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영배

사람들은 언제 어느 때, 술이라는 벗을 필요로 할까. 인류가 만든 가공 음료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술. 그 역사도 헤아리기 어렵거니와 어떤 소소한 일상에도 빠지지 않으니, 단순히 정의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술의 마력(?)은 인정해 줄 수 밖에 없겠다.

하지만 냉정히 따지자면 술은 과유불급(過猶不及),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터. 좋다 나쁘다의 판단보다, 그저 ‘적당히’를 넘어서면 여지없이 문제가 된다는 명쾌한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게 간결한 진리를 모를 리 없건만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술 앞에서 냉정 보다 열정을 택하곤 한다. 숱한 문장가들이 남겨놓은 술에 대한 애찬과 절절한 헌사는 이를 충분히 증명해 주고 있다.

마력을 지닌 일상의 벗

시와 술, 거문고를 지독히 좋아해 삼혹호(三惑好)라 불렸던 고려의 명문장가 이규보(1168~1241)는 ‘술이 없으면 시도 지어지지 않고/ 시가 없으면 술도 마시고 싶지 않아/ 시와 술을 내 모두 즐기니/ 서로 어울리고 서로 있어야 하네’라고 읊었다.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 정송강도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게/ 내 집에 꽃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하옴세/ 백년 세월 시름 잊을 일 의논코자 하네” 라며 삶 속에 깊이 자리한 술을 기꺼워마지 않았다.

문장가들 뿐 만이 아니다. 그림 그리는 이들 중에도 술 없으면 붓을 들지 않았던 인물이 많다. 호쾌한 달마도 그림으로 유명한 김명국은 술이 있어야 먹을 갈았고, 취하지 않으면 붓을 잡지 않았다. 연담(蓮潭)이라는 호를 술 취한 늙은이, 취옹(醉翁)으로 바꾸었으니 그의 술 사랑이 어떠했는지 물어무엇할까. 돈을 던져주며 그림을 청한 양반 앞에서 붓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 외눈박이가 된 최북(崔北). 그는 막걸리 여섯 되가 하루 주량이었던 광기 넘치는 화가였다.

언제나 취해서 비틀거리며 허허롭게 살던 그는 펄펄 눈 내리던 어느 날 대취해 성문 밖에서 얼어 죽었다고 전해온다. 임금의 병풍 그림을 완성하라던 명을 어기고 줄곧 궁궐을 뛰쳐나온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 세상의 틀로 가둘 수 없었던 천재 화가의 소원은 돈도 벼슬도 아닌 한세상 술타령이나 하다 가는 것이었단다. 술이 만들어낸 예술은 아니겠으나, 술이 없었다면 그들의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잠깐 생각도 해 본다.

술보다 술잔

마상배

이왕 먹는 술, 색다른 정취와 멋에 취하고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술잔에 신경을 썼던 이도 있었다. 조선의 시인이자 문장가로 알려진 김득신은 술잔을 퍽이나 아꼈던 인물. 그가 남긴 글 중 사배설(沙杯說)에는 사기 술잔을 아끼는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언젠가 관동(館洞) 사는 친구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반짝이고 깨끗한 사기 술잔이 눈에 뜨였다. 술에 취한 틈을 엿보다가 빼앗아 가지고 소매에 넣어 왔다. (중략) 유기(鍮器) 술잔은 술맛이 변하지만 사기 술잔은 술맛이 변하지 않는다. 내가 사기 술잔을 꼭 가지려 하는 동기가 참으로 여기에 있다.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친구들을 내 집에 모이게 하여 이 술잔으로 함께 술을 마셨다. 술맛이 기가 막힌 것은 이 술잔이 있어서다. 감히 아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술잔의 매력에 빠진 것도 재미나지만, 점잔은 선비가 취중을 틈타 친구의 사기 술잔을 빼앗아 오는 모습엔 실소가 절로 나온다.

말 위에서 각오를 다지며

단순한 개인적 취향과 술맛을 위한 잔 외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술잔도 있다. 뾰족한 팽이모양에 국화 한 송이가 상감되어 있는 청자 술잔이 한 손에 쏙 들어올 듯 앙증맞다. 그런데 끝이 뾰족하다 보니 놓임새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한 잔 따르면 계속 들고 마시거나 한 번에 다 마셔야 하는 술잔. 바로 전쟁이 흔하던 시절 기마생활을 하던 군인들이 말 위에서 사용하던 마상배(馬上杯)라는 잔이다.

와인 잔처럼 굽이 높은 마상배도 있다. 이런 마상배는 굽다리 부위가 잘록하고 길어서 보기에도 좋다. 안과 밖에 꽃문양이 새겨져 있는 마상배에 술을 채워 마시면 잔 속에 꽃밭이 펼쳐지는 느낌이겠지 싶다. 무등산 충효동 도요지에서도 분청사기 마상배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잔에는 특이하게도 ‘어존’이라는 한글이 새겨져 있다. 어존이라면 임금이 쓰는 물건이 되는데, 실제로 임금에게 바치려고 만들다 만 실패작인지, 임금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담은 개인적인 작품이었는지 정확한 내력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말 위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요즘으로 치면 명백한 음주운전이겠다. 하지만 적과 언제 싸울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편하게 둘러앉아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 말 위에서 먹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다는 증거였다. 사실 전쟁터야말로 술이 가장 필요한 곳이었다. 누구든 비장한 각오로 술 한 잔을 들이키면 평소에 없는 용기도 불끈 솟고 추위를 달래기에도 좋았으니 전세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제격이었을 것이다. 결국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죽기를 각오하고 독주 한잔을 비운 후 미련 없이 땅에 던져 잔을 깨어 버린다. 자그마한 잔이지만 그 속에는 비장하고 처절한 각오, 앞날을 알 수 없는 처연함이 담겨있었다.

가득 참을 경계하라

한자 잔배(盃) 자를 풀이하면 불명(不皿, 가득 채우지 말라)이 된다. 실제로도 ‘가득 참을 경계하는 잔’이 있었으니 바로 계영배(戒盈杯)라는 것이다. 지나침을 경계하기 위해 술이 7할 이상 차면 술이 다 빠져나가도록 만든 신기한 잔으로 절주배(節酒杯)라고도 불린다. 고대 중국에서 과욕을 경계하며 하늘에 제사지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계영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왕실의 진상품을 만들던 사기장 우명옥이 스승에게 열심히 익혀 마침내 명성을 얻고 재물을 모았다. 하지만 우명옥은 주색에 빠져 재물을 모두 탕진한 후 잘못을 뉘우치고 술을 끊고 스승에게 돌아와 계영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술잔을 거상 임상옥(林尙沃)이 갖게 되었는데, 그는 계영배를 늘 옆에 두고 과욕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마상배와 계영배 모두 옛 사람들이 각오와 경계의 뜻을 담아 만든 술그릇들이다. 술에 매이지 않고, 술에 빠지지 않는 냉철함, 옛 사람들의 술잔에 다시금 눈이 가는 이유다.

대동문화 68호[2012년 1.2월호]

김은정 대동문화 교육사업단장  webmaster@chkorea.news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