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 대동문화재단 사무처장

하나. 서재 앞에 있는 해당화와 박태기나무를 뽑고 그 자리에 파초 스무 그루를 심는다. 이게 행복 아니겠는가?

하나. 잘 드는 칼로 한여름 복중에 빨간 쟁반 위에 잘 익은 수박을 자른다. 이게 행복 아니겠는가?

하나. 가난한 선비가 돈을 빌리러 찾아와서는 얘길 하지 못하고 다른 얘기만 한다. 마음을 헤아려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얼마나 필요한가를 물어본 후 돈을 빌려준다. 그리고 “일이 끝났으니 그냥 가려나? 나와 술 한 잔 하지!”라고 말한다. 이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에는 17세기 중국의 비평가 김성탄이라는 사람이 쓴 ‘행복한 순간 33절’이라는 글이 인용되어 있다. 김성탄은 친구와 함께 비 때문에 열흘 간 어떤 절에서 묵으며 이 글을 합작했다고 한다. 33가지의 행복한 순간을 적어놓은 글이다. 위에 그 중 3가지를 소개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지난 3월 20일은 춘분이었다. 춘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은 날이라 봄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담도 고치고, 들나물을 캐먹기 좋은 날이었다.

이 날은 또 유엔이 정한 ‘세계 행복의 날’이었다. 그런 기념일도 있나 싶어 인터넷에 질문했더니 국제 평화 기구인 유엔이 세계 모든 사람들의 복지와 경제 발전을 위해 2012년 제정했다고 답한다. 유엔은 매년 행복의 날에 ‘세계 행복 보고서’도 낸단다.

올해에는 노르웨이가 1등을 했다. 소득, 건강한 수명, 사회 복지, 관용,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 부정부패로부터의 자유가 5가지 평가 기준이라고 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소득이 높다. 건강하게 오래 산다. 또 사회 복지 제도가 잘되어 있다. 평등과 공정이라는 가치가 엄정하게 관철되고 관리되고 있다. 자치단체나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고 국민들은 서로가 관용과 배려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린다. 한데 한국은 세계 행복지수 56위였다.

행복지수가 높은 국가는 행복을 국민 모두가 골고루 나누고 있어 행복 평등 국가이기도 하다. 재화는 쓸수록 줄어드는데, 행복은 나눌수록 더 많은 행복을 생산한다. 공동체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지고, 내가 불행해지면 공동체도 불행해져 국가 행복 지수는 낮아진다. 행복은 관계의 소산이고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져간다. 행복은 온전히 개인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행복은 합작이다. 이것이 ‘세계 행복 보고서’가 우리에게 보고해준 교훈이다.

한국이 왜 56위를 했는지는 모두가 다들 아는 것이니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 ‘헬조선’을 지나 ‘이번 생애는 포기야(이생포)!’라고 부르짖으며 주저앉아버린 청년들이 많은 나라가 어찌 행복할 것인가? 더 불행한 것은 정치 체계와 경제 구조를 상위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독점하고 있어서 불공정과 불평등이 고착되어 대물림된다는 사실이다. 불행한 사회에서 불행은 그렇게 집단적으로 대물림된다.

장미꽃 피는 날 기다리며

2017년 세계 행복의 날은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이 검찰 소환 조사를 받기 하루 전날이었다. 유엔으로부터 한국은 국민 행복지수 56위라는 성적표를 받은 날이었지만, 한국 행복지수는 그날만큼 상위권이었을 것이다. 국민들은 촛불의 힘으로 헌정 사상 최초로 절대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집으로 돌려보내버린 뒤였다.

그렇게 봄이 왔다. ‘장미 대선’이라고 해서 새로운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선출해 장미꽃을 선물하는 날이 온다는 춘신이 왔다. 행복은, 행복한 세상이 오리라는 참된 믿음과 연대와 실천에서 온다는 사실을 국민들 스스로 증명해보인 위대한 봄이 왔다.

그런 봄날 김성탄의 글을 감히 훔쳐 이렇게 적는다. 하나. 봄이 되어 오래 목은 마당을 쓰니 깨끗한 세상이 되비친다. 하나. 겨울옷을 벗어버려 앞가슴이 서늘해진다. 꽁꽁 언 땅에 매장되어 있던 진실의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풀려나니 이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하나. 봄도다리쑥국을 끓여 막걸리 함께 내어놓으니 아프던 친구가 오랜만에 웃는다. 세상 사람들이 다 매화처럼 웃는다. 우리 살림살이도 겨우내 오그리고 있던 기지개를 켠다. 이것이 행복 아니겠는가?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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