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가 생겼다. 목적이 분명하다는 것에 피가 끓었다. 낯선 곳의 그리운 사람. 서도역을 찾아가는 마음이 그랬다. 글書길道의 역. 지금은 폐선이 되어 역사(驛舍)만 덩그마니 남았다. 그 오래된 역에 땅거미가 내리고 늦봄의 게으른 볕이 빨리도 사라졌다. 그 어둠속에서 뻐꾸기가 울었다. 휘파람을 부는 듯 가늘고 애절했다.

최명희 혼불문학관

최명희의 품, 노적봉에 안긴 ‘혼불문학관’

남원을 지나자 바람이 순해졌다. ‘광풍제월光風霽月’,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눈에 익은 지명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혼불, 도깨비불이라고도 하며 남자의 혼불은 대빗자루처럼 길고 여자의 혼불은 사발모양이라고 한다. 사람이 죽기 전에 먼저 육신을 떠난다. 즉 혼불이 떠난 육신을 주검이라 한다.

오늘은 오월 초파일이다. 2561년,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연등이 내걸렸다. 미풍에도 몸을 뒤척이는 연등을 보며 뭇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최명희 혼불문학관 쪽으로 빨려들 듯 다가섰다. 노적봉을 넘어온 어둠이 빛에 풀어져 점점 시나브로 어두워졌다. 혼불이 타오를 시간이 됐다.

혼불문학관 현판

처음 혼불을 알게 된 것이 언제였던가. “언어는 정신의 지문, 나의 넋이 찍히는 그 무늬를 어찌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라던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너른 마당을 휘적휘적 걷다가 ‘소살소살’ 정자에 올랐다. 이 바람, 이 그리움들, 얼마 만에 만나는 고적함인가! 나도 몰래 손바닥에 바람을 담아 비벼본다.

손금 골골이 차오른 보드라움, 이 한 번의 느낌으로 먼 길을 달려온 보상을 받았다. 한적한 시골마을, 어디에 숨었는지 뻐꾸기가 운다. 그 소리가 마치 휘파람소리처럼 들렸다. 사방을 밝힌 철쭉꽃도 최상급으로 빛나고 있다. 이미 혼불문학관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얼굴 큰 작약, 그 향기에 마음을 열어놓았던 터이니 모든 것이 사랑스러울 수밖에.

인적이 끊긴 서도역, 물결무늬의 콩씨를 심고

서도(書道)역 풍경

혼불문학관에서 차마 떼지 못했던 발걸음으로 인하여 지척지간에 있는 서도역에 늦었다. 늦었다고 막차가 떠날 일도 없지만, 이미 어둠이 내린 서도역에 초저녁 초생달과 더 멀리 저녁별이 반짝이고 있다.

서도역 서도길

서도역, 그리움의 끝에 닿은 듯, 한번도 밟아보지 안았던 땅이 여기저기 밟았던 땅으로 확산되고 있다. 언제였던가, 홋카이도의 ‘행복역幸福驛’을 찾았던 날이. 사방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해바라기밭, 그 한가운데서 만난 행복역은 웅크리고 앉아있는 소년같았다. 너무 반가워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은 낡은 의자와 손때가 다시 지워지는 손잡이, 행복이라는 글자가 무조건 좋았다.

지금은 서도역이다. 서도역, 글의 길이다. 어쩌면 최명희의 혼불과 연결된 것이 운명인 듯 싶다. 최명희도 저 꼬부랑 철길과 낮은 언덕의 이 서도역에서 기차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오곤 했으리라. 벤치에 앉았다. 가슴의 소리는 가라앉고 옥정호로 흘러가는지, 새끼개구리들이 조심스레 울고 있었다.

한때 서도역의 꽃밭이었을까. 작은 텃밭 가장자리를 파고 강낭콩씨를 심었다. 벌써 몇 해쯤 책상 서랍에서 뒹굴던 갈색 물결무늬와 말라붙은 흰 눈을 가진 씨앗. 섣부른 땀방울로 젖었는지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콩씨를 공손하게 땅에 묻었다.

최명희의 혼불 중에서

그리움은 다시 그리워지며 최상급을 만든다

순간의 기억이 쌓여 그리움을 만들고 최상급을 그리움은 행동을 만든다. 이번 여행이 그렇게 생겨났다. 서도역을 그리워했던 만큼 위안을 주고 최명희의 혼불문학관은 벌써 몇 차례의 만남을 되풀이하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에도 최명희 문학관이 있었으니 생전의 만남은 없었지만 최명희 소설과는 구면인 셈이다.

꼭 다시 만나자는 기약이 없어도 인연은 돌고 돌고, 뻐꾸기도 휘바람을 불 던 사매마을. 세월의 빠름처럼 서도역을 통과하는 전라선이 어둠을 가르고 질주한다. 그리움의 계단을 한층 더 올라선 느낌이다.

김을현 기자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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