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토요일 아침이다. 밖을 내다보니 밤새 많은 눈이 내렸다. 잠귀가 밝은 터라, 눈이 아닌 비가 왔더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본디 눈과 비는 그 본성이 같다. 하지만, 비는 소란을 동반하고 눈은 소리를 삼킨다. 눈은 그렇게 조용히 밤사이에 온 세상을 하얀 도화지로 바꾸어 놓았다.

고요의 힘이다. 모더니즘 시인 김광균은 ‘설야(雪夜)’에서 눈 오는 밤의 정경을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청각적으로 묘사했다. ‘무음(無音)’의 역설이리라. 

올 겨울을 눈 없이 보내는가 했더니, 대한(大寒)에 이어서 입춘(立春)이 지난 정월 대보름 전야에도 많은 눈이 내렸다. 카톡이 울린다. 지난번에 아껴두었던 장불재 산행을 하잔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후다닥 배낭을 꾸리고 약속 장소로 나간다.

사전에 미리 준비하여 떠나는 산행도 좋지만, 오늘처럼 즉흥적으로 가는 산행도 좋다. 마음만 먹으면 30분 이내에 산행 출발지인 증심사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다. 그래서 무등산이 좋고 광주가 좋다. 오늘은 증심사► 당산나무►중머리재►용추 삼거리►샘골►장불재 코스를 가보려 한다. 거리상으로는 왕복 약 8km, 시간으로는 5시간 정도 예상한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약속 장소인 증심사 정류장에 도착해 보니, 눈도 내렸고 그리 춥지 않은 날씨 덕분에 이미 등산객들로 만원이다. 무등산이 국립공원으로 승격되고 난 후, 외지에서 관광버스로 오는 단체 등산객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장불재로 오르는 최단거리 코스를 택했다. 지난번 중머리재에서 바라만 봤던 장불재의 아름다웠던 설경이 눈에 밟혔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다만 인간의 마음이 변할 뿐. 중머리재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중머리재는 무등산 등산객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무등산을 찾는 등산객의 약 6할 정도는 중머리재에서 하산한다. 오늘은 장불재로 향하는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다. 장불재 가는 길의 ‘눈꽃 터널’이 장관이기 때문일 것이다.

광주천 발원지, ‘샘골’

중머리재 약수터를 지나 장불재로 가는 길은 가파른 돌길로 시작된다. 눈이 많이 내린 탓에 평소 울퉁불퉁한 돌길이 눈과 함께 섞여 요철이 없어 걷기가 한층 편하다. 발밑에서 뽀드득 거리는 눈의 감촉도 좋다. 무릎 관절의 충격도 완화시켜 준다고 한다. 겨울산행의 매력 중 하나이다.

약 10여 분 정도 오르는 동안은 큰 나무가 없는 길이라 햇볕에 그대로 노출된다. 한여름에는 그늘이 없어 붉게 타오르는 태양을 온몸으로 받고 가야 한다. 산은 아름다운 풍경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는 법, 이 구간만 지나면 바로 우거진 숲길이다.

20여분을 더오르다 보면 용추 갈림길이 나온다. 용추 삼거리는 중봉, 중머리재, 장불재로 가는 삼거리 길이다. 너덜길을 건너고 시누대 밭 길을 휘돌아 걷다 보니 ‘깊은 산속 옹달샘’이 나온다. 어디에선가 토끼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여기가 바로 광주천의 발원지 ‘샘골’이다.

샘골은 옛날 화순 사람들이 장불재를 넘나들 때 목을 적시던 곳이었다고 한다. 장불재에서 모인 물이 지하수로 흐르다 비로소 이 샘골에서 지표면으로 나온다. 용추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용추폭포에서 곤두박질치고 나서는 제2수원지에 모여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다시 광주 도심을 동서로 길게 관통하는 광주천으로 흘러들어 광주를 촉촉이 적시며 지나간다. 약 23km의 광주천을 여행한 후에 호남의 젖줄 영산강에 다다른다. 그리하여 궁극은 서해(西海)를 이룬다.

제봉 고경명 선생(1533~1592)의 무등산 답사기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의하면 선생과 광주 목사 임훈(1500~1584) 일행이 1574년 초여름에 무등산 서석대에 오른다. 여기 샘골에서 잠시 쉬는 동안 미숫가루를 타서 마시며 “‘금장옥례(金醬玉醴)’에 비할소냐” 라며 물맛에 감탄한다. 유서 깊은 샘이다.

샘 주위의 돌들은 무너져 내려있고, 금방이라도 샘이 메워져 버릴 것만 같아 위태롭다. 보호 펜스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아쉬운 부분이다.

눈꽃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샘골을 뒤로하고 장불재로 오르는 길은 그야말로 ‘눈꽃 터널’이다. 설국(雪國)으로 가는 환상의 출입문이다. 온통 별천지 눈꽃 세상이다.

늘 푸르기만 한 소나무도, 노란 억새꽃도, 까만 바위도 모두 자아를 잃어버린 채,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하얀 모자를 쓰고 있다. 가히 몽환(夢幻)적이다. 한 폭의 ‘몽유설원도(夢遊雪園圖)’가 펼쳐진다. 어지러운 세상 잡사를 다 잊게 한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다. 눈꽃 터널 위로 가끔씩 푸른 하늘이 보인다. 하얀 눈과 대비되어 푸르다 못해 쪽빛 하늘을 연출한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 국어시간이 생각난다. ‘만해 한용운’님의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라는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무아지경에 빠진 채 걷다 보니 어느새 장불재에 다다른다. 장불재는 해발 919m에 위치한 넓은 개활지다. 무등산 9부 능선이다. 서석대, 중봉, 규봉암, 중머리재, 화순 안양산으로 가는 오거리길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옛날 광주, 담양, 화순 사람들이 만나는 교류와 소통의 장이었다고 한다. 사방이 탁 트인 넓은 공간이다. 바람이 거세다. 통신사와 방송사의 거대한 송신탑이 주변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정상에 있는 군부대 이전과 함께 자연경관 복원 차원의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장불재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으나, ‘유서석록’의 기록에 의하면 장불재 근처에 ‘장불사(長佛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 최근 전남대학교 지리학과 박승필 명예교수는 무등산에서 옛 절터 20여 곳을 새롭게 발견했다고 한다.

장불재 밑에서 기와를 굽던 가마터와 축대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장불재’는 ‘장불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무등산의 정상 서석대와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온다. 다음을 기약하며 아껴 두기로 한다.

무등산에는 수많은 길이 있고 ‘봉(峰)’과 ‘재’가 있다. 각각의 길에는 삶과 발자국 수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발굴하여 무등산의 소중한 가치를 높여야 할 것이다.

장불재에서 바라보는 광주 시가지의 모습이 요즘 시국만큼이나 뿌옇다. 저 산아래 도시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감추어져 있다.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얼굴, 얼굴들. 나는 과연 어떤 얼굴일까. 무등산은 이 모든 얼굴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품어준다. 광주의 어머니다!

임영열 시민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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