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서 미디어본부장

문화도시, 또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라 말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개관했고 동아시아문화도시, 미디어아트창의도시로 선정된 곳이다. 세계 5대 비엔날레 꼽힌다는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하여 격년제로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다.

그곳은 어디인가. 늘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도시이다. 예향, 의향, 미향 그리고 문화도시, 인본디자인도시, 광산업도시, 민주도시, 인권도시, 평화도시, 생태도시, 기후도시, 자동차도시 …. 남구 양림동 근대역사문화마을이 있다. 북구 각화동 시화문화마을이 있다. 광산구 농공단지 관리사무소가 소촌아트팩토리로 변신했다. 서구 양3동 발산문화마을이 개발 중이다. 이름만 붙이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도시이다.

동구 대인예술시장에서는 주말마다 ‘별장’이 열리면서 청춘남녀들의 데이트코스가 되고 있다. 동명동 카페거리는 눈요기하는 산책코스이다. 사직동 포크음악거리엔 음악창작소가 들어섰다. 음악과 미술, 공연이 어우러지는 제법 밤을 물들게 하는 도시이다.

젊은이들은 물론 여행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문화적 갈증을 해소시키려 이 도시를 찾았던 사람이라면 금방 열정이 식는다. 현실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이 도시를 방문하면 보잘 것 없는 도시라는 사실을 누구나 금방 안다.

아침 식사시간이다. 20대 딸이 말한다. “아빠, 우리나라 대도시 가운데 가장 보잘 게 없는 도시가 어딘지 아세요.” 약간 흥분된 어조다. “글쎄.” 대답이 뻔한 질문을 한다. 그래도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귀를 쫑긋 하며 들어본다. “아빠가 사는 도시에요. 우리나라 광역시 가운데 정말 …. 더 말하기 싫어요.”

며칠 뒤, 20대 아들이 묻는다. “서울에 있는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면 어디 보여 줄만한 곳 좀 알려 주세요.” 다시 난감한 질문이다. “글쎄. 양림동이나 대인예술시장은 어떨까. 아니면 가까운 담양이라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곳이니 괜찮을 듯 싶었다. 바로 반응이 왔다. “아빠는 문화전문가라고 하면서 그 정도 밖에 말 못하세요.”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거든다. “음, 여수나 순천이라면 더 낫지 않을까.” 결국 아들은 그 서울 여자친구를 기차역에서 만나 영미오리탕에서 점심을 먹고 여수로 갔다. 그녀가 기대한만큼 맛을 느끼고 먹었는 지 그 후일담을 듣지는 못했다.

요즘은 SNS 시대다. 내가 겪은 이야기나 감동을 느끼는 현장이나 재미있는 모습들을 곧바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그리고 블로그에 사진을 올린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지만 이는 곧 다른 사람에게 그 감동이나 장소를 홍보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들에게 홍보하라고 돈을 주지 않는 데도 말이다.

‘문화도시’라고 이름을 붙일 때는 도시의 정체성과 문화적인 도시비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도시의 비전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관련전문가라고 말하는 대학교수, 시의 문화관련 담당 공무원, 도시의 문화기획자들, 여기저기 물어보아도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대답이 없다. 왜일까. 답은 한 가지다.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이 도시가 어디일까. 이미 짐작했을 것이다.

시장은 임기가 지나면 바뀐다. 운이 좋아 다시 출마해 선거에서 당선되어야 임기가 연장될 뿐이다. 법적으로 3선 이상을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장수시장도 12년이 지나면 떠나야 한다. 시장이 바뀌어도 도시는 그대로 있다. 중요한 것은 도시의 비전이다. 시장의 시정방침보다 상위에 있어야 한다.

문화도시의 시장마다 다른 목소리를 냈다. 물론 시장의 시정운영 철학에 따라 자신의 생각이 더 옳다고 판단하거나 할만한 가치가 높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앞 시장이 했던 일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원점으로 되돌리는 일들이 많다. 행정낭비, 예산낭비, 갈등구조를 양산하면서 골 깊은 수렁으로 빠지지는 않는 것인지 심히 우려된다.

지난해 문화도시는 3개의 용역보고서를 발표했다. 문화예술진흥중장기계획, 문화산업콘텐츠중장기계획, 미디어아트창의도시마스터플랜 등이다. 이외에도 이와 유사한 용역보고서들이 과거에도 있었다.

문화예술진흥중장기계획(전남대 산학협력단, 2015.4.)의 비전은 ‘문화예술의 일상화, 행복한 문화공동체 광주’이다. 문화산업콘텐츠중장기계획(전남대 산학협력단, 2015.11.)의 비전은 ‘아시아 실감콘텐츠 중심도시’이다. 미디어아트창의도시마스터플랜(조선대 산학협력단.도시문화집단CS, 2015.10.)의 비전은 ‘휴먼미디어시티 광주’이다. 지역문화진흥시행계획(광주발전연구원, 2015)의 비전은 ‘문화로 행복한 지역창조’이다.

이에 앞서 광주장기종합발전계획(광주전남발전연구원, 1998)의 비전은 ‘빛의 도시 광주 2020’이다. 빛과 생명의 문화광주 2020(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2000)의 비전은 ‘빛과 생명의 문화광주’이다. 광주발전 비전과 전략 정책토론회(광주시, 2003)의 도시비전은 ‘첨단산업도시, 아시아 문화예술의 메카’이다. 제1차 지역혁신발전 5개년계획(광주시.광주전남발전연구원, 2004)의 비전은 ‘서남권 첨단과학, 산업, 문화중심도시 건설’이다. 문화산업 비전 2020연구(광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2009)의 비전은 ‘아시아 시각효과산업 중심도시’이다. 글로벌 디자인도시 광주(서울디자인센터, 2013)의 비전은 ‘아시아 디자인 중심도시 광주’이다.

100여개의 보고서를 살펴보니 비전은 있었다. 그러나 모두 다르다. 이에 따르는 추진목표도 모두 다르다. 어떤 경우에는 시장의 시정방침을 비전으로 내세우거나 단어를 차용하곤 했다. 그야말로 중구난방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문화도시의 비전을 세우고 도시의 정체성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함께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토론하면 좋겠다. 그리고 시민들께 물어 도시의 비전을 만들자.

蛇足

신물 날 정도로 비전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입에 재갈을 물리고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비전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언젠가는 하루 내내 너무도 많이 이야기해서 나 자신조차 지겨웠던 적이 있다.
그러나 모두가 비전을 완벽히 공유할 때까지는 끝없이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 잭 웰치 회장

[조영탁의 촌철활인 : 한치의 혀로 사람을 살린다!]

비전은 가야할 방향입니다. 구성원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있어야 비전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비전이라도 제대로 공유되지 않으면 죽은 비전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알아듣고 한 방향으로 가슴 뛰는 행진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신물 날 정도로
끝없이 비전을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정인서 미디어본부장  chkorea95@hanmail.net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