짜리 동전은 ‘현실’을 각각 상징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달을 고갱의 광기를 표현한 것으로 읽는 시각도 여럿이다. 영화에서도 가끔 보는, 보름달 보고 짖는 서구의 늑대 이야기는 꽤 여러 갈래다. 달의 마력(魔力) 같은 상징성의 반영이겠다.

서양(미국)의 방식으로 자라난 요즘 세대들에게 달의 이런 이미지는 음력의 그 것과도 겹칠 터다. 잊혀져가는 모양새가 다른 여러 ‘우리의 것’들이 스러지고 사라지는 상황을 닮았다. 다행히도 설 추석 등은 이런 상황에서 ‘나’와 ‘우리’의 뿌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1년은 365일(양력·태양력)이다. 30일과 29일이 갈마드는 음력은 12달이 양력보다 11일 정도 적다. 중동 어떤 지역의 이슬람달력은 이런 (순수한) 태음력이다. 지역마다 다른 역법은 고대 세계 여러 지역의 천문학의 (응용의) 차이였다. 354일 태음력에 태양력의 요소를 더해 만든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lunisolar calendar)이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 나라들의 ‘음력’이다.

태음력과 태양력을 빈틈을 이어주는 ‘재료’는 윤달(閏-)이다. 윤달은 태음력 상의 날짜와 계절이 서로 어긋나는 것을 막기 위해 끼워 넣는 달이다. 태양력 3년이 좀 덜 되는 기간에 윤달이 한 번씩 돌아오는데 5월에 제일 많이 들고 11~1월에는 거의 없다. 여벌달 공달 덤달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이가 소한이네 집에서 얼어 죽었다’는 속담의 대한(大寒) 소한(小寒) 등 24절기는 음력에 양력의 요소가 반영된 태양태음력의 요소다. 춘분(春分) 하지(夏至) 추분(秋分) 동지(冬至) 등이 태양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염두에 두면 이해가 쉬울까?

이런 바탕 없이 ‘달만 바라보는 것’이 음력이고, (서양식으로) 달은 좀 이상한 이미지라는 생각을 품으니, ‘음력은 비과학적’이라는 성급하고 설익은 주장과 진술(陳述)이 속출한다. 해가 바뀔 때면 음력(태음태양력)과 태양력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띠풀이 글이 속출하고, 육십갑자의 해 이름에 관한 핀트 덜 맞는 논설이 난무한다. 바탕 없이 어찌 (제대로) 유식하랴.

육갑은 (음력으로) 육십갑자를 챙겨보는 것이다. ‘육갑한다’는 말이 어쩌다 이리 비속하게 쓰이게도 됐으나, 그 뜻은 실은 우리 의식과 생활의 바탕이다. 육십갑자(六十甲子)는 천간(天干·하늘과 태양의 질서)과 지지(地支·땅과 달의 질서)의 여러 조합(組合)이다.

천간은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의 10개다. 오행(五行)사상과 관련, 두 개씩 오방색(五方色)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과 연결되어 색깔과 동서남북과 중앙의 방위를 배당받는다. 갑·을은 청색(東), 병·정은 적색(南), 무·기는 황색(중앙), 경·신은 백색(西), 임·계는 흑색(北)이다.

지지는 자(子 쥐) 축(丑 소) 인(寅 호랑이) 묘(卯 토끼) 진(辰 용) 사(巳 뱀) 오(午 말) 미(未 양) 신(申 원숭이) 유(西 닭) 술(戌 개) 해(亥 돼지)의 12개로 각각 상징동물이 있다.

올해 정유(丁酉)년은 그 상징이 ‘붉은 닭’이다. 甲子는 천간과 지지의 첫 번째를 합한 육십갑자의 뜻이고, 육갑은 육십갑자의 준말이다. 육갑은 이렇게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시기(時期) 매기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여러 뜻을 품어낸다.

이런 역법과 절기 등은 서로 교차하면서 우리 정신이 깃든 생활문화를 오래 지어왔다. 잊어도 될 것, 없어도 지장 없는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될, 문화의 자원인 것이다.

대동문화 98호 [2017 1,2월호]

강상헌 편집인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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